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21:22:03

남학


1. 개요2. 상세
2.1. 연원 및 변천2.2. 교리
2.2.1. 정역

출처:
남학(南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 개요

남학(南學)은 1860년대 초 이후 이운규(李雲圭)[1]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이다. 창교 시기와 교리가 동학과 비슷한 듯 다르다 하여 남학이라 불렸다. 남학의 이상은 후천 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주 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운규 사후 제자들에 의해 무극대도, 대종교, 영가무도교, 오방불교, 광화교 등의 분파가 생겨났으나 일제강점기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2. 상세

2.1. 연원 및 변천

이운규는 벼슬을 하다 서울을 떠나 충청남도 연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주요 제자들로는 사돈인 일부(一夫) 김항(金恒)[2], 아들 부련(夫蓮) 이용래(李龍來)와 일수(一守) 이용신(李龍信), 제자 광화(光華) 김치인(金致寅)[3]이다.

남학에서는 현대를 선천시대(先天時代)에서 후천시대(後天時代)로 바뀌는 교역기(交易期)라고 규정하고, 후천시대의 운도(運度)를 천명한 『정역(正易)』이라는 역서(易書)를 제시하여, 후천시대는 지상천국이 이룩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교역기에는 재겁(災劫)이 있는데 이 재겁을 없애고 후천선계에 가려면 오음주(五音呪)를 외는 주송수련(呪頌修鍊)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 지상선계(地上仙界)가 개벽된다는 설은 당시 부패된 정치, 경제, 교육의 불안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또한 오음주를 주송함으로써 심기가 쾌락해지고 질병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히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교리로는 유 · 불 · 선 삼교가 합일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항과 김치인 등에 의해 교단이 성립될 때, 김항은 유교적인 방향에서 스승 이운규의 역학에 관한 해석을 좀 더 깊이 연구하여『정역』을 중심으로 충청남도 연산과 계룡산 일대에 포교하면서 자신의 교단을 '무극대도'라 하였다. 김치인은 불교적인 방향에서 전라북도 완주와 진안 운장산 일대에서 포교하고, 이운규의 두 아들과 함께 진안에서 이운규를 1세 교주, 이운규의 장남 이용래를 2세 교주, 차남 이용신을 3세 교주, 김치인 자신을 4세 교주로 하는 오방불교를 창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김항과 김치인과 더불어 동학최제우도 이운규 밑에서 교훈을 받은 바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루는 이운규가 최제우, 김항, 김치인 세 사람을 불러 놓고 최제우과 김치인에게는 각각 선교불교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주문을 외우고 깊이 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김항에게는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장차 하늘의 계시를 받을 것이니 서전(書傳)[4]을 많이 읽으라면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글귀를 내주고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 후 김항은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홀연히 깨달아 허공에서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보고 『정역』을 지었다고 한다.

김항은 이운규에게서 받은 가르침이 중국의 고대 유교에 입각하여 새로운 역리를 연구하고 영가무도는 이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문에 들어오는 교도들은 대부분이 양반계층의 유학자였다. 김항의 주요 제자들도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이름있는 유학자들이었다.

1898년 김항이 사망하자 제자 하상역이 2세 교주가 되면서 대종교(大宗敎)[5]라는 교명을 내걸고 포교할 때 교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여 이에 대한 시비논쟁이 분분하였다.

김항의 남학에 대한 신앙 태도는 정역 이론과 오음주 주송수련이 후천개벽을 맞는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수련하는 공자의 유행(儒行)[6]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상역, 김영곤 등은 김항을 상제로서 신격화하고 신앙대상으로 추앙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홍현, 김정현 등은 김항의 사상이 순수하게 유교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하상역 등이 가르침을 타락시킨다 하여 논박함으로써 교리에 대한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상역, 김영곤 등의 신비적 교리에 반대하는 김홍현, 김정현, 권종하 등의 소위 족척계 제자들은 김항의 가르침을 공자의 유학을 새로운 면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보고, 남학에서 『정역』을 공부하는 것은 『주역』의 원리에서 후천시대의 새로운 원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오음주는 공자가 주장한 육예(六藝)의 내용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고, 춤추는 것과 부패한 유교 윤리를 부흥시켜 유교의 도덕이 잘 발휘되는 후천의 지상낙원을 건설하자는 것이 남학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로 뭉친 교파가 분립하게 되었고, 이 교파는 김항의 척손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회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단순한 학회가 아니라 신앙성이 들어 있고 정기적으로 향례까지 지내는 종교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로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64년이었다.

이 때 정역학회가 발족되어『정역』원본을 발간하는 등 정역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사업들을 전개하였고, 이후에도 일부선생기념사업회, 정역사상연구회 등이 설립되어 김항과 정역에 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김영곤은 일부상제에 의해 후천 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다며 단체를 만들어 계룡산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그가 죽자 임도봉(林道峯)이 계승했다.

이 교파는 중앙대종교(中央大宗敎)라는 교명으로 이필례(李必禮)에 의해 널리 퍼졌고, 이필례는 교명을 천일교(天一敎)로 바꾸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크게 제사를 지내며 무속에 가까운 종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이필례가 사망하자 종교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현재는 과거의 신자들과 자손들이 교주의 묘를 참배하는 정도이다.

힌편, 신도였던 이희룡이 영가무도 수행을 주로 하는 교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희룡이 죽자, 그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에 수도 장소를 설치하고 『정역』연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설치된 제단에는 일부상제, 화무상제, 황극모(黃極母),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미륵불 등을 모시고 이를 신앙대상으로 하여 기도를 한다. 여기서 화무상제와 미륵불은 김항의 화현이라고 본다. 국사봉은 김항이 마지막 포교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적지가 되어,『정역』을 공부하고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와 더불어 기타 주축기도 수련을 행하는 일부계 교인들이 현재까지 모이고 있다.

김항의 제자 이상룡(李象龍)이 자기 나름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포교한 교단이 형성되어 청양군, 공주, 이천 등지에 그 여세가 남아 있고, 이 밖에도 일부계의 교파에서 동학증산교(甑山敎)와 야합된 몇 개의 교파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모두 형세가 미약하여 유야무야한 상태이며, 송철화에 의해 시작된 영가무도교는 송철화가 사망한 이후 교세가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약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국사봉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서울 등지에서 『정역』을 공부하거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김항의 최후 유적지인 이곳 국사봉을 참배차 방문하기도 한다.

한편, 김치인은 전라북도의 완주와 진안 일대에서 포교할 때 전라북도의 신도들을 주로 하여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운규의 아들 이용래, 이용신 형제를 스승으로 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운장산 밑 대불리(大佛里)에 본부를 두고 포교하였다.

이 오방불교에서는 후천의 개벽이 곧 미륵불 강림에 의한 개벽이라고 하나, 그 교리 면에서는 『정역』의 사상을 믿고 오음주송 수련을 행하면서 도를 닦는 것이 유교적 경향이 강하며 신도들도 대부분 유자들이기 때문에 처사교(處士敎)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김치인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이라는 역리적 운도변역(易理的 運度變易)을 이 교의 종지로 삼았지만 이 운도개벽은 김항과 같이 유교적인 입장에서『주역』의 운도가 바뀌는 『정역』의 원리보다는 불교적인 미륵불의 강림으로 인한 용화세계의 운도로 믿었다.

그리고 이 용화세계는 지상선계라고 하여 자신의 오방불교의 교법은 곧 유불선이 합일된 무극대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인의 도덕과 불교의 자비 선행과 도교의 주송 수련을 병행할 것을 주장하면서, 오음주 등 몇 가지 주문에 의한 기도수련을 병행하였다.

이 때 주송 수련에서 일어나는 영가무도의 신비와 치병, 그리고 용화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일부계 교단보다도 형세가 큰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 때 교명을 오방불교라고 하는 한편, 자신의 교단을 동학에 대응되는 남학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본 남학에서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후천개벽이 목적이며,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주장함은 민족종교의 당연한 임무라고 하여 이에 남학에서도 동학과 같은 거의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남학 운동을 결행하였다.

이 때 교단 본부인 대불리와 주천에 본영을 두고 5만여 명에 달하는 남학군이 조직되었으나, 출동 직전에 관군의 습격으로 간부들과 많은 교인들이 붙잡혀 김치인을 비롯한 8명의 간부들이 전주나주에서 사형을 당하고, 남학운동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치인이 죽자 그 제자들 사이에 교통전수를 둘러싼 분규가 생겼는데, 수제자 김용배(金庸培)가 정통을 이어 금강불교(金剛佛敎)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고, 김항배(金恒培), 권순채(權珣采)는 광화교 또는 광화불교라는 교명으로 포교하였다. 뒤에 금강불교의 교명이 칠성불교로 바뀌어 운장산 주위를 근거로 하고 용담, 진산, 금산, 장수 등지에 포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경찰의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이 교단은 물론이고 일부계의 교인들까지도 다수가 붙잡히는 바람에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광화교, 광화연합회, 금강불교, 칠성교 등 기타 광화계에서 분파된 몇 개의 교단이 전라북도에서 포교되고 있으나, 지금은 교세가 위축 또는 소멸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다.

2.2. 교리

남학의 이상은 후천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의 주송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정역』은 이운규의 후천개벽의 역리를 김항이 천명한 이 교단의 경전으로서 후천역(後天易)이라고 부른다.

선천에서는 1년이 365일에 4분의 1이라는 윤(閏)이 있었지만, 『정역』의 운수는 360일 정각이 되니 윤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천에는 사계절, 낮밤, 추위와 더위의 차이가 없게 되고 인간 사회에도 빈부, 귀천, 수요의 구별이 없게 된다.

이 때에는 사람의 형상도 달라져서 1만 8,000세까지 장수할 수 있고, 사람은 신과 동화되어 조화를 부릴 수 있다. 그리고 지상에는 죄가 없는 지상천국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후천이 교역하는 시기가 되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게 되며, 인간 행위의 선악에 심판이 따르게 되는데, 이 때를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닦아야 될 올바른 도(道)가 곧 남학이 열어 준 무극대도이다.

오음주는 음(吟), 아(哦), 어(唹), 이(咿), 우(吁)의 오음을 외우는 것을 말한다. 이 오음은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오성(五聲)과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五行) 및 비(脾), 폐(肺), 간(肝), 심(心), 신(腎)의 오장(五臟)과 조화를 일으키는 소리로, 이를 주송하면 자연히 기운과 오장이 수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음 주송은 이에 음률의 고저, 장단, 청탁이 있어 서로 조화적으로 자연의 이치에 응하기 때문에 이 소리를 부르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을 추게 된다. 이 영가무도가 극치에 달하면 앉은 채로 몸이 3, 4척이 뛰어오르고 여러 가지 신비현상을 불러 일으키며, 질병이 치유된다고 믿는다. 이것을 오음주송에 의하여 자연의 조화에 부응하는 경지라고 한다. 이 계통의 신자들은 영가무도로 병을 고치고 신을 맞이하여 재앙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화무상제[7](化無上帝)의 뜻에 따라 개벽되는 후천 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특히 일부계 남학의 교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 교단을 한때 영가무도교라고 불렸다. 이 영가무도에는 정(精), 기(氣), 신(神)의 조화작용이 있다고 믿는다. 정의 조화에 의해 관통하는 것은 유교의 진리라 하고, 신의 조화에 의해 깨닫는 것은 불교의 진리라고 하며, 기의 조화에 의해 수련되는 것은 도교의 진리라 정, 기, 신의 조화는 유불선 삼교 합일의 도라고 한다.

남학은 종파인 일부계[8]와 광화계[9]의 대체적인 교리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학의 교리를 유불선 삼교의 합일로 본 것은 양계가 같으나, 일부계는 유교를 주로 하여 불교, 도교를 융섭하였으며 광화계는 불교를 주로 하여 유교, 도교를 융섭하였다. 그리하여 양계가 모두 독특한 혼합적 교리를 만들었다.

둘째, 후천개벽이라는 선후천 교역운도을 논하고 이에 의한 지상천국 이상세계를 바라는 것은 양계가 같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후천의 운도가 김항에 의해 밝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후천개벽의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광화계에서는 후천개벽을 용화세계의 전개로 보았다. 그래서 광화계는 미륵불의 강림을 교주 김치인의 강림으로 믿게 되었다.

셋째, 오음 주송에 의한 영가무도는 양계가 모두 심신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이 오음을 외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합하고 신비한 주술적 힘을 발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오음 이외의 다른 주문을 하는 교파도 있지만 대개는 오음영가를 수련의 기본법으로 한다. 한편, 광화계에서는 오음영가보다 염불, 진언, 칠성주(七星呪) 등 각종 주문과 기도문, 경문 등을 이용한다. 이는 광화계가 오음 주송에 의한 수련보다 주축에 더욱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강학(講學)의 문제로 양계가 모두 유교의 도덕과 불교의 전변심법을 주장한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유교를 주장하면서 인의(仁義), 도덕(道德)을 논하는 경전보다는 음양, 오행, 역리[10]의 강학에 한층 더 치중한다. 광화계에서는 불도를 논하면서도 해탈, 선정을 논하는 강학보다는 충효 등 유교적인 도덕을 강학하는 데 주력한다. 이로써 보면 불과 유를 일체인 것으로 보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남학과 동학의 교리를 비교해 볼 때, 후천개벽과 주송수련, 그리고 삼교의 융섭을 내세운 것은 양쪽이 다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동학의 선후천 개벽 이론은 주역의 역리에 의한 상원갑(上元甲), 하원갑(下元甲)의 새 운도 교체를 논한 것인 데 비해 남학은 정역이라는 역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남학의 오음주와 동학의 시천주(侍天呪), 강신주(降神呪)는 그 내용에 시천주(侍天主)와 오기수련(五氣修鍊)의 뜻이 서로 다르다.

이 두 교단이 모두 유불선 삼교의 융섭을 주장했지만, 남학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양계 종단이 완전히 갈라지면서도 중국의 고대 유교의 연원을 두었고, 동학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면서 특히 신유교(新儒敎) 방면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신앙대상은 인간 자신에 모신 한울님을 신봉하는 것에 비하여, 남학에서는 화무상제와 당래미륵불을 신봉하는 데서 둘의 차이가 나타난다.

2.2.1. 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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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역과 정역팔괘도

정역은 조선 후기 김항이『주역』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주창한 역학사상이다. 김항은 스승 이운규의 지도를 받고 정진하던 중에 겪은 신비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역을 완성했다. 주역은 선천에만 적용되고 미래는 후천의 원리를 나타내는 정역의 괘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천개벽 사상을 체계화했다. 한민족 중심의 종교사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운규는 김항에게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을 자라고 하며 예서(禮書)만 볼 것이 아니라『서전(書傳)』을 많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뒤에 반드시 책을 지을 것이니 그 때 “나의 이 글 한 수를 넣으라.”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관염(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글이라 한다.

여기서 특히 영동천심월이 훗날 동학과 『정역』의 공통사상인 선후천 개벽 사상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그 뒤 김항은 영동천심월의 의미를 파악하였고 그 뒤 계속 정진하던 중 눈에 생소한 괘획(卦劃)이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이러한 가 『주역』에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계시적인 체험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팔괘도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문왕팔괘도(文王八卦圖)와는 다른 정역팔괘도이다.

이어서 그에게 공자가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런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였다. 그 뒤『대역서(大易序)』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2년간에 걸쳐 『정역』을 완성하였다.

『정역』의 사상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천, 후천 사상과 자연변화를 이루는 일월개벽 사상, 그리고 인간변화와 문화세계를 이루는 신명개벽 사상이 그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선천, 후천을 말할 때 과거의 것을 선천이라 하고 현재의 것을 후천이라 한다. 그러나 『정역』에서는 현재를 선천이라 하고 미래를 후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역』의 괘는 선천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미래에는 후천의 원리를 나타내는 정역의 괘도를 사용해야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정역』의 후천개벽사상은 미래의 이상세계 건설의 꿈이고, 미래세계에 펼쳐질 자연변화의 원리를 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정역』은 현행의 윤력도수(閏曆度數)에서 미래의 정력도수(正曆度數)로 넘어가는 장래의 일월역수변화, 즉 1년이 365년에 4분의 1이라 윤달이 있던 선천에서 360일 정각인 후천으로 넘어간다는 것으로 이것은 후천개벽기를 기점으로 우주사의 시간적 선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역』의 근본사상은 역수원리를 바탕으로 후천개벽사상을 말하는 천도적 윤변위정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셋째, 앞에서 언급한 것이 후천개벽의 객관적 세계인 천지일월의 개벽사상이라면, 신명개벽사상은 이러한 이치를 주체적으로 자각한 인간에 관한 내용이다.

『대역서』에서 무역무성 무성무역(無易無聖 無聖無易)^'이라 하였듯이, 일월변화와 인간성덕(人間聖德)을 일체로 보는 정역사상은 외적인 일월개벽사상과 아울러 내적인 인간본래성의 신명개발을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천지가 말을 하므로 일부(一夫)가 말을 하는 것이며 일부의 말이 곧 천지의 말이다."라고 한다든지, "금화문(金火門)은 천디인 삼재(三才)의 출입문이다."라고 『정역』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천지는 천도를 자각한 인간, 즉 성인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정역』은 하도의 실현이요, 그 구체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도는 음양의 완전 조화체이므로 『정역』도 역시 음양의 완전조화를 나타낸다.

완전한 음양의 조화세계란 남녀가 평등하고 인권이 존중되고 무량한 복지사회가 됨을 의미한다. 또한, 사상적으로도 진리의 근원이 밝혀져 사상적 갈등이 극복되고, 교파초월과 상호이해 · 상호존중 · 상호협력으로 종교의 일치가 도모되는 세계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정역』을 한국과 관련시켜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즉, 역리상에서 본 한국과 한국의 주체적 사상으로서의 『정역』이 언급될 수 있다.

우선 역리로 한국을 살펴보면, 『주역』 설괘전(說卦傳)에서 간(艮)은 겨울이 동과 북 사이에서 교체되는 괘다. 만물이 종말기가 되면서 곧 발생기가 되는 때이므로 결실은 간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간은 소남(少男)인데, 한국은 지리상의 위치로 볼 때 동북방으로서 간방이므로 한국은 간소남(艮少男)이라 할 수 있다.

간은 진장남(震長男)에서 출발한 역이 간소남에 이르러 그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새 질서와 새 생명이 시작되는 터전이 마련된다. 이것은 바로 종말이 곧 새로운 간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정역의 세계와 상응하고 있다.

즉, 팔간(八艮)으로 시작하여 칠지(七地)로 끝을 맺는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이 우주와 만물의 완성을 나타내는 『정역』의 내용이다.

우리 나라는 역리상에서 보듯이 만물을 종시(終始)하는 간역(艮域)으로써 만물이 시종하는 간역(艮易), 즉 정역이 나왔으니 우주론적, 인류사적 의의와 거기에서 창조될 새로운 세계건설, 즉 유리세계건설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정역』은 암시하고 있다.

두번째로 정역사상은 19세기 후반의 동학사상과 함께 한민족의 주체사상을 이룬다. 20세기에 발생한 한국의 신종교들의 교리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 바로 김항과 최제우에 의하여 천명된 후천개벽사상이다.

그러므로 『정역』의 사상사적 연원은 중국의 선진성학(先秦聖學), 즉 십익(十翼)을 포함한 『주역』에 두었으나, 그 논리적 연원은 도리어 정역원리에서 주역사상이 연원하였다고 봄으로써 『정역』은 한국사상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정역』의 근본사상이 재래의 유학과는 달리 미래를 예견하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선천 · 후천의 개념을 새로 규정하고 후천개벽사상을 역리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로써 천도의 일월개벽사상으로는 윤변위정의 원리를 주장하였고, 인도(人道)의 신명개벽사상으로는 도덕적 교화의 윤리를 내세워 공자도 감히 말하지 않았던 우주사적 원리를 천명하였다.

이와 같이, 한말의 상황 속에서 형성된 정역사상은 『주역』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한민족 중심적인 종교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1] 본명은 수증(守曾)이고, 호는 연담(蓮潭)이며,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천안에서 태어났다.[2] 파일:김항.jpg 자는 도심(道心)이고, 호는 일부이다. 182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성리학을 배우다 이운규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또 영가무도(詠歌舞蹈)를 가르치고, 주역을 한국식으로 체계화하여 정역을 저술하였다.[3] 호는 광화이며, 이후 광제(廣濟)로 개명(改名)하였다. 1855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도인을 만나 도술을 배우기 위하여 찾아다니다 이운규의 아들인 이용래와 이용신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이용신을 교주를 추대하고 오방불교(五方佛敎)를 창교하였다. 1895년 남학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였다.[4] 중국 송나라 때에, 주희의 제자 채침(蔡沈)이 ≪서경≫에 주해를 달아 편찬한 책.[5] 나철이 세운 대종교와는 다르다.[6] 유학에 기반을 둔 행위.[7] 일부계(一夫系)에서는 김항을 신격화하여 부르는 말.[8] 이운규의 제자 일부 김항 계열[9] 이운규의 제자 광화 김치인 계열[10] 특히 정역(正易)의 이(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