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릉대전 蘭陵大戰 Great Battle of Lanling | ||
시기 | 기원전 398년 | |
장소 | 월나라 난릉(蘭陵) (오늘날의 산둥성(山东省) 린이 시(临沂市) 창산 현(苍山县) 란링 진(兰陵镇)) | |
원인 | 초(楚)의 월(越)나라 귀족파와의 협력을 통한 월(越)나라 병탄 시도 | |
교전 세력 | 월越 귀족파 초楚 | 월越 국왕파 노魯 송宋 제齊 |
지휘관 | 초왕 웅의 | 월왕 예 노공 희현 송공 구유 제후 전화 |
병력 | 12만 2천여 명 | 22만여 명 |
피해 | 4만 2천 5백여명 사상 | 피해규모 불명 |
결과 | 초나라의 대패, 초도왕이 포로가 됨 | |
영향 | 초나라의 암흑기 도래. 노, 송, 제의 영토 확장. 월나라 왕권의 일시적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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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398년 월노송제 4국 연합군이 월나라 반란군의 지원을 받아 동진하려던 초도왕의 초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렸다. 작품 초반 시점에 남쪽에서 벌어져 플레이어 국가인 조선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후의 작중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동원 규모도 양군 합쳐 30만을 넘기는데, 이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병력 동원이다. 비록 작품 내의 전투 묘사는 짧았지만, 대전(大戰)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은 전쟁이었다 할 수 있다.2. 배경
2.1. 초나라의 사정
B.C. 402년, 초성왕이 즉위 6년만에 도적떼에게 살해당했다.[1] 뒤를 이은 것은 그 자식인 초도왕 웅의(熊疑)였다. 초도왕은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로, 선대의 혼란을 빠른 시간 내에 수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초성왕이 도적떼에게 살해당한 일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이미 실추된 상태였고, 초도왕은 이를 대외 원정에서 대대적인 성과를 내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서쪽의 파나라, 북쪽의 여러 중원 국가들, 동쪽의 월나라 중 초도왕이 주목한 것은 동쪽이었다. 월나라가 왕과 귀족 사이의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걸 파악한 초도왕은 월 귀족들을 지원, 월나라에서 내전을 일으킨 다음 혼란에 빠진 월나라를 병탄하고자 하였다.
B.C. 398년, 초도왕은 즉위 후 4년 간 전쟁 없이 국력을 축적, 그렇게 모은 전력으로 월나라의 귀족 반란군의 호응을 받아 월을 침공하게 된다.[2]
2.2. 월나라의 정세
B.C.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제후들과의 회맹에서 패자가 되면서 전성기를 누린 월나라였지만, 구천의 4대손인 월왕 예가 다스리던 이 무렵에는 점차 쇠락해 가고 있었다.[3]이런 상황에서 월왕 예는 대외적으로는 노나라, 송나라와의 연계를 통해 초나라, 제나라를 견제하여 안정을 확보하고, 대내적으로 귀족들을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의 기본적인 권위가 낮고, 중원 국가들 뿐 아니라 초나라나 수십년 전 멸망시킨 오나라에 비해서도 제도가 정비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이런 시도는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부르게 된다.
다만 아직까지는 구천의 유산이라 부를 만한 게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웃한 초나라가 전력으로 귀족들을 지원하러 나서면서 결국 귀족들의 반란이 터지는 지경에 이른다.
3. 전투의 전개
B.C.398년, 월왕 예의 왕권 강화 시도에 반발하던 귀족들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귀족들이 왕권 강화를 탐탁찮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반란은 월나라의 북방지역 일부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월왕 예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다.3.1. 초나라의 동진
예상보다 낮은 호응으로 궁지에 몰린 반란군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남아있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바로 초나라였다. 풍전등화의 처지에 몰린 반군은 초도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미 월왕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고 귀족들을 지원하는데 상당히 힘을 쏟고 있던 초도왕은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 직접 군을 이끌고 월 반군을 돕기 위해 출정한다. 반군과 합류한 시점에서 그 규모는 12만 2천여명, 실로 국운을 쏟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대규모의 군세였다.3.2. 노, 송, 제의 개입
초, 월 양국 모두 내부사정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일단 단독으로 붙게 되면 유리한 것은 초나라였다. 반군에 가담하지 않은 귀족들이라도 왕권 강화는 탐탁찮아 하는 만큼 내부적으로 힘겨루기가 필요한 월왕 예와는 달리, 초군은 초도왕의 카리스마로 뭉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월 반군 역시 일단 반란을 일으킨 이상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초도왕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혹은 예상했더라도 감수할 만 하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초군의 발목을 잡는다. 바로 초나라의 확장을 탐탁찮아하는 인접 국가들이었다. 노나라의 노공 희현, 송나라의 송공 구유, 제나라의 제후 전화 셋 모두 군을 일으켜 초를 꺾고 월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다.[4] 이렇게 해서 모인 월노송제 4국 연합군이 총 22만여 명, 실로 각국이 초나라의 동진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게 드러나는 숫자였다.
4국의 이런 대대적인 연합은 초도왕으로써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악재였다. 이 당시 노나라는 한편으로 송, 월과 연계하며 다른 한편으로 제태공이 몰아낸 제강공의 잔당과 연계, 제나라를 견제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월나라가 주변에 지원을 요청한다 해도 노, 송 정도만 호응할 테고, 그나마도 노나라는 더 강대한 제나라를 상대하는 중인 만큼 쉽사리 지원병을 보내기 어려울 거란 판단 하에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제나라가 초의 동진을 저지하는 걸 우선시해 노송월 연합과 일시적인 협력을 취하면서 일이 꼬인 셈이었다.
4. 결말
초나라의 대패. 초도왕, 사로잡히다.초도왕은 월 반군이 상대와 10만여 명의 병력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동요하는 것을 다독이고, 자측은 대부분이 초군이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반면 상대편은 4국의 혼성군이라 합을 맞추기 어렵다는 점을 찌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기의 부국강병책을 받아들인 노나라와, 무능한 제강공이 아니라 나라의 잠재력을 살릴 수 있는 제태공이 군주가 된 제나라를 지나치게 얕본 판단이었다. 결국 전투에서 초군은 일방적으로 4국 연합군에 밀리며 전군의 3할 이상을 손실하고, 총지휘를 하던 초도왕마저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4국의 국군(國君)들은 사로잡힌 초도왕을 보며 조롱하였다. 송(宋)의 국군 구유의 경우, "주(周) 천자로부터 공(公)의 작위를 공인받은 송과는 달리 초자(子)에 불과하면서도 초왕(王)을 칭하던 주제에 이리 사로잡히다니 심경이 어떠한가?"하고 비웃었으며, 제(齊)의 국군 전화는 "이것이 초왕인가. 일족의 원수[5]가 잡혔구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5. 전후처리
사로잡힌 초도왕의 경우, 연합군 제후들의 의논 끝에 송나라를 거쳐 최단 코스로 주(周) 천자에게 보내졌다. 이후 그는 북쪽의 벽지에 유폐되었으며 관련된 기록은 더는 전하지 않는다. 한편 국운을 다한 전쟁에서 대패하고 왕까지 사로잡힌 초나라는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 영토 대부분이 중앙의 통제에서 이탈해 수도인 영성(郢城)[6]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결국 새로 즉위한 초숙왕 웅장(熊臧)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서쪽의 옛 수도 이릉(夷陵)[7]으로 천도한다. 하지만 이릉으로 천도한 뒤에도 서쪽의 파나라가 약체화된 초나라를 노리고 동진하는 것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된다. 춘추시대의 패자들이 자주 했던 일 중 하나가 여러 제후들을 모아 초나라의 북상을 저지하고 주나라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는 일이었단 걸 생각하면, 실로 참담한 수준으로 전락한 셈.하지만 동시에 위기상황에서 흩어지면 죽는다는 인식이 생겨서 초나라의 요체인 굴, 경, 소 세 대가문과 왕가인 미성 웅씨의 결속력이 극도로 강화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초나라의 회복과 성장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8] 초는 이러한 결속을 통해 귀족들의 권한이 강하면서도 반란이나 분열상은 적고 내외부의 문제를 수뇌부가 합심해 대처하는 형태가 되는데, 국력 신장 혹은 집중의 수단으로 변법이 주목받은 화북 국가들과는 다른 초나라만의 특색을 형성하게 된다.[9]
연합군 제후들에게 남은 것은 전리품 분배였는데, 월나라는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빌렸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면서도 정작 전투에서는 기여도가 제일 낮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초를 막아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10] 송나라의 경우 거양[11]-하채[12] 일대를, 제나라의 경우 조상의 땅인 진(陳)[13]을 가져갔는데[14], 기여도가 가장 높았던 노나라의 경우 취할 영토가 마땅찮은 점이 문제였다.
결국 이 문제로 노와 월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노나라는 월나라에 '초 상대로 확장하는 걸 도울테니 도와준 댓가로 일단 영토를 떼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노가 요구한 영토와 월이 제시한 영토가 지나치게 차이나면서 협상이 결렬되고, 노나라가 군사행동을 통해 힘으로 댓가를 받아가려 시도하게 된 것이다.
양국의 입장차는 명확했는데, 월나라는 '항구가 있는 낭야를 비롯한 제와의 접경지대+유사시 배와 물자 지원'을 제시한 반면, 노나라는 사실상 산동 남부에서 월나라가 점유하던 영토 전역의 양도를 요구하였다. 월나라는 지나친 요구라며 이를 거부하였고, 중간에 낀 입장이 된 송나라[15]가 '지금의 월나라에 산동 남부를 계속 유지할 힘이 있느냐'며 노나라를 편드는 입장을 취한 것도 무시했다.
결국 노나라가 댓가를 힘으로 취하기로 결정하고 B.C.397년 2만 5천여 명의 군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전쟁으로 이어지는 듯 하였는데...
5.1. 노월전쟁(?)
사실 이는 모두 월왕 예의 장대한 책략이었다!노나라의 2만 5천 군대에 맞서기 위해 2만 1천의 병력을 모은 월왕 예는 정작 전투는 하지도 않고 타협한다. 제와의 국경지대부터 난릉 일대까지 산동 남부 전역을 양도하는 한편, 월나라의 책임으로 이번 군사행동에 비용이 소모된 만큼 가져간 영토의 댓가로 져야 할 '초나라 영토 공략 지원 의무'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노나라의 요구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월나라 군대는 노나라와의 싸움이 아닌, 반항적이지만 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귀족들을 제압하는데 사용된다(...)
처음부터 월왕의 목적은 어차피 영향력이 위태로운 산동 일대가 아닌 내부 정리에 있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군을 모으면 귀족들 역시 바로 경계에 들어갈 터였기 때문에 일부러 노나라와의 갈등을 유발, 의심을 피하며 군을 모았던 것이다. 노나라는 사실상 월나라의 내부 문제에 이용당한 셈이지만, 전쟁조차 각오하며 얻으려던 영토를 무손실로 획득하는 이득을 본 만큼 이를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월의 왕권은 일시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월나라는 다시 귀족 세력이 왕과 힘을 겨루는 형태로 회귀하게 된다.
[1] 실제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다.[2] 본래 역사대로라면 기원전 400년에 상구(桑丘, 다른 이름은 승구(乘丘))[16]에서 삼진(三晉)의 연합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치른다. 하지만 여기선 스타팅 판도 판정에서 본래 역사보다 강화된 나라에 노나라가 포함되면서 상구는 노나라령으로 남았고, 이에 따라 해당 전투는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3] 심지어 작품 시작 시점인 B.C.403년에는 실제 역사에서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스타팅 판정에서 역사상 이 시기의 수도였던 낭야[17]가 아닌, 숙적 오나라의 수도였던 고소[18]가 수도인 것으로 판정되었다. 장강 이북에서 장강 이남으로 천도할만큼 세력이 위축되었다는 의미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월나라는 세가 위축됨에 따라 낭야(장강 이북)->고소(장강 이남 절강 이북)->월주(절강 이남[19])로 천도하다 결국 멸망한다. 본래 고소로의 천도가 B.C.378년에 일어난 걸 고려하면 스타팅 연도인 B.C.403년에 고소로 천도했다고 쳐도 쇠락 속도가 최소 25년은 빨라진 셈이다.[4] 노, 송, 제는 모두 실제 역사에서 이 시기의 3국보다 강화된 상태였다. 우선 노목공은 오기가 위나라로 떠난 뒤에도 그의 부국강병책을 적극 도입해 산동 남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송도공은 최전선화된 상구(商丘)(현재의 허난 성(河南省) 상추 시(商丘市)로, 이전 각주에 언급된 노나라 상구(승구)와는 한국 독음만 같지 한자도 다른 별개의 지역)에서 팽성(彭城)(현재의 장쑤 성(江苏省) 쉬저우 시(徐州市), 초한지에서 항우가 도읍으로 정한 그 팽성)으로의 천도에 성공하였다. 제태공은 B.C.402년에 제강공으로부터 제의 국군(國君) 지위를 찬탈하고 주나라 천자에게 승인을 받았는데, 이는 역사에서보다 찬탈은 10년, 승인은 15년 가량 빠른 속도였다.[5] 해당 시점에서 제나라의 국성(國姓)은 규성 전씨(嬀姓 田氏)인데, 이 전씨는 일찍이 제나라에서 벼슬한 진(陳)나라 공족 진완의 자손, 그 중에서도 진완의 영지였던 전(田) 지역을 씨(氏)로 삼은 이들이다. 본가인 진(陳)은 B.C.479년 초나라에게 멸망하고 그 제후 일족은 전씨를 의지해 제나라로 망명하였다.[6] 현재의 후베이 성(湖北省) 징저우 시(荊州市), 삼국지의 형주 강릉 일대이다. 초나라의 경우 수도를 부르는 호칭이 '영(郢)'이었다고도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편의상 해당 지역만을 영성으로 호칭한다.[7] 현재의 후베이 성(湖北省) 이창 시(宜昌市), 삼국지에서 이릉대전이 벌어진 그 이릉이다.[8] 다만 이 결속력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웅장의 대가 아닌 동생 초선왕 웅량부를 거쳐 그 자식인 초위왕 웅상의 재위기 들어서였다.[9] 다른 강남 국가들(특히 참치들 사이에서 '월월한다'는 조롱 섞인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인 월나라)에 비하면 꽤나 고무적인 일.[10] 오죽하면 어장주가 직접 월나라는 이 전투로 기어이 구천의 유산을 죄다 탕진했다고 디스까지 했을 정도.[11] 현재의 안후이 성(安徽省) 푸양 시(阜阳市)[12] 현재의 안후이 성(安徽省) 화이난 시(淮南市) 펑타이 현(凤台县)[13] 현재의 허난 성(河南省) 저우커우 시(周口市) 화이양 현(淮阳县)[14] 제 입장에선 명분을 취한 셈이지만, 사실 제를 견제하던 나머지 3국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물이었다. 진(陳)은 제 입장에선 월경지였기 때문에, 제나라가 조상의 땅을 방치하느냐 월경지 관리에 여력 상당부분을 투입하느냐를 놓고 딜레마에 시달리기를 유도한 것.[15] 3국은 모두 제나라를 경계했기 때문에 제는 해당 논의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