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08:53:14

김원빈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27년 3월 29일에 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식적으론 개천시 빈농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전 소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서 광산 노동자로 일했는데 이 때문에 간도 태생으로 알려진 듯 하다. 해방 후 개천군 인민위원회에서 사업하였으며 1950년 8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통계부장, 부처장, 처장을 거쳐 1954년 7월, 내각 사무국 1급 참사에 임명, 중앙통계국 검열부장에 이르렀다. 1956년 7월, 중앙위원회 부원, 과장을 거쳐 부부장까지 승진했다.

1961년 10월, 평양시 인민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내각 경공업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65년 4월, 경공업위원회가 경공업성이 되자 경공업 부상이 되었다.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67년 11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가 1969년 3월, 오백룡의 뒤를 이어 수산상에 임명되었다.[1]

사망 직전인 1970년 4월, 최고인민회의 4기 4차 회의에 토론자로 출석하는 등 열심히 일하다가 1970년 8월 16일, 오후 7시에 만 43세를 일기로 급사했다.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과 국가기관의 요직에서 다년간 사업하면서 우리 당과 4천만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그 구현인 당의 로선과 정책을 높이 받들고 국가사업과 나라의 인민경제발전을 위한 사업에 헌신분투하였으며 수산상의 중책을 지니고 나라의 수산업 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기울여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써주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도 아닌 그를 위해서 부수상 최용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의위원회도 구성해주었다. 북한이 밝힌 공식 사인은 병환이었는데, 국내에 떠도는 정보에 따르면 출장 중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의 예우도 이해는 되는 부분.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원빈은 당시 냉동설비의 부족으로 동해안의 명태들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썩어버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해안으로 직접 가서 야외냉동을 해가면서 평양으로 조달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이 "병원에서 좀 더 빨리 손을 썼더라면 혹시 살려낼수도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라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하며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과 함께 김원빈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수산상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1] 북한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68년 12월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