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소설가 윤대녕의 2004년작 소설집. 문학동네 출간.2. 목차
- 흑백 텔레비전 꺼짐
- 무더운 밤의 사라짐
- 누가 걸어간다
- 찔레꽃 기념관
-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
- 올빼미와의 대화
3. 책 속 글귀
찔레꽃 냄새가 이발소 안으로 분분히 날려 들어오고 있었다. 마당의 창창한 햇빛 속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그 냄새는 아지랑이처럼 눈에 잡힐듯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이발사에게 묻었다.
"시인이 뭔데요?"
그가 잠깐 나를 흘겨보더니 거울 위에 붙어 있는 푸슈킨의 시를 가리켰다.
"비록 이발소에 걸려 있지만 저건 아주 위대한 시란다. 아니, 그만큼 위대한 시라서 이발소에도 걸려 있는 거겠지. 시인이란 그러니까..."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나는 그의 말을 툭 가로채며 끼어들었다.
"시인이란 그러니까 위대한 이발사 같은 거로군요."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곧 단념한 투로 웃어버렸다.
"여기 이렇게 숨어 책이나 뒤적이며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래, 네 말대로 이발사가 곧 타락한 시인인지도 모르겠구나."
찔레꽃 기념관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이발사에게 묻었다.
"시인이 뭔데요?"
그가 잠깐 나를 흘겨보더니 거울 위에 붙어 있는 푸슈킨의 시를 가리켰다.
"비록 이발소에 걸려 있지만 저건 아주 위대한 시란다. 아니, 그만큼 위대한 시라서 이발소에도 걸려 있는 거겠지. 시인이란 그러니까..."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나는 그의 말을 툭 가로채며 끼어들었다.
"시인이란 그러니까 위대한 이발사 같은 거로군요."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곧 단념한 투로 웃어버렸다.
"여기 이렇게 숨어 책이나 뒤적이며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래, 네 말대로 이발사가 곧 타락한 시인인지도 모르겠구나."
찔레꽃 기념관
누군가 밤의 운동장에서 혼자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 담밖의 가로등이 운동장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여겨보니 달리기를 하는 사내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짧게 쳐올린 머리에 흰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교문 앞을 둥그렇게 뛰어가며 외치는 소리를 순간 나는 분명히 엿듣고 있었다.
"혼자 존재하지 못하는 나약한 놈들은 다 뒈져야 해! 뒈져야 한다고. 시방 국가 발전이 안 돼요. 발전이!"
때맞춰 학교 옆에 있는 교회에서 그랑! 그랑!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에 웬 종소린가 따질 겨를도 없이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돌연 혹,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왜? 내가 그렇게 묻으려는 참에 끌려가듯 사내의 몸이 서서히 뒤로 비틀어지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교회가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어, 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희미하게 중얼거리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종소리는 계속해서 뎅뎅거리며 도시 한복판에 음울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교회 앞 어둑한 계단에 다다른 사내가 발을 멈추더니 한동안 유령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그사이에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사내가 조회 때 쓰는 단상 옆을 뛰어가며 외치는 소리가 귀에 날아왔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에!"
교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는 한 칸씩 계단을 밟고 올라가더니 이어 육중한 문을 열고 빨려들듯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배낭을 추스르고 나서 아침녘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 동쪽으로 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
"혼자 존재하지 못하는 나약한 놈들은 다 뒈져야 해! 뒈져야 한다고. 시방 국가 발전이 안 돼요. 발전이!"
때맞춰 학교 옆에 있는 교회에서 그랑! 그랑!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에 웬 종소린가 따질 겨를도 없이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돌연 혹,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왜? 내가 그렇게 묻으려는 참에 끌려가듯 사내의 몸이 서서히 뒤로 비틀어지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교회가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어, 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희미하게 중얼거리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종소리는 계속해서 뎅뎅거리며 도시 한복판에 음울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교회 앞 어둑한 계단에 다다른 사내가 발을 멈추더니 한동안 유령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그사이에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사내가 조회 때 쓰는 단상 옆을 뛰어가며 외치는 소리가 귀에 날아왔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에!"
교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는 한 칸씩 계단을 밟고 올라가더니 이어 육중한 문을 열고 빨려들듯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배낭을 추스르고 나서 아침녘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 동쪽으로 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