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2px 0" | <tablebordercolor=#315288> | }}} | |
일제강점기 모습 | 화재 전 모습 | 현재 |
[clearfix]
1. 개요
洛山寺 七層石塔.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1466년에 조성을 시작하여 1467년에 완성한 7층 석탑. 낙산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499호이다.2. 내용
낙산사는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중 하나로 고대로부터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문무왕 11년인 67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로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나 여몽전쟁 초기 1231년에 몽골에 의해 절이 모조리 소실되었고 이때 수백여년을 이어오던 관음상과 수정염주, 복장 등의 보물들을 몽골병에게 약탈당해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이후 200여년이 넘게 쓸쓸한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세조가 1468년에 학열대사(學悅)를 중창주로 삼아 절을 대규모로 새로 중창하였다.
낙산사 7층 석탑은 높이 6.2m의 탑으로 조선 세조가 1467년에 왕실 발원으로 조성하였다. 하부 4.7m 부분은 돌로, 상부 1.5m 부분은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점차 사멸되어가던 고려의 불교 조형 미술 양식을 다시금 이으려는 노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고려 때 만들어진 탑들과 그 조성 기술을 연구하고 복원하려 노력한 흔적이 남겨져 있는 석탑이다.
2005년 일어난 낙산사 화재로 큰 손상을 입어 많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499호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