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000000,#dddddd> 노엘 호사 Noel Rosa | Noel de Medeiros Rosa | |
출생 | 1910년 12월 10일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 |
사망 | 1937년 5월 4일(향년 26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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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싱어송라이터. 일명 브라질 대중가요의 모차르트로, 27세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음에도 250곡이 넘는 왕성한 작곡 활동으로 현재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0년 12월 11일, 리우데자네이루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노엘 호사. 하지만 출산이 난산이었던 탓에 집게를 썼으나 이로 인해 얼굴에 부상을 입었는지 턱이 매우 작고 삐뚤은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1]Batuque é um privilégio
Ninguém aprende samba no colégio
바투케[2]는 특권이네
고등학교에선 삼바를 배우는 사람이 없어
훗날 작곡된 Feitio de Oração의 구절.
Ninguém aprende samba no colégio
바투케[2]는 특권이네
고등학교에선 삼바를 배우는 사람이 없어
훗날 작곡된 Feitio de Oração의 구절.
10대가 된 노엘 호사는 만돌린을 배우게 되고 음악과 삼바에 흠뻑 빠지게 된다. 만돌린은 곧 기타로 바뀌게 되고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밤에는 술집에 가서 삼바 가수들과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생활을 하였다.
2.2. 데뷔, 스타가 되다
Bando de Tangarás - Vamos Fallá do Norte |
1931년, 끝내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4] 하지만 이미 자신의 길은 의사가 아닌 음악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몇달만에 자퇴하고 새로운 신곡을 발표한다.
Com que Roupa? |
Positivismo |
2.3. 삼바 디스전
Wilson Batista - Lenço no pescoço | Noel Rosa - Rapaz folgado |
2.4. 결핵, 사망
Quem sofreu mais que eu não nasceu
Com certeza Deus já me esqueceu
Mesmo assim não cansei de viver
E na dor eu encontro prazer
나보다 고난을 더 많이 겪은 자는 태어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날 이미 잊으셨느니라
하지만 난 삶에 지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았네
말년인 1937년에 작곡한 'Eu Sei Sofrer'의 구절
Com certeza Deus já me esqueceu
Mesmo assim não cansei de viver
E na dor eu encontro prazer
나보다 고난을 더 많이 겪은 자는 태어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날 이미 잊으셨느니라
하지만 난 삶에 지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았네
말년인 1937년에 작곡한 'Eu Sei Sofrer'의 구절
A cruel realidade
Ensinou-me o interesse
Mas todo o bem dura pouco
Todo mal tem sempre fim
이 잔인한 현실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지만
모든 좋은 것은 오래 가지 않으며
모든 나쁜 것은 항상 끝나네
'Amar com sinceridade'의 구절
Ensinou-me o interesse
Mas todo o bem dura pouco
Todo mal tem sempre fim
이 잔인한 현실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지만
모든 좋은 것은 오래 가지 않으며
모든 나쁜 것은 항상 끝나네
'Amar com sinceridade'의 구절
Com Que Roupa 이후 노엘 호사는 매년 수십곡의 노래를 작곡하고 발표하며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1930년대 초에 폐결핵에 걸린 상태였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노엘 호사는 요양을 위해 벨루오리존치로 이사했지만 방탕한 사생활이 겹치며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작곡 활동을 멈추지도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후기 노래들 중에는 상당히 우울한 가사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편이다.
영화 Noel, poeta da Vila에서 묘사된 그의 죽음[5] |
3. 사생활
Dama Do Cabaré |
술도, 담배도, 여자도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핵이 악화되어 요양을 갔으면서도 여자와 술과 담배는 그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노래도 함께였지만, 그의 방탕한 생활은 결핵을 급격히 악화시킨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9]
4. 여담
- 2019년 12월 11일, 구글은 구글 두들로 그의 109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 리우데자네이루의 Vila Isabel 동네에 있는 터널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1] 현재는 유전병인 피에르 로빈 증후군으로 추정하는 중이다.[2] 타악기를 동반한 일부 아프리카-브라질 춤의 총칭.[3] 나머지 멤버들의 경우는 Braguinha가 영입한 아마추어들이다보니 비중이 떨어졌다.[4] 노엘 호사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부분.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을 했음에도 의과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성적을 받아냈다는 것이다.[5] 죽기 직전, 절친에게 부탁해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 들려달라며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전환되고, 이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6] 노엘 호사의 쎄시에 대한 사랑이 질투로 변질된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자살이었다. 노엘 호사의 아버지도 본인의 어머니, 즉 노엘 호사의 친할머니의 자살로 정신적으로 많이 괴로워했었다고 한다.[8] 정작 노엘 호사는 그렇게 불륜을 했으면서도 아내를 사랑한다며 이혼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아이가 생겼던 걸 보면 진짜로 사랑한 건 맞은 것으로 보인다..[9] 실제로 1932년까지만 해도 초기이니 깨끗하게만 산다면 괜찮을 것이란 의사의 조언도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사생활을 그대로 고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