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1:32:14

나이젤 윈터번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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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나이젤 윈터번
Nigel Winterburn
출생 1963년 12월 11일 ([age(1963-05-05)]세)
잉글랜드 워릭셔주 얼리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레프트백 / 은퇴)
소속 선수 버밍엄 시티 FC (1981~1982 / 유스)
옥스포드 유나이티드 (1982~1983 / 유스)
윔블던 FC (1983~1987)
아스날 FC (1987~2000)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0~2003)
국가대표 2경기 (잉글랜드 / 1989~1993)

1. 개요2. 선수 경력
2.1. 초창기2.2. 윔블던 시절2.3. 아스날 시절2.4. 웨스트햄 시절2.5.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후4. 평가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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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다.

2. 선수 경력

2.1. 초창기

윈터번은 1981년 18살의 나이에 버밍엄 시티 유스팀에 입단했다. 하지만 1군에서 뛰지 못했고 1982년에 옥스포드로 이적했지만 그곳에서도 1군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2.2. 윔블던 시절

1983년, 재능을 알아본 AFC 윔블던의 감독 데이브 바셋에 의해 윔블던으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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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블던은 1986년에 1부 리그로 승격했고 윈터번은 잉글랜드 U-21 대표팀에 차출되어 한 경기를 출장했다. 1986-87 시즌, 윈터번은 믿음직한 수비수로 각성했고 팀은 FA컵 4강까지 진출했지만 토트넘 핫스퍼에게 패했다. 윈터번은 이 시기 훌륭한 활약을 한 것을 인정받아 팬들로부터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날의 감독 조지 그레이엄이었다. 1987년 여름, 그레이엄은 윔블던에게 35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윈터번을 아스날로 데려왔다.

2.3. 아스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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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윈터번은 처음에는 라이트백으로 뛰었다. 당시 아스날은 라이트백 비브 앤더슨이 팀을 이탈한 후 그를 대신할 선수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엄은 윈터번의 포지션을 라이트백으로 변경해서 써먹기로 했다. 윈터번은 비록 왼발이 주발이었지만, 라이트백으로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고 첫 시즌에 아스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두번의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첫번째로, 윈터번은 FA컵 결승전에서 맨유의 공격수 브라이언 맥클레어에게 연장전 막판에 돌파당하여 골을 허용하는 바람에 FA컵 우승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두번째로, 그는 리그 컵 결승전에서도 큰 실수를 범했다. 아스날은 이 경기에서 루튼 타운을 2:1로 이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반전 막판에 팀동료 데이비드 로캐슬이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이에 그가 페널티킥을 차게 되었는데, 그만 상대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이로 인해 기세가 살아난 루튼 선수들은 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아스날은 3:2로 패하고 말았다.

그후 1988년 12월 아스날의 레프트백을 맡고 있던 케니 샌섬이 뉴캐슬로 이적하자, 윈터번은 본래 포지션인 레프트백으로 돌아갔다. 그와 라이트백 리 딕슨은 센터백 토니 아담스와 베테랑 데이비드 오넬리와 함께 강철의 포백 라인을 구축했다. 여기에 1989년 스티브 볼드가 합류하자, 아스날은 리그 최강의 수비진을 갖추게 되었다. 1988-89 시즌의 마지막 경기,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안필드에서의 리버풀과의 경기를 앞두고 이 다섯명 모두를 출전시켜 파이브백을 구축했다. 이날 아스날은 2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윈터번은 프리킥 찬스를 맞이하자 직접 공을 공중에 띄워 앨런 스미스에게 전달했고 스미스는 헤더를 날려 첫번째 득점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경기 종료 몇초 전을 남겨놓고 마이클 토마스가 결정적인 골을 넣음으로서 아스날이 2:0으로 승리했다. 이로서 아스날은 1971년 이래 18년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윈터번은 주로 수비면에서 재능을 발휘했지만 멋진 골을 넣은 적도 있었다. 1989년 2월, 윈터번은 친정팀인 윔블던과의 홈경기에서 25야드에 달하는 거리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던 오른발로 슛을 날려 골을 넣었다. 아스날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아스날은 1989-90 시즌엔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했지만 1990-91 시즌에는 단 1패만 기록하고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윈터번은 이번에도 탁월한 수비력을 보여줬는데, 특히 맨유와의 원정경기에서는 탁월한 수비력을 발휘하여 1: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맨유의 미드필더 데니스 어윈에게 위험한 태클을 작렬하는 바람에 난투극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이로 인해 FA로부터 2주 주급 정지 징계를 받았다.

2년 후인 1993년, 아스날은 윈터번 등 수비진의 활약에 힘입어 셰필드 웬즈데이를 리그컵과 FA컵 모두 2:1로 격파하고 2개의 트로피를 획득했다. 1994년, 아스날은 파르마를 상대로 1:0으로 격파하고 유로파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아스날 역사상 25년만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아스날은 이듬해에도 유로파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레알 사라고사에게 2:1로 패했다.



1996년 9월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에 부임했다. 그는 아스날의 체질 개선을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기존의 30대 이상의 수비진은 팀의 안정을 위해 잔류시켰고 윈터번은 팀에 남아서 계속 활약할 수 있었다. [1]이후 아스날은 1998년에 리그와 FA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이 시기 윈터번은 1997년 9월 첼시을 상대로 왼발로 중거리포를 날려 골을 기록했다. 아스날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첼시를 3:2로 격파했다.



1999-00 시즌, 아스날은 UEFA 3라운드에 진출하여 프랑스 리그의 축구 클럽인 FC 낭트와 맞붙었다. 윈터번은 이 경기에서 다시 한번 드라이브샷을 작렬하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아스날은 이러한 그의 활약에 힘입어 UEFA컵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갈라타사라이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윈터번은 브라질의 레프트백 시우비뉴에게 밀려 팀을 떠났다. 그는 아스날에서 13년간 활동하며 440경기 8골(5골은 PK)을 기록했다.

2.4. 웨스트햄 시절

윈터번은 2000년 6월 2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그는 웨스트햄에서 3년 동안 94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이후 2003년 2월 2일 리버풀을 상대로 출전한 직후,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2.5. 국가대표 경력

윈터번은 1989년 11월 15일 이탈리아를 상대로 출전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좀처럼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는데,당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바비 롭슨이 그를 3순위로 두고 벤치에 박아뒀기 때문이다. 롭슨은 스튜어트 피어스를 주전 선수로 기용했고 토니 도리고를 2순위로 두었다. 졸지에 3순위가 되어버린 윈터번은 두 사람 모두 부상당해야 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어스는 1990 월드컵 모두 무사히 소화했고 윈터번은 대회 내내 경기에 뛰지 못했다. 그후 윈터번은 1993년 6월 19일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 합류하여 독일과의 A매치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여전히 없었고 스튜어트 피어스가 계속 잉글랜드의 레프트백을 독차지했다. 결국 윈터번은 커리어 내내 국가대표로서 겨우 2경기만 출전했다.

3. 은퇴 후

윈터번은 2008년 7월 14일 당시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이었던 폴 인스의 부름을 받고 수비코치로 부임했다. 그러나 인스는 2008년 12월에 경질되었고 윈터번은 새로 부임한 샘 알라다이스에게 팀에서 쫓겨났다. 알라다이스는 "내가 직접 수비를 지도할 것이니 수비코치는 불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후 윈터번은 일반인으로 돌아갔고 가끔씩 아스날에 대해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것 외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4. 평가

아스날에서 1987년부터 2000년까지 13년 동안 활동하면서 아스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리그에서 그만큼 수비를 잘하는 레프트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수비수로서 최고였다. 상대의 측면 공격을 모조리 끊어버리고 뒷공간을 제때에 커버하여 상대의 빠른 역습을 끊어내는 데 능했다. 이렇듯 탁월한 실력을 갖췄지만 공격전개에는 능하지 못했기에 국가대표로는 단 2경기만 뛴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1986-87 시즌 AFC 윔블던 팬 선정 올해의 선수

6. 여담



[1] 후에 벵거가 회고하길 "원래는 디펜스라인에 변화를 줄 생각이었다. 다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한계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도 훌륭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 따윈 무시하게 됐다. 비록 팀이 부진할 때에도 수비수들만큼은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장 선수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바꿔놓았다" 라고 말했다. 현재 유망주를 적극 기용하며 스쿼드를 항상 젊게 유지하는 벵거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