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1. 개요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이 8세기 후반에 지은 김유신의 행장이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이 김유신행록에서 설화적인 내용을 대부분 쳐내고 3권 분량으로 요약한 것이다.
열전에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이 일본에 779년 갔다온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김유신행록의 저술 시점은 8세기 말을 상한으로 하며 흥덕왕 10년(835)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한, 행장의 주인공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정작 열전에는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779년~835년 두 시점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
2. 상세
김장청의 아버지 김융은 혜공왕 시기인 770년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779년에 김융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인정되어 간신히 복권되긴 했으나 9년 동안 역적 취급받는 과정에서 가문의 세가 기울었고 김장청은 가문의 전성기인 김유신의 일대기를 써내서 명예를 회복하려 했다.광개토대왕릉비나 용비어천가처럼 작자의 직계 조상을 찬미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행록 10권은 객관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조상 김유신을 신라의 충신이자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대단히 미화한 내용이 잔뜩 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죽하면 이 김유신행록에는 꾸며낸 말이 많다며 허무맹랑한 부분은 쳐내고 요약한 김유신 열전만 해도, 같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비교해 보면 고전한 부분은 빼고 이긴 부분은 과장하는 경향이 보인다.
예를 들어 황산벌 전투는 신라본기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썼지만 정작 지휘관 김유신이 주인공인 김유신 열전에선 '백제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의 공이 컸다' 정도로 때워 버렸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결국 이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대단히 고전했기 때문에 전개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산성 전투는 신라본기에서는 성주 동타천의 분전으로 고구려군을 막아낸 것으로 썼지만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제사를 지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김유신행록은 수백 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전해지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 김부식도 '과장된 것이 너무 많다'고 해서 10권 중 대부분을 쳐내고 3권으로 요약했다. 이 때 쳐낸 7권 분량은 현실적인 일화라기보단 거의 설화의 영역에 들어가는 신이한 내용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비해 설화적인 내용을 가감없이 수록한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몇 가지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김부식은 뺐지만 일연은 실을 만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첩자 백석 및 고구려 점쟁이 추남이 김유신으로 환생했다는 소문, 김춘추와 문희를 축국으로 이어주고 화형쇼를 한 것 등. 그리고 파한집에 실린 천관녀 에피소드도 행록에는 있었는데 김부식이 군더더기로 봐서 뺀 것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김유신에 대한 공식 기록,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 전체가 매우 빈약했음을 나타내주는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 내에서 '(고려시대의) 꼴[2]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김유신조차도 기록이 남아있는 게 별로 없어서 이 김유신행록을 참고해야 할 정도였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