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45:11

김응수(1880)

파일:김응수(188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미쓰시로 오우슈(光城應洙)
자 / 호 명진(明進) / 소계(小溪)
본관 광산 김씨[1]
출생 1880년 9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동선면 가야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228번지)[2]
사망 1959년 4월 10일[3] (향년 78세)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무원골마을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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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광산김씨 긍구당종택의 12대 종손이다.

2. 생애

1880년 9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동선면 가야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228번지)의 광산 김씨 긍구당(肯構堂) 종택[4]에서 긍구당종택 11대 종손인 아버지 김영운(金永運, 1852 ~ 1940. 12. 11)과 어머니 진성 이씨(1856 ~ 1899. 6. 10)[5]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와룡면 가구리로 이주해 살기도 했다.

일찍이 애간(愛澗) 이화성(李和聖)[6]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오전 1시,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읍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김익근(金益根)·이종악(李鍾岳)·이비호(李丕鎬) 등을 비롯한 2,000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안동군청, 안동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에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을 던졌다.

이때 일본 경찰과 안동수비대 병사들이 총칼을 뽑아 휘두르며 발포하는 등 무력 진압을 단행했고, 군중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얼마 뒤 김응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3월 23일 안동경찰서에 구류되었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으나, 곧 공소를 제기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9년 4월 10일 사망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3. 여담

  •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 셋째 사위 서주(西州) 이용준(李容準, 1916. 3. 3 ~ ?)이 처갓집인 긍구당 종택 서고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고 몰래 가져와 김태준에게 넘겨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긍구당종택 14대 종손인 김대중(金大中, 1934 ~ )[7]이 자신의 조부(김응수)가 이용준에게 "매월당집, 훈민정음 왜 안 가져오냐, 이 도둑 같은 놈아"라고 꾸지람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 양간공후(良簡公后)-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37세 수(洙) 항렬.[2] 출생지인 가야리 228번지에는 광산김씨긍구당고택이 자리잡고 있다.[3] 광산김씨평장대보 권15 776쪽에는 1957년 6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조선 중기의 학자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 1520. 8. 26 ~ 1588. 3. 15)가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본래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 참봉공(參奉公) 종택이었다고 한다. 김언기는 첫째 부인 영양 남씨(1522 ~ 1555. 12. 6) 남세용(南世容)의 딸과 1555년 사별한 뒤, 영천 이씨(1540 ~ 1599. 8. 17) 참봉 이인필(李仁弼)의 딸과 재혼하여 30대 후반부터는 처갓집인 이곳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이 집은 둘째 부인 영천 이씨 슬하에서 태어난 차남 김득숙(金得䃤, 1561 ~ 1649. 4. 26)이 물려받았으며, 지금의 당호는 김언기의 현손 김세환(金世煥, 1640 ~ 1703. 2. 14)의 호를 딴 것이다.[5] 이철영(李徹永)의 딸이다.[6] 진성 이씨이다.[7] 김좌희(金佐喜)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