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888><colcolor=#fff> 끄엉데 彊㭽(강저) | Cường Để | |
| 출생 | 1882년 1월 11일 |
| 대남국 안남 보호령 후에 | |
| 사망 | 1951년 4월 6일 (향년 69세) |
| 일본 도쿄 | |
| 본명 | 응우옌푹전 Nguyễn Phúc Dân |
| 가문 | 응우옌 왕조 황실 |
| 직업 | 독립운동가, 황족 |
1. 개요
끄엉데(Cường Để)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기 독립운동가이자 황족이다. 그는 판보이쩌우 계열의 동유운동의 리더이자 상징으로 활동했고,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독립운동을 지향했다.2. 생애
끄엉데는 1882년 후에에서 자롱 황제의 직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 혈통은 그가 프랑스가 옹립한 타인타이, 주이떤, 바오다이 대항하고 경합할 수 있는 상징적 권위를 갖는 이유였다.1904년 판보이쩌우가 베트남 유신회(Duy Tân Hội, 維新會)를 조직하면서 끄엉데를 운동의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듬해 둘은 일본으로 건너가 베트남 독립에 친화적인 인사들의 지지를 물색하는데 전념했다. 또 1907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응의숙(慶應義塾))을 본딴 동경의숙(Đông Kinh Nghĩa Thục, 東京義塾)을 설립하여 수백명의 베트남 유학생을 일본에서 군사, 기술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같은 해에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가 개선되면서[1] 일본에서 활동하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지원이 끊기고 종국에는 수배 대상이 된다. 1909년 판보이쩌우와 끄엉데는 홍콩으로 망명하고, 껀브엉 운동(勤王運動) 출신으로 판딘풍 사후 베트남 본토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인 호앙호아탐을 지원하기 위해 시암과 홍콩을 오가며 무기를 구매한다.
1911년 우창 봉기에 크게 감명받은 끄엉데와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광복회(Việt Nam Quang Phục Hội, 越南光復會)를 건립한다. 이 조직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 대전 기에도 중국 남부 인사들과도 접촉하며 베트남에서 반프랑스 봉기를 이루려고 하지만 대부분 조기에 발각되며 좌절되었다. 결국 1925년 판보이쩌우가 상하이에서 억류되어 인도차이나 당국으로 송환되고, 남은 평생을 후에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보내게 되어 끄엉데와 이별하게 된다.
그럼에도 끄엉데는 꾸준히 독립을 구가했다. 이후 일본의 아시아에서 패권이 강화되면서 끄엉데는 점차 일본에 의지한 독립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토야마 미츠루를 포함한 일본 극우 성향의 범아시아주의자들과 점차 접촉을 늘리게 된다.
1940년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고 공동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끄엉데는 바오다이 황제 대신 자신을 옹립해달라고 일본에 요청했지만, 일본은 안정성을 위해 바오다이를 유지하며 끄엉데를 배신한다. 그와 친일 독립조직은 1945년까지 베트남 공산당이나 베트남 국민당과 경합하는 제3의 세력으로 활동한다.
결국 일본이 패전하면서 끄엉데의 정치적 기반도 사라졌다. 끄엉데는 1951년 도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