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남학(南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 개요
남학(南學)은 1860년대 초 이후 연담 이운규(蓮潭 李雲圭)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이다. 이운규가 충청남도 연산에서 몇몇 제자를 데리고 새로운 도법을 강학한 것이 창교적 발단이 되었다. 창교 시기와 교리는 동학과 비슷한 듯 다르다 하여 남학이라 불렸다. 남학의 이상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세계後天世界[뜻1]의 지상낙원地上樂園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후천개벽後天開闢[뜻2]의 역리易理[뜻3]를 인식하고 오음주五音呪 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운규 사후 제자들에 의해 무극대도, 대종교[1], 영가무도교, 오방불교, 광화교 등의 분파가 생겨났다. 일제강점기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2. 상세
연담 이운규는 벼슬을 하다가 국운이 쇠약해짐을 느끼고 한양을 떠나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양천면 모촌리의 띠울마을에 은거했다. 이운규는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坎[뜻4]에 밝았다. 그래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와 광화 김치인(光華 金致寅), 일부 김항(一夫 金恒)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그러던 중 1861년철종 12년에 최제우 · 김치인 · 김항을 차례로 불러,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라는 3 · 7자 주문을 독송하며 심신을 연마하라고 하였으며, 김치인에게는 불교佛敎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南門 열고 바라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2] 밝아온다." 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하라고 하였다.
김항에게는 유교儒敎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 라는 시를 남겨주고 표연히 띠울마을을 떠나 전라도 무주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본고향인 천안 목천(木川)으로 갔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뒤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치인은 남학을 창시하였으며,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正易』의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학과 남학, 그리고 『정역』 모두 그의 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나 이 주장은 대개 김항의 계통에서 제시하고 있다. 세 제자 중 김항만이 그와 사돈관계를 맺은 것을 보아도 양자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2.1. 연원 및 변천
이운규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의한 새로운 종교를 창도하려는 데 뜻을 두고 서울을 떠나 충청남도 연산으로 이거移居하였다.여기에서 몇몇 제자를 데리고 자신이 뜻하는 새로운 도법에 의한 강학을 한 것이 그의 창교적 발단이 되었다. 그의 문인들 가운데 도전道傳을 받은 사람은 사돈인 김항(金恒), 아들인 이용래(李龍來) · 이용신(李龍信), 제자 김치인(金致寅)이다.
이 때 이운규가 제시한 선후천 교역운도에 따르는 지상선계地上仙界가 개벽된다는 설은 당시 부패된 정치 · 경제 · 교육의 불안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오음주를 주송함으로써 심기가 쾌락해지고 질병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히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항은 스승 이운규의 역학에 관한 해석을 좀더 깊이 연구한 결과 자가의 독창적인 저서인 『정역』을 찬술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항은 『정역』을 교의의 주축으로 하여 고향인 연산을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치인은 이운규의 두 아들과 함께 용담 대불리에서 이운규를 1세 교주, 이운규의 장남 이용래를 2세 교주, 차남 이용신을 3세 교주, 김치인 자신을 4세 교주로 하는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김항은 유교적 입장으로 포교하면서 자가의 교단을 '무극대도'라고 하였으며, 김치인은 불교적 입장으로 포교하면서 자가의 교단을 ‘오방불교’라고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김항과 김치인과 더불어 동학의 최제우도 이운규 밑에서 교훈을 받은 바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루는 이운규가 최제우, 김항, 김치인 세 사람을 불러 놓고 최제우과 김치인에게는 각각 선교와 불교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주문을 외우고 깊이 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김항에게는 쇠하여 가는 공부자[뜻5]의 도를 이어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을 것이니 『서전(書傳)』을 많이 읽으라면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구절이 담긴 글귀를 내주고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 후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홀연히 깨쳐 허공에서 이른바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보고 『정역』을 지었다고 한다.
김항은 스승인 이운규에게서 받은 도법道法이 중국의 고대 유교에 입각하여 새로운 역리를 연구하고 영가무도는 유교의 전통적인 신행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문에 들어오는 교도들은 대부분이 양반계층의 유학자였다.
김항의 교문敎門에서 십대 제자로 손꼽히는 김홍현(金洪鉉) · 김영곤(金永坤) · 김정현(金正鉉) · 김정현(金貞鉉) · 김황현(金黃鉉) · 김방현(金邦鉉) 등 족척교인(族戚敎人)과 권종하(權鍾夏) · 이희룡(李熙龍) · 하상역(河相易) 등은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이름있는 유학자들이었다.
1898년 김항이 71세로 죽자 하상역이 교통을 받은 2세 교주가 되면서 대종교(大宗敎)라는 교명을 내걸고 포교할 때 교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신행상信行上에서도 특이한 신행을 주장하는 예가 있어 이에 대한 시비논쟁이 분분하였다.
김항의 남학에 대한 신앙태도는 후천개벽 정역이론과 오음수련이 천도天道의 예정된 후천개벽을 맞는 정도正道를 깨달아 심기心氣를 수련하는 공자의 유행儒行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상역은 『정역』은 김항이 상제의 뜻과 권능에 가름하여 후천개벽 운도를 밝히고 열어 놓은 것이라 하여 김항을 상제로서 신격화하고 본 교의 신앙대상으로 추앙하였다. 그는 김영곤과 함께 윷판의 29점이 배열된 것이 곧 『정역』의 기본 원리라는 주장까지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홍현과 김정현 등은 김항의 도법은 순수한 유교의 측면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정도인 것을 하상역 등이 신비를 주장하는 사도邪道[뜻6]로 타락시킨다 하여 논박함으로써 교리에 대한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상역 · 김영곤 등의 신비적 교리에 반대하는 김홍현 · 김정현 · 권종하 등 소위 족척계 제자들은 김항의 교학체계를 공맹의 유학을 새로운 면에서 진작하는 것으로 보고, 남학에서 『정역』을 공부하는 것은 『주역』의 원리에서 후천시대의 새로운 역리가 전개되는 원리를 살펴서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오음에 대한 주송은 공자가 주장한 육예六藝[3]의 내용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면서 무도舞蹈를 하는 실사를 행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유행을 진작하면서 부패된 유교윤리를 부흥시켜 인의 도덕이 원만하게 발휘되는 후천의 지상낙원을 개벽하는 주역主役이 되자는 것이 남학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천에 역점을 두는 교인들로 뭉친 일단의 교파가 분립하게 되었다. 이 교파는 김항의 척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산지방의 김씨종문으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단순한 학회가 아니라 신앙성이 들어 있고 정기적으로 향례까지 지내는 종교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로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64년이었다.
이 때 정역학회가 발족되어 초대 회장에 충남대 교수 성주탁(成周鐸)이 선임되어 『정역』 원본을 발간하는 등 정역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1976년에는 '일부선생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회장은 김기충(金基沖) 등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 전 충남대 총장 이정호(李正浩), 성균관전의 백문섭(白汶燮) 등이 참여하여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에 있는 김항의 모역을 가다듬고 묘비(1978년)와 성덕비(1980년)를 건립하였다.
그 후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1994년에 '정역사상연구회'가 설립되어 초대 회장에 김용식(金容植)이 취임하였고, 『정역소식』이라는 정기간행물과 각종 연구서들을 발행하고 있다.
1995년에는 묘역 전방에 회관을 신축하였고, 1996년에는 이 묘역 일대를 '논산시문화유적지'로 지정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항이 사망한 지 100주기가 되는 1998년 행사를 위해 1997년 1월에 '일부김항선생기념사업회'가 새로 출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영곤은 영가무도의 신비력에 의해 도통이 되고 일부상제의 천도 명령에 의한 후천 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다는 교설로써 단체를 만들어 계룡산 등지에서 포교하였다. 그가 죽자 임도봉(林道峯)이 계승했다.
이 교파는 중앙대종교中央大宗敎라는 교명으로 이필례(李必禮)에 의해 전라북도 만경에서 널리 퍼져 교주 이필례 여인의 신통한 치병능력으로 한때 1,000여 명의 신도가 모인 적도 있었다.
이필례는 교명을 천일교天一敎로 바꾸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쌀 30가마로 밥을 하고 소 2마리, 돼지 2마리를 잡아 제상을 차리는 등 무속에 가까운 종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90년 이필례가 사망하자 교주를 정점으로 행해지던 종교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현재는 과거의 신자들과 자손들이 교주의 묘를 참배하는 정도이다.
김항이 죽은 뒤 신도 이희룡이 영가무도 수행을 주로 하는 교단을 만들었다. 이희룡이 죽자, 그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에 수도 장소를 설치하고 『정역』을 연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설치된 제단에는 일부상제 · 화무상제 · 황극모黃極母 · 천황天皇 · 지황地皇 · 인황人皇 · 미륵불 등을 모시고 이를 신앙대상으로 하여 기축祈祝을 행한다. 여기서의 화무상제와 미륵불은 김항의 화현이라고 본다.
이곳 국사봉은 김항이 마지막 포교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적지가 되어, 여기에서 『정역』을 공부하고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와 더불어 기타 주축기도 수련을 행하는 일부계 교인들이 현재까지 모이고 있다.
김항의 제자 이상룡(李象龍)이 자기 나름의 교리 · 신행을 주장하면서 포교한 교단이 형성되어 청양 · 공주 · 이천 등지에 그 여세가 남아 있고, 이 밖에도 일부계의 교파에서 동학과 증산교甑山敎와 야합된 몇 개의 교파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모두 형세가 미약하여 유야무야한 상태이며, 송철화에 의해 시작된 영가무도교는 1976년 송철화가 사망한 이후 교세가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약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국사봉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서울 등지에서 『정역』을 공부하거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김항의 최후 유적지인 이곳 국사봉을 참배차 방문하기도 한다.
한편, 김치인은 전라북도의 운주와 진안의 운장산 밑, 용담 일대에서 포교할 때 전라북도의 신도들을 주로 하여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운규의 아들 이용래 · 이용신 형제를 스승으로 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운장산 밑 대불리(大佛里)에 본부를 두고 포교하였다.
이 오방불교에서는 후천 지상극락의 개벽이 곧 미륵불 출세에 의한 용화세계龍華世界의 개벽이라고 하나, 그 교리나 신행 면에서는 『정역』의 운도교역을 믿고 오음주송 수련을 행하면서 도의道義를 닦는 것이 유교적 경향이 강하며 신도들도 대부분 유자들이기 때문에 처사교處士敎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김치인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이라는 역리적 운도변역易理的運度變易을 이교의 종지로 삼았지만 이 운도개벽은 김항과 같이 유교적인 처지에서 선천역先天易인 『주역』의 운도가 바뀌는 『정역』의 원리를 제시하기보다는 불교적인 당래불當來佛 미륵불의 출세로 인한 용화세계의 개벽운도로 보고 이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용화세계는 지상선계라고 하여 자신이 포교하는 오방불교의 교법은 곧 유 · 불 · 선이 합일된 무극대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인의 도덕과 불교의 자비 선행과 도교의 주축 수련을 병행할 것을 주장하면서, 오음주 등 몇 가지 주축에 의한 기도수련을 병행하였다.
이 때 주축 수련에서 일어나는 영가무도의 신비와 치병 · 도통道通, 그리고 후천 용화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일부계 교단보다도 형세가 큰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 때 교명을 오방불교라고 하는 한편, 자가의 교단을 동학에 대응되는 남학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가년 갑오년 동학군의 거의운동擧義運動이 일어나는 것을 본 이 교에서는 자가의 교단에서도 동학과 마찬가지로 후천개벽이 목적이며, 척양척왜斥洋斥倭 · 보국안민 ·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주장함은 민족종교의 당면한 임무라고 하여 이에 남학에서도 동학과 같은 거의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남학 운동을 결행하였다.
이 때 교단 본부인 대불리와 주천에 본영을 두고 5만여 명에 달하는 남학군이 조직되었으나, 출동 직전에 관군의 습격으로 간부들과 많은 교인들이 붙잡혀 김치인을 비롯한 8명의 간부들이 전주와 나주에서 사형을 당하고, 남학운동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치인이 죽자 그 제자들 사이에 교통전수를 둘러싼 분규가 생겼는데, 수제자 김용배(金庸培)가 정통을 이어 금강불교金剛佛敎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고, 김항배(金恒培) · 권순채(權珣采)는 광화교 또는 광화불교라는 교명으로 운주면 가천리와 계룡산 신도안에서 포교하였다.
뒤에 금강불교의 교명이 칠성불교로 바뀌어 대불리와 진안 부귀 등 운장산 주위를 근거로 하고 용담 · 진산 · 금산 · 장수 등지에 포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경찰의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이 교단은 물론이고 일부계의 교인들까지도 다수가 붙잡히는 바람에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2.2. 설립목적
남학에서는 현대를 선천시대先天時代에서 후천시대後天時代로 바뀌는 교역기交易期라고 규정하고, 후천시대의 운도運度를 천명한 『정역(正易)』을 제시하여, 후천시대는 극락무궁極樂無窮한 지상선경地上仙境이 이룩된다.그렇지만, 이 교역기에는 말세적인 재겁災劫이 있기 때문에 이 재겁을 없애고 후천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 개조의 도법으로서 오음주五音呪를 외는 주송수련呪頌修鍊을 해야 한다는 오음정의五音正義를 주장하였다.
교리로는 유 · 불 · 선 삼교가 융섭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운규의 제자 김항과 김치인등에 의해 교단이 성립될 때, 김항은 유교적인 방향에서 충청남도 연산과 계룡산 일대를 포교하고, 김치인은 불교적인 방향에서 전라북도 운주(雲州)와 진안 운장산(雲長山) 일대에 포교하게 되었다.
이운규가 자신을 찾아와 수학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어떠한 교명(敎名)을 제시한 바도 없고, 교단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제자들에 의하여 교단이 분립 형성될 때, 무극대도(無極大道) · 대종교(大宗敎) ·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 · 오방불교(五方佛敎) · 광화교(光華敎) 등의 교명이 붙여졌다.
전술했듯이 남학이 동학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고 교리가 거의 같으면서도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 동학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남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학의 일부 교단에서는 동학의 동학농민운동가 있을 때 이에 준하는 남학 운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일까지 있다.
이운규는 이서구(李書九)의 문인으로 1804년순조 4년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그는 유교경전은 물론이고 도가서(道家書)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탐독하고 의복(醫卜) · 술수(術數)까지 연구하였다.
특히 천지의 운도와 인세人世의 역사적 쇠왕衰旺과 교운敎運을 살피기 위한 역학연구에 몰두하다가 마침내 선후천 운도가 바뀌는 교역交易의 이理를 깨닫고 이에 따라 선천 역리를 밝힌 『주역』의 원리가 후천 역리로 바뀐 『정역』의 이치를 구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운규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국가의 운명, 국민의 생활, 윤리적 교육, 민족의 종교가 바로 서지 못하고 극도로 쇠퇴하는 운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2.3. 교리
남학의 이상은 후천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의 주송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정역』은 이운규의 후천개벽의 역리를 김항이 천명한 이 교단의 경전으로서 후천역後天易이라고 부른다.선천 운수는 해歲의 운회運回[뜻7]가 365일에 4분의 1이라는 윤閏이 있었지만, 『정역』의 운수는 360일 정각이 되니 윤달이 없는 운회라 한다. 그러므로 후천에는 사계四季 · 주야晝夜 · 한서寒暑의 차이가 없게 되고 인간사회에도 빈부 · 귀천 · 수요의 구별이 없게 된다.
이 때에는 사람의 형상도 달라져서 1만 8,000세까지 장수할 수 있고, 사람은 신명神明과 동화되어 조화를 임의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상에는 죄고罪苦[뜻8]가 없는 지상천국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후천이 교역하는 시기가 되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게 되며, 인간 행위의 선악에 심판이 따르게 되는데, 이 때를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닦아야 될 올바른 도道가 곧 남학이 열어 준 무극대도이다.
오음주는 음吟 · 아哦 · 어唹 · 이咿 · 우吁의 오음을 말한다. 이 오음은 궁宮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의 오성五聲과 수水 · 화火 · 목木 · 금金 · 토土의 오행五行 및 비脾 · 폐肺 · 간肝 · 심心 · 신腎의 오장五臟과 조화를 일으키는 음률로, 이를 주송하면 자연히 오기五氣 · 오장이 수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음주송은 이에 음률의 고저 · 장단 · 청탁이 있어 서로 조화적으로 자연의 이치에 응하기 때문에 이 영가를 부르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무도를 하게 된다.
이 영가무도가 극치에 달하면 앉은 채로 몸이 3, 4척이 뛰어오르고 여러 가지 방언方言, 이보耳報[뜻9], 토설吐說[뜻10]이라고 불리는 신비현상을 불러 일으키며, 질병이 치유된다고 믿는다.
이것을 오음주송에 의하여 자연의 조화에 부응하는 경지라고 한다. 이 계통의 신자들은 영가무도로 병을 고치고 상제 · 신명을 맞이하여 재앙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신화도통神化道通하여 화무상제[8]의 뜻에 따라 개벽되는 후천 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특히 일부계 남학의 교법이며 신행의 전부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 교단을 한때 영가무도교라고 불렀다. 이 영가무도에는 정精 · 기氣 · 신神의 조화작용이 있다고 믿는다.
정의 조화에 의해 만리萬理를 관통하는 것은 유교의 진리라 하고, 신의 조화에 의해 돈오頓悟하는 것은 불교의 진리라고 하며, 기의 조화에 의해 수련되는 것은 선교의 진리라고 한다.
정 · 기 · 신의 조화는 모든 심법心法에 의한 것이므로 남학은 유교의 존심양성存心養性과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선교의 수심연성修心鍊性이 아울러 이룩되는 유 · 불 · 선 삼교 합일의 도라고 한다.
2.3.1. 정역
↑정역과 정역팔괘도
정역은 조선후기 김항이 『주역』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주창한 역학사상이다. 김항은 스승 이운규의 지도를 받고 정진하던 중에 겪은 신비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역을 완성했다. 예로부터 주역과 함께 연산역·귀장역 등 3역이 있었는데, 정역은 연산역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역은 선천에만 적용되고 미래는 후천의 원리를 나타내는 정역의 괘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천개벽사상을 역리적으로 체계화했다. 또 인간의 본성인 신명개발을 강조하는 신명개벽사상으로 우주사적 원리를 천명한 특징이 있다. 한민족 중심의 종교사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항이 36세 때인 1861년철종 12년 이운규는 김항에게 쇠하여 가는 공자(孔子)의 도를 이어 천시를 크게 받들 자라고 하며 예서(禮書)만 볼 것이 아니라 『서전書傳』을 많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뒤에 반드시 책을 지을 것이니 그 때 “나의 이 글 한 수를 넣으라.”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관염(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글이라 한다.
여기서 특히 '영동천심월'이라고 표현한 일월변화사상의 학적 명제가 바로 후일 동학과 『정역』의 공통사상인 선후천개벽사상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그 뒤 김항은 54세 되던 1879년에 '영동천심월'의 오묘한 의미를 파악하여 그것을 입도시(立道詩)에 표현해 놓고 있다.
그 뒤 계속 정진하던 중 눈에 생소한 괘획卦劃이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이러한 괘가 『주역』에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계시적인 체험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팔괘도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문왕팔괘도文王八卦圖와는 다른 정역팔괘도이다.
이어서 그에게 공자의 영상이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런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였다는 경험을 한 뒤 『대역서大易序』를 1881년 6월 20일에 저술하였다.
그리고 1884년에 『정역』의 상편인 <십오일언十五一言>에서 <무위시无位詩>까지 저술하고 뒤이어 1885년에 <정역시正易詩>와 <포도시布圖詩>를 비롯하여 하편인<십일일언十一一言>에서 <십일음十一吟>까지 저술함으로써 2년간에 걸쳐 『정역』을 완성하였다.
역易이란 만물을 끊임없는 변화로서 파악하는 것이며 역학은 이 변화의 원리를 논하는 것이다. 역위설易緯說에 따르면 역이라는 명칭 속에는 간이지덕簡易之德 · 변역지리變易之理 · 불역지리不易之理의 삼의三義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이렇게 세 가지로 정의하는 것은 『역경易經』 십익전十翼傳에 고전적 근거를 둔 것으로서 역위설 이래로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통설로 되어왔다. 그런데 간이지덕과 불역지리는 역리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불과하고 오직 변역지리만이 역리의 본질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계사繫辭에서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 하였고 정이程伊가 "역은 변역인데 도道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고 바뀐다."라 한 것은 역도易道의 본령적 의의가 변역지리에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 이미 간이와 불역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은 예로부터 연산連山 · 귀장歸藏 · 주역周易의 3역이 있었는데 연산역과 귀장역은 없어지고 ≪주역≫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연산역은 간艮을 머리로 하고 귀장역은 곤坤을, 주역은 건乾을 머리로 한다고 하였는데, 간을 머리로 한 『정역』이 연산에서 나왔다고 하여 삼역의 관계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주역』은 연산에서 귀장되었다가 김항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역一夫易이 연산역처럼 간을 머리로 하고 한국의 연산에서 나온 것이 신기한 일이므로 그렇게 미루어보는 것일 뿐 사실은 알 수 없다.
↑위에서부터 하도河圖 · 낙서洛書
우리가 보고 있는 복희괘와 문왕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성인聖人이 만든 것이라고 『주역』 계사에 나와 있다. 하도는 제1역으로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하수河水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문채를 받아 팔괘를 그은 것이며 역학발생의 시초이다.
낙서는 우禹가 치수할 때 신묘한 거북이 나타나 9를 이르는 수를 등에 드러내 보임에 따라 수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제2역이다.
일부역은 연산의 김항에 의하여 세상에 나타난 것이며 제3역이다. 제1역과 제2역이 선천역(先天易), 즉 과거와 현재를 나타내는 역인 데 비하여, 일부역은 미래역인 후천역이 된다.
복희역은 천지자연의 소박한 역이요 무문자시대의 역으로서 생역生易인 데 비해 문왕역은 인간변화의 복잡다단한 역이요, 문자시대의 역으로서 장역長易이며, 일부역은 자연과 인문의 조화된 역이요 세계인류의 신화神化의 역으로 성역成易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도의 복희역이 우주창조의 설계도이고 그 설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풀려나온 것이 낙서라고 보는 것이다.
하도가 본래 1 · 6, 2 · 7, 3 · 8, 4 · 9, 5 · 10과 같이 선천적으로 완전무결한 수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계요 계획이며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탄생과정의 하도에 의해서 성장과정의 낙서가 이루어지며 그 뒤 설계의 완전실현이 이루어지는 완성의 단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정역』은 최후의 역이며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주역』의 구조가 건곤乾坤에서 감리坎離까지를 상경上經으로, 함咸 · 항恒에서 기제旣濟 · 미제未濟까지를 하경下)으로 하고 있듯이, 『정역』은 상편 <십오일언>과 하편 <십일일언>으로 되어 있다.
십오일언이란 '열과 다섯이 하나로 합하는 말'이다. 열이란 하도의 오황극五皇極을 둘러싸고 있는 십무극十無極을 말하고, 다섯은 오황극을 말하며, 하나는 오황극의 중심을 말한다.
여기서 10 · 5로 합한다는 것은 10과 5가 그 극중인 1에서 완전히 융합함을 말하며 이것을 십오일언이라 한다. 또, 이것이 우주조화의 반고화^^盤固化^&를 논하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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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이태극을 설명하는 태극도설
십일일언이란 '열과 하나가 하나로 되는 말'이다. 열은 무극을 말하고 하나는 태극을 말한다. 이 무극과 태극이 하나로 합치는 것을 십일일언이라 한다. 십오일언은 『주역』의 건곤에 해당하고 십일일언은 그 함 · 항에 해당한다.
『주역』의 건곤이 천도이고 함 · 항이 인사人事이듯이, 『정역』의 십오일언은 건곤정위乾坤正位의 뜻이 있으며 뇌풍정위雷風正位의 체體를 이루고, 십일일언은 간태합덕艮兌合德의 뜻이 있으며 산택통기山澤通氣의 용用을 나타낸다.
뇌풍정위의 체는 자연의 초자연적 변화로 인한 윤력閏曆의 탈락과 정력正曆의 성립을 의미하고, 산택통기의 용은 인간의 초인간적 변화로 인한 인간완성의 길을 의미한다.
『정역』은 <십오일언>에서 <금화정역도>까지는 주로 일월성도日月成道에 의한 정력의 사용, 변화 후의 새 질서, 우주의 새 방위, 기후의 새 조화를 나타내는 <정역시>와 <포도시>로 끝을 맺고 있다.
<십일일언>에서 <십일음>까지는 주로 인간완성에 의한 황극인의 등장, 그리고 그에 의하여 새로이 수립되는 신질서와 고도로 발달한 무량복지사회인 유리세계琉璃世界를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상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는 『정역』의 사상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선천 · 후천 사상과 자연변화를 이루는 일월개벽사상, 그리고 인간변화와 문화세계를 이루는 신명개벽사상이 그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선천 · 후천을 말할 때 과거의 것을 선천이라 하고 현재의 것을 후천이라 한다. 이것을 인간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출생 이전은 선천이요, 출생 이후는 후천이라 하는 것과 같다.
역학에서도 과거를 나타내는 복희괘와 하도는 선천세계를 말하는 것이라 하고, 현재를 나타내는 문왕괘와 낙서는 후천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역』에서는 선천 · 후천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현재를 선천이라 하고 미래를 후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도 · 낙서의 원리인 『주역』의 괘는 선천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미래에는 후천의 원리를 나타내는 정역의 괘도를 사용해야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정역』의 후천개벽사상은 미래의 이상세계 건설의 꿈이요, 미래세계에 펼쳐질 자연변화의 원리를 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정역』은 현행의 윤력도수閏曆度數에서 미래의 정력도수正曆度數로 넘어가는 장래의 일월역수변화, 즉 윤변위정閏變爲正의 후천개벽기를 기점으로 우주사의 시간적 선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역』의 근본사상은 역수원리를 바탕으로 후천개벽사상을 말하는 천도적 윤변위정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셋째, 앞에서 언급한 것이 후천개벽의 객관적 세계인 천지일월의 개벽사상이라면, 신명개벽사상은 이러한 이치를 주체적으로 자각한 인간에 관한 내용이다.
『대역서』에서 '무역무성 무성무역無易無聖 無聖無易'이라 하였듯이, 일월변화와 인간성덕人間聖德을 일체로 보는 정역사상은 외적인 일월개벽사상과 아울러 내적인 인간본래성의 신명개발을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천지가 말을 하므로 일부一夫가 말을 하는 것이며 일부의 말이 곧 천지의 말이다."라고 한다든지, "금 · 화문金火門은 천 · 지 · 인 삼재三才의 출입문이다."라고 『정역』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천지는 천도를 자각한 인간, 즉 성인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정역』은 하도의 실현이요, 그 구체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도는 음양의 완전조화체이므로 『정역』도 역시 음양의 완전조화를 나타낸다.
완전한 음양의 조화세계란 남녀가 평등하고 인권이 존중되고 무량한 복지사회가 됨을 의미한다. 또한, 사상적으로도 진리의 근원이 밝혀져 사상적 갈등이 극복되고, 교파초월과 상호이해 · 상호존중 · 상호협력으로 종교의 일치가 도모되는 세계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정역』을 한국과 관련시켜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즉, 역리상에서 본 한국과 한국의 주체적 사상으로서의 『정역』이 언급될 수 있다.
우선 역리로 한국을 살펴보면, 『주역』 설괘전說卦傳에서 간艮은 겨울과 봄이 동과 북 사이에서 교체되는 괘다. 만물이 종말기가 되면서 곧 발생기가 되는 때이므로 결실은 간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간은 소남少男인데, 한국은 지리상의 위치로 볼 때 동북방으로서 간방이므로 한국은 간소남艮少男이라 할 수 있다.
간은 진장남震長男에서 출발한 역이 간소남에 이르러 그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새 질서와 새 생명이 시작되는 터전이 마련된다. 이것은 바로 종말이 곧 새로운 간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정역의 세계와 상응하고 있다.
즉, 팔간八艮으로 시작하여 칠지七地로 끝을 맺는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이 우주와 만물의 완성을 나타내는 『정역』의 내용이다.
우리 나라는 역리상에서 보듯이 만물을 종시終始하는 간역艮域으로써 만물이 시종하는 간역艮易, 즉 정역이 나왔으니 우주론적 · 인류사적 의의와 거기에서 창조될 새로운 세계건설, 즉 유리세계건설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정역』은 암시하고 있다.
두번째로 정역사상은 19세기 후반의 동학사상과 함께 한민족의 주체사상을 이룬다. 20세기에 발생한 한국의 신종교들의 교리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 바로 김항과 최제우에 의하여 천명된 후천개벽사상이다.
그러므로 『정역』의 사상사적 연원은 중국의 선진성학先秦聖學, 즉 십익十翼을 포함한 『주역』에 두었으나, 그 논리적 연원은 도리어 정역원리에서 주역사상이 연원하였다고 봄으로써 『정역』은 한국사상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정역』의 근본사상이 재래의 유학과는 달리 미래를 예견하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선천 · 후천의 개념을 새로 규정하고 후천개벽사상을 역리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로써 천도의 일월개벽사상으로는 윤변위정의 원리를 주장하였고, 인도(人道)의 신명개벽사상으로는 도덕적 교화의 윤리를 내세워 공자도 감히 말하지 않았던 우주사적 원리를 천명하였다.
이와 같이, 한말의 상황 속에서 형성된 정역사상은 『주역』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한민족 중심적인 종교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2.4. 남학 운동
남학 운동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후천개벽의 시운이 도래했다고 여긴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남학교도 수천 명이 모여 전개한 사회 운동이다.남학 운동은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19세기에 유 · 불 · 선 삼교를 통합하여 후천개벽의 시운을 열고 민생의 어려움을 위무하면서 궁극적으로 국가의 태평성대를 도모하였던 일부 사상가들이 주도한 종교·사회 운동이었다. 진안 지역에서는 1894년 김치인을 중심으로 남학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남학의 창시자인 이운규가 진안 지역에 거처하면서 이용래와 김치인을 중심으로 남학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운규와 그의 아들 이용래 · 이용신이 진안 지역에서 생활하던 1860년대 말에 10대 후반의 청년이었던 김치인은 그들의 사상을 접한 후 수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윤리를 토대로 어려운 민생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태평성대를 열고자 하였다. 1893년까지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치인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수천 명에 달하는 남학군을 조직하여 사회 운동을 통해 창생을 구제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관군의 습격을 받고 김치인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되어 1895년 4월 27일 전주의 서문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남학 운동은 종결되었다.
남학 운동은 거사 전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김치인의 종교 사상은 이후 김원배의 광화교 및 김용배의 금강 불교 등으로 계승되었다.
남학 운동은 19세기 말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 진안 지역 민중의 자발적인 사회 운동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남학 운동을 통해 민중들이 혼란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고 삶을 영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제주도에서도 남학의 간부 방성칠이 일으킨 방성칠의 난도 있었다.방성칠의 난은 '제1차 제주민란'이라고도 하며,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의 가혹한 징세가 주요 원인이었다. 화전세火田稅와 목장세牧場稅, 호포戶布, 환자還上의 지나친 징수를 시정해 달라며 1898년 2월 22일 장두(狀頭) 방성칠과 광청리(光淸里) 주민 수백여 명이 제주목 관아에 몰려와 소장訴狀을 제출하였다. 이에 목사 이병휘는 시정 약속을 하였고 난민들은 자진해산하였다. 그러나 목사는 오히려 방성칠을 잡아들이고 비밀리에 60여 명의 장정들을 조천리에 불러 모았다. 이에 분개한 지역민들이 다시 봉기하면서 민란으로 확산되었다.
민란은 전라남도 출신으로 1891년 제주도에 들어 온 방성칠(房星七)이 주도하였다. 그는 친군親軍을 구성하고 통문通文을 돌려 민심을 고무하고 매 가호 당 장정 1명씩 강압적으로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각기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남자南字'를 각인한 목봉木棒을 들고 2월 28일 제주성으로 향하였고, 29일 성 내에 들어갔다. 이 '남자南字'를 근거로 이 민란이 남학南學에서 주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구타를 당한 후 성 밖으로 쫓겨났고, 수서기(首書記) 문주호(文周昊)가 구타로 사망하였다. 성을 점거한 난민들은 관아를 부수고 공문서와 관인을 소각하였다.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제주 · 대정 · 정의의 세 군수를 혁파하고 환자還上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내용의 방문榜文을 성 내에 붙였다. 또한 각 마을에 전령을 보내 도내의 모든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묶어놓아 육지와의 연락을 두절시켰고, 호고戶庫를 열어 쌀을 풀고 무기고의 창과 검을 꺼내어 중민을 무장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성내의 양반들은 5일 조천으로 도망하여 그곳의 양반들과 합세하여 토벌군을 구성하였지만, 방성칠 등의 선제공격을 받아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방성칠 등 지도부는 장기 전략을 모색하면서 무너진 성과 무기를 보수하고 예상되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정의현감 홍재진(洪在晉) 등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창의군을 모아 방성칠 등 지도부가 성을 비운 사이에 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민란에 가담했던 최형순(崔亨順) 등이 도망하여 그들과 합세하면서 방성칠 부대의 사기와 전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그 결과 방성칠이 이끄는 부대는 애월읍 귀리貴里로 퇴각하였고, 추격해 온 토벌군에게 궤멸되고 이때 촌가로 피신하였던 방성칠도 4월 4일에 처단되었다. 1만여 명 이상이 참가한 민란은 3년 후인 1901년의 제2차 제주민란, 이른바 '이재수(李在秀)의 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살던 방성칠은 남학 운동이 관군의 탄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을 때 방성칠을 비롯한 일부 남학교도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화전지대인 대정현 광청리(現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거주하며 화전을 일구고 남학을 포교하며 살았다.원래 방성칠은 처음에는 소장訴狀을 제출하는 대표자로 나섰을 뿐이었지만, 목사가 그를 잡아 가두려 하자, 남학교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민란을 주도하였고, 목사를 내쫒은 다음에는 아예 중앙정부와 관계를 끊고, 정감록 예언에 따른 국가건설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제주도를 중앙 정부와 분리시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또 다른 왕조를 건설하는 복고적인 것이었고, 이 구상에는 일본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농민들과의 거리도 벌어져, 민란이 실패하게 되었다.
2.5. 남학의 종파
남학은 종파인 일부계[9]와 광화계[10]의 대체적인 교리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남학의 교리를 유 · 불 · 선 삼교의 합일로 본 것은 양계가 같으나, 일부계는 유를 주로 하여 불 · 선을 융섭하였으며 광화계는 불을 주로 하여 유 · 선을 융섭하였다. 그리하여 양계가 모두 독특한 혼합적 교리를 만들었다.
둘째, 후천개벽이라는 선후천 교역운도을 논하고 이에 의한 지상천국 이상세계의 전개와 그 희구希求를 논함은 양계가 같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역학적인 원리면에서 후천 운도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후천 정역의 운도가 김항에 의해 밝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후천개벽의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광화계에서는 불교의 당래미륵불교화설當來彌勒佛敎化說에 의해 후천개벽을 용화세계의 전개로 보았다. 그래서 광화계는 미륵불의 강림을 교주 김치인으로 보게 되었다.
셋째,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는 일부 · 광화 양계가 모두 심신을 수련, 묘도妙道에 들어가는 묘법으로 삼았다. 이 오음을 외는 것은 일종의 영가이면서도 자연의 이치에 합하고 인간의 정리순화情理純化에 신비한 주술적 힘을 발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오음 이외의 다른 주축呪祝을 하는 교파도 있지만 대개는 오음영가를 수련의 기본법으로 한다. 한편, 광화계에서는 오음영가보다 염불 · 진언 · 칠성주七星呪등 각종 주문과 기도문 · 경문 등을 이용한다. 이는 광화계가 오음주송에 의한 수련보다 주축에 더욱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강학講學의 문제로 양계가 모두 유교의 도덕과 불교의 전변심법을 주장한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유도를 주장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인의仁義 · 도덕을 논하는 경전 강학보다는 음양 · 오행 · 역리[11]의 강학에 한층 더 치중한다.
광화계에서는 불도를 논하면서도 해탈 · 선정을 논하는 강학 · 수도보다는 수신 · 제가 · 충효 등 유교적인 도덕을 강학하는 데 주력한다. 이로써 보면 불과 유를 일체인 것으로 보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남학과 동학의 교리를 비교해 볼 때, 후천개벽과 주송수련, 그리고 유 · 불 · 선 삼교의 융섭을 내세운 것은 양쪽이 다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동학의 선후천개벽이론은 주역의 역리에 의한 상원갑上元甲 · 하원갑下元甲의 새 운도 교체를 논한 것인 데 비해 남학은 정역이라는 역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남학의 오음주와 동학의 시천주侍天呪 · 강신주降神呪는 그 내용에 시천주侍天主와 오기수련五氣修鍊의 뜻이 서로 다르다.
이 두 교단이 모두 유 · 불 · 선 삼교의 융섭을 주장했지만, 남학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양계 종단이 완전히 갈라지면서도 유의 연원을 중국 고대의 유교에 두었고, 동학은 유를 중심으로 하면서 특히 신유교新儒敎 방면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신앙대상은 인간 자신에 모신 하느님을 신봉하는 것에 비하여, 남학에서는 화무상제와 당래미륵불을 신봉하는 데서 둘의 차이가 나타난다.
3. 현황
광복과 더불어 광화교 · 광화연합회 · 금강불교 · 칠성교, 기타 광화계에서 분파된 몇 개의 교단이 전라북도에서 포교되고 있으나, 지금은 교세가 위축 또는 소멸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다.[뜻1] 후천개벽 이후의 세상[뜻2] 새로운 하늘이 열린다는 뜻으로 한국 신종교에서 어두운 선천세계가 끝나고 후천의 밝은 문명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다.[뜻3] 역(易)의 법칙.[1] 나철의 대종교와는 다르다.[뜻4] 사람을 잘 알아보는 식견(識見).[2] 또는 학명산천鶴鳴山川[뜻5] '공자'를 높여 이르는 말.[뜻6]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한 도리.[3]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를 가리키는 말이다.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법),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뜻7] 자연 현상 따위가 규칙적으로 돌아감.[뜻8] 지은 죄 때문에 받는 괴로움.[뜻9]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일을 귀신이 와서 귀에 대고 일러 주는 말로, 점을 쳐서 알아내는 일.[뜻10] 숨겼던 사실을 비로소 밝히어 말함.[8] 화무상제化无上帝 : 일부계一夫系에서는 일부一夫의 신명神明이 상제上帝가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9] 이운규의 제자 일부 김항 계열[10] 이운규의 제자 광화 김치인 계열[11] 특히 정역正易의 이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