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고야 아베크 살인사건(名古屋アベック殺人事件).
1988년 일본 나고야시에서 일어난 강도상해, 강간과 더불어 시체유기까지 저지른 잔학한 살인 사건으로, 20세기 일본에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과 함께 현재까지도 최악의 청소년 범죄로 꼽힌다.
사건명인 ‘아베크(avec)’는 프랑스어로 '~와 같이'라는 뜻으로 한국에서도 일부 쓰이는 단어이머 흔하게 ‘남녀 동반’을 뜻한다.[1]
일본에서 소년법의 기준을 세웠던 나가야마 노리오 사건, 즉 나가야마 기준 이후 최초로 미성년자에게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흔치 않은 사건 중 하나이다.
2. 사건의 전개
2.1. 살인 이전의 사건
1988년 2월 22일, 17세에서 20세로 이루어진 남성 4명, 여성 2명의 6인조 그룹이 당시 불량 그룹이 시너[2]를 흡입하던 도중 그룹 중 주범격이었던 코지마 요시오가 “밧캉이라도 할까?(バッカンでも行ってやろうか)“라고 제안했다. ‘밧캉’은 강도질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쓰이지않는 단어이기때문에 그룹 무리에서 지은 은어일 가능성이 높다.오전 2시경에 킨죠 부두(金城埠頭, 당시에는 어둑한 부둣가였으나 현재는 레고랜드가 생기는 등 관광지로 변하였다) 부둣가에 도착했는데 이 곳은 데이트 스팟인 동시에 전년도인 1987년에도 불량 그룹이 검거되는 등 치안이 좋지못한 장소였다고 한다. 이들은 82번 부둣가에 정차되있던 차량 안 커플을 습격했으나 다행히도 이들은 두 대의 차량에 쫒기면서도 항구 근처 경찰서로 도망쳤기에 돈을 빼앗지 못하고 그대로 실패하였다.
첫번째 사건에서 1시간이 지난 3시 30분경, 첫번째 장소에서 250m가량 떨어진 81번 부둣가 인근에 돌아온 가해자들은 처음 실패를 교훈이라도 삼듯이 차량의 퇴로를 막고 20대 커플이 탄 차량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현금 86000엔과 여성이 입고있던 고가의 상의, 롤렉스 시계 등의 금품을 훔치고 차량에 탄 커플을 끌어내려 마구 폭행하였다. 남성이 여성을 감싸려고하자 그룹은 더욱 각목 등으로 더욱 더 심하게 그들을 폭행하여 기사에 따르면 전치 1주의 부상을 입혔고 폭행 중 다른 차량이 다가와서 가해자들이 도망쳤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2.2. 세번째 사건
사건 기사와 피해자들의 사진.
첫번째 습격이 성공한 뒤 이전의 장소에서 또 다른 범행을 실행했다간 신고를 당할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탄 뒤 10km정도 떨어져있는 오오다카 녹지공원으로 향했다.[3] 23일 오전 4시 반경, 공원 주차장에 정차한 도요타 체이서 한 대를 발견하고 곧바로 철 파이프로 앞 창문을 마구 깨고 습격하였다. 도망치려던 노무라는 급히 차를 후진시켰으나 뒤에 퇴로를 차단한 가해자 차량에 부딪혀 차가 부서지고 말았다. 이에 더욱 분노한 가해자들은 앞 유리를 깨부수고 이윽고 끌려나온 노무라의 소지금 1100엔을 빼앗았다. 가해자 중 여성 두 명은 스미요를 끌어내고 신고있던 하이힐로 마구 밟은 뒤 강제로 윗옷을 벗겨냈다.
이들은 커플이던 미용사 노무라 아키요시(野村昭善, 당시 19세)와 여자친구 스에마츠 스미요(末松須弥代, 당시 20세)를 마구 폭행하고 여성을 집단으로 윤간했다. 윤간 후 주차장에 전신 알몸으로 있던 스미요를 두 명의 여성이 끌고가 머리카락에 불을 붙이고 음부에 시너를 들이부은 뒤 태우고 온 몸에 담뱃불을 가져다대며 고문했다. 남성들은 피투성이가 된 노무라를 정좌시키고 끝도 없이 때렸다.
당시 노무라 아키요시는 나고야의 미용실에 근무하던 선배 미용사였으며 스에마츠 스미요는 견습으로 들어온 후배 미용사로 교제를 시작하고나서 부모님에게도 서로 소개를 했을 정도로 사이가 깊었던 커플이었다. 22일 밤 퇴근 후 외출을 한다고 나와 사라졌기에 두 명 다 가족을 통해 실종신고가 내려져있었다.
가해자 그룹은 그들을 폭행한 후 오전 7시 30분경 패밀리 레스토랑인 스카이락(과거에 국내에도 있었던 체인이며 현재는 가스토(ガスト)로 바뀌었다)아츠타 이치방점(熱田一番店) 주차장에 차량을 세워 피해자들을 남겨놓고 자신들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을 먹으면서 피해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했다. 주범인 코지마가 “얼굴이 들켰기때문에 남자는 살해하고 여자는 유흥업소에 팔아넘기자”고 주장하며 그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야쿠자 소속으로 조직의 차를 빌려탔다가 사건으로 인해 차가 파손당한 콘도는 변명을 하기 위해 궁리했다. 도중에 타카시는 귀가했고 남은 다섯명만이 남게되었다.
오전 9시 40분경 나고야 시내의 호텔 로페(현재도 영업중)로 쉬러간 그들은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 피해자들을 감금했는데 노무라와 스미요가 같은 방임에도 불구하고 토쿠마루는 남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스미오를 재차 강간하였다. 이 무렵 온 몸이 피투성이인 커플과 그들을 데려온 인상 더러운 일행들이 수상하다고 여긴 호텔 종업원은 그들이 타고온 차량의 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범인 검거는 이 종업원의 진술로 명확해질 수 있었지만 이 때 신고를 했더라면 살인은 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2.3. 살아날 수 있었던 기회
코지마와 콘도는 지인이던 야쿠자 형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팔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했지만 그 방법이 쉽지않다는 답변을 듣고난 후 고민하다가 정말로 커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위험부담을 생각하여 일단 풀어주기로 한다.이들은 “차 수리비는 안받을테지만 너희들 주소를 알고있으니 만약 경찰에 신고하기라도하면...알고있겠지?”라고 협박하였고 피해자들은 “알겠습니다!절대 안하겠습니다!이제 가도 되는 거지요?“라고 말하며 매우 지친 모습으로 이미 어둑해진 도로를 함께 걸어나갔다. 그들이 점점 멀어져갈 때쯤 여성인 류조지가 반론을 제기하며 정말 돌려보낼거냐고 물었고 여성들에게 밑보이기 싫었던 코지마가 다시 그들을 쫒아가서 데리고 왔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들 살인에 동의하였고 아이치현 나가쿠테정(長久手町)[4]에 있는 우즈카 공원 묘지(卯塚公園墓地)로 피해자를 데려갔다.[5]
먼저 차에서 내린 뒤 남자인 노무라를 교살하였는데 여성 두 명은 뒷좌석에서 스미요를 붙잡고, 남성 두 명은 차량 밖 도랑 앞에서 입에는 박스테이프, 목에는 밧줄을 감은 뒤 양쪽으로 밧줄을 매우 천천히 잡아당겨 고통스럽게 살해했다. 그들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목을 조르라고 얘기했고 노무라가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20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6] 그 후 시체를 자신들의 차량 뒤 트렁크에 싣고 스미요와 끌고 미에현(三重県) 우에노시(上野市)[a]로 도망갔다. 아침이 되자 사건이 발생한 오오타카 녹지공원에서 부서진 차가 발견되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2.4. 마지막 살인
사건 현장에 설치된 “이 장소에는 아베크를 노린 범죄가 발생하고있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지말아주세요“라고 적힌 아이치현 경찰의 표지판.[8]
오후 10시경 노무라를 살해한 가해자들은 살아있는 스미요를 자신들이 평소 시너를 하거나 불량하게 모여있던 어느 아파트 실내 안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도 폭행과 강간을 일삼은 그들은 스미요를 죽이기위해 후지산의 자살명소인 주카이숲으로 갈까하다가 지리감이 있던 미에현의 숲으로 향하였고 25일 오전 2시에 도착했다. 스미요의 눈을 타올로 감고 팔을 붙잡아 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시신을 묻을 곳을 찾아헤멘 그들은 도로에서 7m정도 떨어진 곳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스미요를 노무라와 동일하게 끈으로 목을 졸라 교살하였는데, 죽이기 직전 그 방법이 매우 잔인했다. 뒷좌석에서 울고있던 스미요에게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냐고 묻자 그녀는 “오빠(그녀는 연상인 노무라를 오빠(お兄ちゃん)이라 불렀다)가 이미 죽은 걸 알고있다, 마지막으로 오빠를 보게해달라”고 부탁하여 트렁크에 죽어있던 노무라의 얼굴을 보여주었고 쓰러져 오열하는 그녀에게 마지막 식사랍시고 주먹밥과 캔쥬스를 건냈다.
스미요는 “나와 오빠를 같이 묻어주세요. 천국에서 오빠랑 같이 먹겠습니다.”, “오빠의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울면서 다시 한번 부탁했다. 죽은 노무라의 시신이 묶여있었기때문에 오열하며 그 줄을 풀려고하는 스미요를 범인들은 밀쳤고 구덩이 안에 그녀를 앉힌 뒤 노무라와 같은 방법으로 목에 밧줄을 잡아당겨 교살했다. 도중에 끈이 끊어지는 등 패닉이 온 상황에서 스미요는 노무라보다 더 긴 30분이라는 시간동안 고통 속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미에현 아야마군(阿山郡) 오오야마다촌(大山田村) 인근 산에 구멍을 파서 피해자들을 서로 끌어안은 것처럼 만들어 넣은 후 시신을 유기했다. 25일 나고야로 돌아온 이들은 증거나 유품이 될 만한 소지품들을 전부 강에 버리고 도주 방법을 모의하였다. 범죄 차량이 발견되어 사건의 내용이 차차 알려졌고 자신들의 범행에 관한 뉴스를 지켜보며 도주 준비를 하던 와중 호텔 종업원의 진술을 들은 경찰이 신원을 특정해 이들이 모인 방에 급습하였고 이틀 뒤인 2월 27일 5명이 체포, 시신이 있는 곳을 자백하여 발견하였다.
3. 가해자들의 신상정보
- 코지마 시게오(小島茂夫, 1968년 생, 당시 19세). 주범격인 범인이다. 교도소에서 갱생하여 죄를 뉘우치고 피해자 여성의 가족과도 편지를 나누고있으며 교도소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유족들에게 송금하고 있다. 1989년 수감 이후 현재 35년째 무기징역으로 복역중.
- 토쿠마루 노부히사(徳丸信久, 1971년 생, 당시 17세). 또 다른 주범격이며 잔혹성은 코지마 시게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 유족에게 배상과 사과없이 현재 무기징역으로 복역중.
- 콘도 히로유키(近藤浩之, 1969년 생, 당시 18세). 주범격 이외에 큰 형량을 받지않은 인물.사건전에도 다수의 폭행과 공갈 사건을 일으켰다. 범인들의 뒷이야기를 취재하는 저명한 기자 나카오 코우지(中尾幸司)와 인터뷰하였는데 출소 후 2002년에 10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 아이들이 있으며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싶지 않는다고 한다.
- 류조지 리에(龍造寺リエ, 1971년 생, 당시 17세). 여성 멤버 중 한 명이며 미용사와 스낵바에서 일하고 있다가 손님으로 온 야쿠자의 구성원인 타카시 켄이치를 알게 되어 교제하였으나 체포될 당시엔 주범인 코지마 시게오와 사귀고 있었다.[9] 만기 출소한 후 결혼해서 성씨가 '유키마루 리에(雪丸リエ)'로 바뀌었다.
- 츠츠이 요시에(筒井良枝, 1969년 생, 당시 18세)
이들은 실제 대부분 야쿠자[10]와 엮여 있었으며[11][12] 남성 피해자인 노무라를 살해한 장소인 나가쿠테정[13]은 원래부터 그들이 소속된 조직에서 애용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4. 재판
1989년 6월 28일 나고야 지방재판소의 판결 공판에서 주범 코지마 시게오에게 사형을, 토쿠마루 노부히사에게 무기징역, 타카시 켄이치에게 징역 17년, 콘도 히로유키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하고 여자 멤버인 츠츠이 요시에, 류조지 리에에겐 5~10년의 부정기형을 내렸다.다른 멤버들은 항소하지 않았기때문에 형이 확정되었으나 코지마와 타카시는 판결에 불만을 품고 변호사를 해임시키는 등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않았고 이후 1997년 12월16일 항소에서 1심 사형 판결을 파기하고 주범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기에 사형을 피하고 말았다.
덧붙여서 일본 범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시기였다는 1988년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성년자에 의해 벌어진 이 두 사건이 이후의 일본 소년법 개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5. 이후
2022년 7월 22일 TBS에서 방송된 보도특집 ‘사형을 피한 자들’이라는 제목의 방송에서 12분 13초경 해당 사건의 주범이자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인 코지마 요시오가 출연하였다는 소문이 있다.해당 방송에는 ‘소년무기징역인 C’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지만 복역 시기, 내용에서 모든 일본의 네티즌들이 그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1] 참고로 90년대 한국에서는 카섹스를 하는 커플을 '아베크족'(アベック族)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잦았기 때문에 카섹스 유행은 사그러들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사어화되었다.[2] 80년대 시너를 흡입하던 불량아들을 ‘분수족(噴水族)’이라 불렀다.[3] 그래서 이 사건을 이곳에서 유래한 오오타카 녹지공원 아베크 살인 사건([ruby(大, ruby=おお)][ruby(高, ruby=たか)][ruby(緑, ruby=りょく)][ruby(地, ruby=ち)][ruby(公, ruby=こう)][ruby(園, ruby=えん)]アベック[ruby(殺, ruby=さつ)][ruby(人, ruby=じん)][ruby(事, ruby=じ)][ruby(件, ruby=けん)])이라고 칭하기도 한다.[4] 현 나가쿠테시(長久手市)[5] 살인에 쓴 밧줄은 이동중 심야에도 운영하던 슈퍼마켓에서 구매했다.[6] 이때 유일한 성인이었던 타카시 켄이치는 차가 고장나서 수리를 맡기러 갔기 때문에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노무라 아키요시에 대한 살인 혐의는 부인했다.[a] 현 이가시(伊賀市)[8] 사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아베크’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도 사어(死語)가 되어있지만 여전히 철거하지않았다.[9] 타카시 켄이치가 야쿠자 조직에서 코지마 시게오보다 서열이 낮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류조지 리에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10] 야마구치구미 계열 코도카이(弘道会) 분파인 소노다구미(薗田組)[11] 이후에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들도 야쿠자와 엮여 있었다.[12] 하지만 살인사건을 일으켜 체포되기 전까지의 저지른 범죄 횟수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가해자들이 더욱 많다.[13] 야쿠자 멤버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