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7 10:56:01

프란치스코(교황)/한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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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기념 로고[1]

1. 개요2. 배경3. 일정4. 특징
4.1. KTX 이용4.2. 서강대학교 방문4.3. 세계 최초 교황의 평신도 직접 세례4.4. 세월호 참사 유족 위로
5. 어록6. 반응
6.1. 대한민국6.2. 유럽권6.3. 일본6.4. 필리핀6.5. 중국6.6. 북한
7. 여담

1. 개요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프란치스코 교황대한민국을 방문한 일정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배경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프란치스코 교황 2014년 방한 당시 상황[2]
과거 조선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이 대거 시복되는데, 이 시복식대전교구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에 방한했다. 이는 198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좌 착좌 후 두 번째 아시아 지역 방문이다. 한편 교황 프란치스코의 첫 동아시아 방문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착좌 후 외국 순방지는 방문 순서대로 브라질(남아메리카), 이스라엘(서아시아),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한국이다. 세계청년대회가 아닌 지역 청년대회 방문은 최초.

바티칸 교황청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4일 대한민국을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8월 10일, 대한민국 방문을 앞둔 교황이 '한국인들에게 보내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메시지'를 게시하였다.

우정사업본부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념우표를 발행하였으며, 교황 방한 기념주화발행하였다.

8월 14일, 알리탈리아 항공 전세기를 타고 대한민국 서울공항도착했다. 전세기이지만 교황 집무를 위한 별도의 개조는 없으며, 교황은 비즈니스석 앞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지하 1층에서 6개월간의 "'천국의 문'바티칸 문화체험전(교황방한기념)"을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서 항공으로 공수받은 실물 크기에 진품 수준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견본 천국의 문을 성대히 세워놓고 전시하였다. 여러 조각상들과 바티칸 국보급 유화 작품들도 함께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교황 방한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 6,000송이가 넘는 장미를 보냈다. 기사 이 장미들은 시복식 제단과 명동성당 내부를 장식했다.

그리고 2014년 8월 18일 오후 1시 10분경(대한민국 시간 기준)에 대한항공[3] 전세기 KE9927편으로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3. 일정

그림으로 보는 교황 방한 일정
볼드체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의 주요 행사이다.

대체적으로 광화문광장 시복식을 제외하면 대전교구청주교구 지역에 일정이 더 많이 편중되어 있는데 교황 방한이 성사된 것은 아시아 청년대회를 주최하게 된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공이 컸다.[7] 유흥식 주교가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부탁하면서 방한이 성사되었고, 이 방한 시기에 맞추어 시복식도 같이 준비하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일정은 상당히 빡빡하게 짜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서울특별시, 광주시, 전라남도 고흥군(소록도), 부산직할시, 대구직할시 등을 불과 4박 5일만에 돌아봤던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일정보다는 다소 덜 빡빡해보이지만 방한 당시 한국 나이로 팔순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임을 감안하면[8]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든 스케줄이다.

대한민국 측은 자수가 놓인 보자기를 기념선물로 증정했고, 바티칸 측은 로마 시 지도가 그려진 동판화를 기념선물로 증정했다.

4. 특징

4.1. KTX 이용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할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 사전에 예고된 헬리콥터가 아니라, KTX를 이용하여 작은 놀람을 전했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측은 대전의 날씨가 강풍과 소량의 비를 동반한 기후상황이라 헬기를 사용하기 어려워 KTX를 사용하는 두번째 방안을 선택한 것이라 밝혔다.

교황이 이용한 KTX는 열차번호 4109로 임시열차였으며 차량은 KTX-1 005호기, 4호차 특실의 2C 좌석이었으며 경호 문제로 나머지 특실까지 모두 통제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객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경호상 통제를 하긴 했으나 적어도 교황은 KTX 특별열차[9]가 아닌 일반인이 흔히 볼 수 있는 좌석을 이용한 셈이다. 한국철도공사는 교황청으로부터 전세열차 할인 10%를 제외하고 특실 2칸의 요금을 제값으로 받았다고 한다.

교황은 이때 생전 처음으로 고속열차를 타게 됐는데 "매우 기쁘고 좋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 열차에서 교황을 응대한 승무원은 교황 관련 서적에 싸인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고 한다. 갑작스레 결정된 열차 이용이지만 대전역 대합실에서는 100여명의 많은 인파가 교황을 맞이하였다. 마중 나온 최연혜 한국철도공사 사장에게 교황은 “헬기 못 뜨게 어제 밤에 구름 불러온 사장님이군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이후 한국철도공사는 해당 좌석을 특별히 기념하여 이 해 연말까지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의 전액을 기부해 '자모원'이라는 미혼모 관련 기관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2015년 12월 3일 코레일은 교황이 앉았던 좌석 판매수익금 1,500만원을 천주교 대전교구에 기부하였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저소득층이 푸드뱅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산하 복지기관에 기부했다고 한다.

당시 KTX 기내 여객전무는 이후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경호원의 만류에도 승무원들이 요청한 사인을 손수 해줬다고. #

4.2. 서강대학교 방문

방한이 결정되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서강대학교를 방문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수회 출신이었던 교황이 같은 재단 소속인 서강대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었다.

하지만 방한 일정이 나오면서, 학교 방문이 없음이 공식 확인되었다. 게다가 방한 첫날 서강대 유기풍 총장이 페이스북에 작성한 방한 환영 글에서도 교황의 학교 방문에 대한 한 사람의 댓글에 "서강대 방문을 위해 오랜 노력이 있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인지하게된 것인데 교황님께서는 '예수회' 소속 신부님이시라 교황이 되신 후 해외 첫 방문지(예; 브라질)에서, 가톨릭 공동체의 통합적이고 균형적 화합을 생각하시는 깊은 뜻에서 예수회(서강) 관련 시설이나 공동체의 방문을 자제하셨답니다. 이번 대한민국 방문에서도 그러하신 그 깊은 뜻을 저희가 먼저 이해해 드립시다."라고 하며 교황의 서강대 방문 계획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교황이 깜짝 방문하였다. 이 날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있었던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와 당진 솔뫼성지에서의 아시아청년대회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방문한 것이다. 오후 8시 5분에 서강대 예수회 공동체에 방문하였고, 관구장 신원식 요한 신부와 부관구장 조인영 알베르토 신부, 공동체 원장대리 염영섭 라우렌시오 신부가 교황을 영접하였다.

교황의 서강대 방문은 예수회 사제들의 삶을 직접 보고 싶다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이 시간이 예수회 공동체의 '공동휴게' 시간으로 예수회 출신 교황으로써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동료 회원들을 편하게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관구 예수회 회원들의 활동을 격려하며 "어려운 시기에 사제이기에 앞서 사목자가 돼 달라", "사람에게 위로를 전해주는 예수회원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예수회원들에게 "저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40분간의 예수회 신부, 수사와의 비공식 면담이 끝난 후 9시 경 서강대학교 후문을 통해 숙소인 주한교황청대사관으로 향했다.

교황의 방문 소식이 학교 내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교황을 보러 나왔다. 교황은 차내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학생들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축복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환영하는 인파 가운데 쌍둥이 아이들을 직접 껴안고 축복하기도 하였다.

4.3. 세계 최초 교황의 평신도 직접 세례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단원고 2학년 이승현 군의 부친 이호진 씨가 교황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다. 다음은 세례를 받게 된 과정이다.출처
8월 15일 800km 길 끝에서 만난 교황에게 아버지는 "I love you, I love you(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며 그의 손에 입을 맞췄습니다. 교황은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 “2천리 180만 보를 한발 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딛었습니다. 교리를 배우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교황은 "자격이 충분합니다”고 답했습니다. "교황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십시오."

8월 17일 오전 7시께 주한교황청대사관 안. 세례를 받을 작은 성당에 도착한 아버지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참 만에 눈을 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뒤돌아보니 교황이 바로 옆에 서 있습니다. 기도하는 아버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교황이 숨죽이고 그곳에서 잠시 기다렸던 것입니다. 2번째 만남이라 더욱 반가왔습니다. 아버지는 "건강하셔야 합니다"라고 여러 차례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교황이 화답했습니다.

"교황에게 직접 세례를 요청한 용기에 감복했습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2천 년 가톨릭 역사상 교황이 평신도에게 세례를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교황마저 등을 돌리면 큰 좌절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혹시라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세례를 하지 못할까봐 수행원들에게 직접 아버지 연락처를 챙기고 일정을 조율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교황의 다정한 말씀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늘의 별이 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아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주십시오" 교황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거듭 약속했습니다. 교황의 왼쪽 가슴에는 유가족이 선물한 세월호 노란 리본 배지가 빛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날 '이호진 프란치스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다짐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고 몸가짐도 더욱 바르게 세우겠습니다."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파일:세월호 유족 직접 세례.jpg
이호진 씨에게 세례를 주는 교황

이호진 프란치스코는 8월 18일 가톨릭 신자로서 대한문 미사에 처음 참례하게 됐다. 1989년 방한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2명의 청년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며, 이호진 씨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이호진 씨는 세월호 유족으로 딸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전국을 누빈 것으로 유명하다. 교황이 오시자 그에게 십자가를 전달했는데 언론 인터뷰에서 "체력만 받쳐주면 더 돌고 싶었는데 그게 끝나자 너무 허탈합니다!" 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때 본인이 직접 세례를 요청하였지만 이 사실은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세례 받은 이후에야 언론 인터뷰에서 본인이 세례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천주교에서는 교리 공부를 해야지만 세례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호진 씨는 교리 공부 중에 세월호 참사가 나서 공부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교황이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평했다.

4.4. 세월호 참사 유족 위로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파일:external/thumb.mt.co.kr/2014081811423722695_1.jpg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전달한 편지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파일:external/img1.daumcdn.net/20140819164708460.jpg
교황의 편지를 대독하는 천주교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리노 주교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특별법 처리와 관련하여 교황과 생존자 및 유족들 간의 만남도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유가족들은 도보 순례 중 대전광역시를 방문했다. 그리고 교황은 이때 받은 노란 리본을 방한 일정 내내 가슴에 달았다.

일각에서 시복식이 열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 중인 유족들 때문에 행사 진행에 잡음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자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강우일 베드로 주교가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시복식을 거행할 수 없다.",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겠다."고 대국민 메시지에서 밝힘으로써 정부의 강제 퇴거 입장에 대해 반대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세월호 유족 대표들도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현재 농성장 부스 가운데 신자들의 시야에 방해가 되는 부스 일부를 철거하고 행사 중에는 유족 대표 일부만 남기로 하였다. 한편 세월호 참사 유가족으로부터 받은 십자가를 교황이 로마로 가져간다는 천주교 교황방한위원회의 전언이 있었다.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시복식에 세월호 유가족 및 생존자 600여 명이 참석했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함께 해 왔던 교황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강제퇴거 자체가 그의 가르침과 맞지 않고 잡음이 있더라도 그들을 안고 가는 것이 교황, 더 나아가서 종교 자체의 본질임을 드러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구조되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에게 직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며 결코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위로 편지를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리노 주교를 통해 보냈다. 여기에는 실종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번 방한 일정 때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세월호 유족들과의 만남은 사실 처음부터 미리 일정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서로 조율해 나가면서 특히 교황의 의지가 반영이 많이 된 것이었다. 8월 18일 M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의하면 도보순례를 하는 유가족들이 '교황님을 만나뵈었으면 좋겠는데...'라고 하면서 걷는 도중 인터뷰를 했고, 그리고 이어진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때의 만남에서 이어진 요청이 '단식 중인 유가족을 안아달라', '직접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였다. 모두 현장에서 요청을 받고 교황이 일정을 조율하여 직접 실천한 행동이었다는 것.

본래 방한 일정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시복식과 대전교구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청년대회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으나, 교황 방한의 방향에 대한 토론이나 합의 없이 행사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이의 제기를 교황청에서 받아들였다. 이후 교황청이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한국 내 분위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했고 방한 준비도 방향이 조금씩 바뀌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연재 ‘바티칸을 가다’의 취재를 위해 지난 6월 로마를 방문했던 신학자 김근수 씨도 “교황청 기관지 편집장을 인터뷰했을 때 ‘교황님이 한국 소식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봤는데 한국 대사관, 서울대교구, 바티칸 언론 외에 밝힐 수 없는 2~3개 출처가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방한 일정이나 장소에 대한 한국 내부의 불만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교황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나 전세계에 톱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할 때부터 구조 현황 및 뒷이야기까지 하나 하나 매일 매일 체크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8월 18일, 교황은 명동성당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강정마을 주민,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역 주민, 용산 참사 피해자, 북한이탈주민납북자 가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주변에서 이러한 행보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2025년 교황이 선종하자 2014년 방한 당시 그의 행보를 기억하는 세월호 유족 김영오[10]한상균·김득중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장, 용산참사 유족 유영숙 씨가 애도를 표했다. #1 #2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7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이호진 씨의 세례식을 마친 후 자필로 직접 서명한 한글 편지를 세례식에 배석한 수원교구 안산대리구장 김건태 루카 신부를 통해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교황은 이 편지에서
"직접 찾아뵙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지 못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러나 저는 이번 한국 방문 기간 내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실종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고 말했다.

교황은 실종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주님, (이들이) 하루빨리 부모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리노 주교와 안산대리구장 김건태 루카 신부가 함께 이 편지와 묵주를 들고 팽목항을 찾아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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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반응

6.1. 대한민국

청와대에서는 국빈방문 시 행해지던 행사 대부분이 축소되고 동원되는 차량 등 의전도 크게 줄였다.[11] 종교관련 뉴스 및 보도 사이트들에서는 불교계와 이슬람교계를 포함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외신에도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뉴스전문 채널들은 당연히 참가중이며 공식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SNS를 통해 서로 정보를 게시하기도 하는 중이다.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나 타 종교를 가진 사람들, 평소 가톨릭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번 방한에서 보여준 행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냉담자나 성당에 잘 나가지 않는 '나이롱' 신자들도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교황 방한 이후 SNS를 통해 '광화문 광장에서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교통 통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풀렸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인터넷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물론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애당초 쓰레기가 생길 여지는 많지 않았겠으나 100만 명이라는 인파가 한 곳에 몰렸음을 감안하면 특별한 경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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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때 교황의 가슴에 달린 추모 리본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통해 건네진 노란 리본을 방한기간 동안[12] 왼쪽 심장근처에 달고 있었다는 점[13], 청와대 경호원들이 제지하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어필한 점등으로 앞에서 말한 세월호 사고 이후에 보여준 정치권의 실망스러운 행보와 권력과 재물 편에 앞장서는 정치인들의 행동에 크게 실망하고, 일부 개신교인들이 보여주는 추태에 크게 실망한 국민들이 교황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이미지가 더 올라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외로, 대한민국에서 마케팅 측면으로도 큰 파급력이 있었다. 서산시에서는 해미 성지에서 교황이 식사를 하였던 메뉴를 상품화시켜 해미 정식이라는 이름으로 관광 마케팅에 활용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으며 동시에 해미읍성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그 외에도 위에 언급했듯 의전 차량(포프모빌)으로 활용되었던 기아 쏘울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의전 차량으로 자주 모습을 비추면서 2세대 출시 이후 큰 인기를 보이지 않은 쏘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효과도 있었다.#

6.2. 유럽권

유럽권은 교황의 행보에 대해 다루며 30년전의 방한과 다른 소탈한 방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조수미인순이가 출연하는 8월 15일 행사에 대해 소박한 식장이지만, 세계구급 대우를 받는 인물들이 출연한다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유럽권에서 파견된 기자들은 교황을 밀착 취재하고 있으며, 귀국하는 비행기에도 동승해 교황의 방한 소감이나 입장 등의 보도를 하게되었다. 브라질 방문시 현지 언론에 의해 일부 보도가 왜곡[14]되었다는 논란에 오른 점을 인지한 바티칸측이 실질적으로 공개창구로 동원한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6.3. 일본

방한이 발표되고, 공개 일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겠다는 내용이 발표된 직후 패닉 상태에 빠졌다. 또한 방한 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해 전 세계 여론이 환기되는 상황이 올 수 있어 후폭풍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열심히 관련 보도를 하고 있다.

일부 극우매체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억지로 위안부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대한민국미국일본을 국제관계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인 쇼라며 방한 자체를 비하하고 있는데, 바티칸 이외 국가에서 최초로 시복식을 거행한 것이 알려져 크게 당혹한 듯했다.

어떻게든 꼬투리 잡기 바쁜 넷 우익들은 교황이 대한민국 소형차를 탔다는 것에 "경호문제를 전혀 신경쓰지 않은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바티칸 측에서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애초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 자가용뿐만 아니라 의전차량을 검소하게 타는 성격이고 방탄차도 정어리 깡통 안에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이용하지 않는다.

방한 마지막 날인 8월 18일 미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7명이 맨 앞자리에 앉았고 교황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7명의 손을 일일이 잡고 위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김복동 할머니가 교황에게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 차별을 반대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빛 나비 배지를 건네주고 교황은 그 배지를 달았다. 교황은 "죄 지은 형제들을 아무런 남김 없이 용서하라" 언급했다.

이러한 교황에 대한 태도에 일본 언론들은 “교황에게 위안부 문제를 억지로 어필하는 대한민국 정부”, “미사 중 위안부 언급 없음”, “바티칸 아닌 韓서 제안”, 심지어 “위안부 강제징용은 거짓” 등등 정신나간 축소, 왜곡적인 뉴스를 보도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만남의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

6.4. 필리핀

필리핀2014년 8월 12일, 일본의 강제동원 위안부들에 대한 필리핀 정부지원과 배상 소송이 대법원에서 무위처리 되었다. 이는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일본에게 밉보이면 안되는 외교적 상황이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대법원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는 행정부가 다뤄야할 외교문제임으로 청구권행사 요구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절차 조력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필리핀의 피해자 지원단체들이 "교황님이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주셨다"는 내용을 홍보하며 교황이 대한민국에서 위안부 피해자와 만나 거론할 내용을 주목하고 있다. 명동성당 쪽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제일 앞줄의 좌석을 먼저 제공하였다는 공지를 올린 것으로 인해 상업화 되어가는 비판을 받은 필리핀 종교계에 대한 대한 회의론과 개혁론들이 거론되어 술렁거리는 중이다.

6.5. 중국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본토에서는 별 말이 없었지만[15], 홍콩 교구(교구장 통혼 요한 추기경)가 있고 가톨릭 신자가 상당수 있는 홍콩과 역시 가톨릭 신자가 상당 수 있는 마카오[16]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 교황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중국의 남동부에서 대규모의 트윗이 있었다는데 중국 대륙은 트위터가 차단되어 있는 관계로 홍콩, 마카오 그리고 외성인 주축의 일부 대만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홍콩마카오를 더한 양의 트윗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교황의 이웃나라 방문에 고무된 홍콩인들은 우산 혁명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다.[17]

6.6. 북한

북한이 무력시위로 KN-02 탄도미사일의 개량형으로 추정되는 단거리 발사체 5발을 쏘아 올렸다. 다만 북한은 교황의 방문에 따른 무력시위라는 국내보도와 관련하여, 자신들은 교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발언하며, 오히려 발사 예정일에 한반도에 온 교황이 잘못했다는 듯한 기사를 내보내며 교황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였다.#[18]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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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로, 이사야 60장 1절에서 발췌하였다.[2] 엠빅뉴스의 영상이다.[3] 교황이 해외 순방을 할 때 순방국에 입국할 때는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의 국적기를 이용하고 바티칸으로 귀국할 때는 순방국의 국적기를 이용하는 관례가 있다.[4] 알리탈리아A330-200에 탑승하였다.[5] 당초 서울에서 대전까지 헬기로 이동하려던 일정이었으나 갑자기 KTX 이동으로 변경되었다. 관련된 이야기는 아래에 후술한다.[6] 장애 아동들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당초 수도자들과 예정된 성무일도가 취소되었다.[7] 이후 유흥식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안으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임명됐는데 이는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교황청 내에서 차관보급 이상의 직위를 수행한 것이다.[8]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방한했을 당시 64세였다. 당시 기대수명으로 보자면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교황은 매우 건강했다. 5년 뒤인 1989년에도 한국을 방문했지만 이때는 서울에서만 머물렀다.[9] 기존에 36번으로 알려진 KTX-1 특별열차는 일반석으로 환원하고 그 대신 모 KTX-산천이 특별편성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황은 KTX-산천이 아닌 KTX-1을 탔기 때문에 특별열차는 이용하지 않은 것이 된다.[10] 8월 16일 시복식 당시 교황과 직접 악수해 큰 화제가 되었다.[11]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빡빡한 교황의 일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급히 준비한 일정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자꾸 요청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12]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달고 있었다고 한다[13] 정치인들이 옷깃에 다는 모양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추모의 상징성보단, 이런 것 달았다고 과시하는 패션으로 사용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착용법 자체를 비슷한 뱃지인 사랑의 열매에서 따온게 실수인듯 하다.[14] 브라질 방문 당시, 청년대회 등을 묻는 형태로 방한 내용이 악용되었다.[15] 그럴 게 애초 중국은 중국공산당중국천주교애국회 소속의 사제에게만 서품을 한다.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보다 공산당 주도의 애국회를 통해 사제 후보자를 지명하고 교황청에서 그중 적절히 임명되었다고 생각하는 후보자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므로, 당연히 바티칸 측에서 크게 관여하지 못 한다. 대만에서는 2% 남짓한 외성인만 가톨릭을 믿음에도 여태 바티칸이 대만과 단독수교하는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다. 마잉주대만 총통부터가 가톨릭 신자였다.[16] 19세기부터 조상이 마카오에 살았던 마카오 화교인 마카이엔사들은 다들 가톨릭을 믿고 포르투갈어 구사가 가능하다. 영화 동방불패에 악영산 역으로 나온 미모의 여배우 이가흔이 마카이엔사이다. 마카오는 원래 인구가 적어 90%가 대륙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17] 지도자인 조슈아 웡(黃之鋒, 광동어로는 웡치풍, 표준 중국어 즉 국어로는 황츠펑. 대만에선 황츠펑 군이라 불렀다)부터가 여호수아라는 이름 뜻을 보면 알수 있든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 출생의 기독교인이고 그의 애인인 티파니 찬 역시 기독교인이며 월가 점령 시위에서 영향을 받은 occupy for central 이라는 시민단체 회원들도 가톨릭 신자들인 등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주축이 되었다. 일부 천막은 예수상 및 예수와 마리아의 성화를 앞세우기도 했고, 예수상이나 성모상에 기도하는 시위 참가자들도 많이 보였다. 영국식 교육 및 유학 등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비율이 높은 10대 청소년이나 20,30대 청년층 등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적극적으로 반민주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대륙에서 망명한 파룬궁 회원들과도 연대 집회를 갖고 이들을 돕는다.[18] 북한에는 가톨릭 사제가 없으나, 일종의 선전용으로서 장충성당 등 가톨릭 종교 시설을 운용하고 있다. 물론 정식 사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