전 부산 서구청장에 대한 내용은 김영오(1940) 문서
,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김영오(1920) 문서
참고하십시오.<colbgcolor=#f2f2f2,#555> 이름 | 김영오 |
별명 | 유민아빠 |
출생 | 1970년 ([age(1970-01-01)]세) |
전라북도 정읍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천태산자락) | |
소속 단체 | 금속노조 |
가족 | 5남 1녀 중 막내 배우자, 장녀 김유민, 차녀 김유나 |
종교 | 가톨릭 |
링크 |
[clearfix]
1. 개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 유가족으로 김유민 양의 친아버지다. '유민아빠'라는 별명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단식투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금속노조의 조합원이다.[1][2] 종교는 가톨릭이다.2. 생애
1970년 전라북도 정읍시 천태산자락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사춘기 때 잘못된 선택으로 학교를 관두고 가출해 3여 년을 방황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20대 후반부터는 사업도 해 봤지만 번번이 망했고 빚만 늘어갔다. 27세 때 결혼하고 두 딸의 아빠가 됐다. 빚을 갚기 위해 딸들과 떨어져서 돈을 벌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이혼했다. 부인은 얼마 뒤 재혼했고 본인은 홀로 지내야만 했다. 2021년 4월 16일 참사 해역에 나오면서 근황이 공개되었다.3. 행적
3.1.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교황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을 하며 친필로 쓴 편지를 전달했었다. # 그는 원래 천주교인이 아니었으나 교황 방문 시기 전후로 세례를 받았다.
3.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단식투쟁
세월호 사고 당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장기간의 단식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해졌는데도 본인은 끝까지 단식을 풀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그를 살리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문재인을 비롯한 야당 국회의원들도 동조 단식에 들어갔고 결국 단식 투쟁을 시작한 지 46일 만에 단식을 풀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장기적인 싸움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3.3. TBS 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
TBS 교통방송의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의 진행자 겸 현장 리포터를 맡았다. 2019년 2월 25일 개편으로 이지선 작가에게 물려주었다. # #해당 방송 홈페이지
4. 논란 및 사건사고
그가 세월호 참사 책임자 처벌과 각종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사회적인 주목을 받자 자연스럽게 여러 논란이 생겨났다.4.1.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신
- 세월호 유족들 중 일부가 대리운전 기사를 폭행한 사건에 대해 '함정이다'라는 언행을 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의 발언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태도를 변명하고자 보수 언론사와 여권에서 종북몰이를 하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라고 주장하고 반대 측에서는 '아무 죄 없는 대리기사를 폭행한 것을 정부 핑계로 합리화 하려는 수작' 등의 비난이 있었다. 유가족의 입장에서 세월호 참사 특조위의 활동이 지지부진했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커지는 데 일조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청와대 캐비넷 문건에서 밝혀진 것에 의하면 권력에 완전히 순치(馴致)되어 있던 당시 언론들 여럿이 박근혜 정부의 사주를 받고 그 사건을 고의적으로 부풀린 정황이 드러나 아예 틀리는 말은 아니게 되었다. # 사실 이 사건은 일개 폭행 사건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특히 보수 성향 언론과 일부 종편) 이는 시민단체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열광적인 보도'라는 말을 써 가면서 비판했을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커지는 데 일조'한 것은 순전히 유가족들의 잘못만이 아니라 '때는 이때다.'하고 좋은 건수를 잡은 세월호를 싫어하는 권력자들이 조직적으로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선동했기 때문이었다.
- 세월호 인양 준비 현장을 다녀온 뒤 페이스북에 그 후기를 올렸는데 인양을 위한 케이블 연결 등을 위해 세월호 선체에 구멍을 뚫거나 사전 인양된 닻 등을 두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선체를 절단, 훼손 중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이후 국군기무사령부가 세월호 수장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가 증거 인멸을 선택지 중 하나로써 고려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직접 만나 "박근혜 정부를 압박해주십시오."라는 정치적 주문을 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내용의 타당 여부를 떠나 종교 지도자인 교황에게 정치적인 주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결례다. 일각에선 당시 세월호 특별법 입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입법이 통과되도록 압력을 넣어달라는 주장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역시 무리다. 입법은 입법부의 몫이기 때문에 압박이 필요하다면 박근혜 정부가 아닌 국회를 언급했어야 했다. 물론 대한민국은 정부도 법안제출의 권한을 가지지만 이미 제출된 법안에 대한 최종가결은 당연히 3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부인 국회의 역할이다. 이를 몰랐을 리 없고 실질적으로 국회든 대통령이든 교황이 타국(대한민국)의 정치기관에 압력을 행사할 리가 없으므로 당시의 발언은 박근혜에 대한 미움과 불신에 동조해 달라는 대중을 향한 메시지로 해석된다.
- 뉴스에서 오디오가 송출되진 않았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팽목항을 방문했을 때 씨x년아라고 외친 장면이 포착되었다.
4.2. 가정사 논란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김유민 양의 외삼촌 윤도원이 2014년 8월 23일 네이버 뉴스에 “다른 세월호 유족 분들이 단식하면 이해하겠지만...김영오 씨 당신이 이러시면 이해 못 하지. 당신이 유민이에게 뭘 해줬다고? 유민·유나 어릴 때 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 없는 사람이”, “누나(김유민 양 어머니) 너랑 이혼하고 10년 동안 혼자 애들 둘 키운 거 알지? 그동안 얼마나 힘들 줄 아냐? 그러는 넌 그동안 뭐했냐?”라고 댓글을 작성하면서 생긴 논란이다. 동월 25일에는 <MBC 뉴스데스크>에서 외삼촌의 주장을 바탕으로 보도했는데 동월 20일에 타 방송사와 달리 단식으로 인한 응급실 이송 사실을 보도하지 않다가 그제서야 내놓았다. 당시 사회2부장은 취재기자가 쓴 송고본 중 김영오 본인의 반론, 차녀 측의 반론 등을 삭제하고 부장이 쓴 기사로 바꿔 제작을 지시했고 취재기자 측은 3차례의 전화 끝에 간신히 반론 3문장을 넣고 보도했다.[3] 이에 그 기자는 사내 게시판에 이를 반성하는 글을 썼다가 비제작부서로 좌천되었다.#
이에 대해 김영오는 페이스북에 적은 ‘단식일기’를 통해 “2003년 이혼하면서 대출이 많아 방 한 칸짜리 월세방 겨우 얻어서 지금까지 힘겹게 살다 저 세상으로 유민이를 보냈다”면서 “지금도 대출을 다 못 갚아 (보증금)100만 원에 (매달) 30만 원짜리 월세방 살고 있다”고 밝혔고 “매달 비정규직 월급으로 이자도 값기(갚기) 힘들게 살다 보니 양육비를 매달 꼬밖 꼬밖(꼬박꼬박) 보내주지 못하고 몇 달에 한 번씩 보낼 때도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더라도 딸들은 아빠 곁에 꼭 붙어 다니고 잘 때는 언제든 두 공주가 양 팔벼개(팔베개)를 하고 자곤 한다”, “이혼하고 너무 힘들게 사느라 두 아이를 자주 못 보고 사주고 싶은 것도 못 사준 게 한이 맺힌다”고 해명했다.[4]
김영오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옹호하는 측은 김영오가 이혼한 부모에게 50 : 50으로 나오는 여행자 보험금 1억 원을 유민엄마한테 전액 양보했고 대출도 다 갚지 못한 상황에서 2,000만 원을 또 대출 받아서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자식에게 잘 해주지 못한 부모의 마음"이라며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김영오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이후 계속해서 양육비를 제공해 왔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둘째 딸로 이혼 후 엄마와 살고 있는 김유나 양이 가정사를 둘러싼 의혹에 "기소권과 수사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려는 아빠의 노력이 무너진 것 같아서 속상했다”고 언급하였다. ##2#3 김영오의 둘째 딸은 8월 25일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편지 전문 보러 가기
2017년 12월 28일, MBC는 그간의 보도에 대한 사과 방송을 하면서 자신들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고 사생활만 들추었다며 그를 포함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사죄하였다.
[1] #[2] 세월호 참사 당시의 무능한 대처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주된 비판의 이유가 되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 중 가장 유명한 김영오의 신변이 조선일보와 같은 친정부 보수 언론사에 의해 주목받았는데 실제로는 2013년 7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며 자동으로 조합원이 된 것뿐이었다. #[3] 2016년 <한겨레>가 입수해낸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메모에 따르면 이러한 보도의 이면에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개입이 있었다고 암시하는 기록이 있었다. 당시 MBC 사회2부장 측은 훗날 'MBC 정상화위원회' 조사 당시 진술에서 "보도 하루 전 누군가가 관련 내용을 카카오톡에 보내 줘서 취재 지시를 하게 됐다"고 간접 시인했지만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며 밝히지 않았다. 이하 출처: <MBC 정상화 4년, 그 진실의 기록과 미완의 청산> -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2021. p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