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史楚
(1875 ~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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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 조선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했던 노사초(盧史楚) 국수의 본명은 석영(碩泳)이며 호는 사초(史楚)다.2. 생애
1875년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노사초는 성품이 온화하면서 검소하였다. 증조부인 노광두(盧光斗)가 호조참판을 지냈을 정도로 인근에서는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노광두는 흉년이 든 해엔 임금에서 상소를 올려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게 해준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의롭고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노참판댁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대를 이었다. 부잣집에 태어난 노사초는 한학을 공부했으며 성품이 어질고 물욕이 없었고 항상 주위에 베풀기를 좋아했다.
노사초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절 바둑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청년시절 당대 일인자였던 백남규(白南圭) 국수를 만나면서 바둑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처음 6점으로 시작한 백남규와의 대국은 몇 해 안되어서 맞두는 수준까지 다다랐고, 얼마 후 조선 최고의 국수로 추앙받으며 구한말을 풍미한다. 특히 그는 30세가 지나서 본격적으로 바둑에 정진했는데, 만약 그가 오늘날과 같이 어려서부터 바둑에 매진했다면 그 천재성에 비춰볼 때 엄청난 고수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노사초의 바둑은 그 성격만큼이나 호방한 전투형이다. 패싸움을 특히 좋아하여 사람들은 그를 '노패' 혹은 '노상패'라고 불렀다. 1944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의 제자인 혼다도시코에게 백으로 만방을 이겨서 조선바둑의 실력을 과시했다.
그 시절 노국수가 다들 그랬듯이 노사초도 전국유람을 자주 다녔다. 한번은 며느리의 산후 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나갔다가, 중도에서 바둑친구를 만나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바둑유람을 떠나기도 했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입기도 했다.
때로는 집이나 논문서를 걸고 내기 바둑으로 즐겼다. 내기 바둑으로 돈을 따더라도 대부분 나눠주었다. 그러나 바둑에 지면 노참판댁 고택이 차압되고, 다시 풀리기를 무려 27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평생 바둑과 인생을 같이 한 노사초는 해방되는 해인 1945년 5월 70세의 나이를 끝으로 고향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