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西穂高岳落雷遭難事故[1]1967년 8월 1일 일본에서 일어난 산악 낙뢰 사고. 당시 많은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고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2. 사고 경위
나가노현 마츠모토시 소재의 마츠모토후카시 고등학교에서는 해마다 단체 등산을 개최했는데 이는 개인 등산에 수반되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학교측에서 희망자들을 모아 주최하는 것으로, 사고가 발생한 1967년에는 2학년 학생들과 교사 5명을 포함한 총 55명이 참가했다. 당시 일정은 7월 31일에 마츠모토시를 출발하여 카미코치[2]에서 1박 후 8월 1일 아침부터 니시호타카타케에 올랐다가 다음 날 하산하여 마츠모토시로 돌아올 예정이었다.그러나 8월 1일 정오 무렵부터 기상 상태가 악화되면서 천둥번개와 대량의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즉시 피난하기 시작했고 하산 중이던 오후 1시 30분경 니시호 독표(西穂独標) 인근 사면을 일렬로 내려가던 중 그만 번개를 그대로 맞고 말았는데 이 낙뢰로 학생 8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다른 학생과 교사, 일반 등산객 1명을 포함 총 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학생 3명이 실종되었다. 사망한 학생들 중 6명의 시신은 한 데 모여 있었고 머리를 바위에 부딪히거나 등산화 바닥에 번개가 관통하면서 생긴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등 상태가 처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정상 부근에서 '파직'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전신이 저릿저릿해지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생존자들의 등산 가방 속에 들어있던 우산, 식기류 등의 물품에 전류가 흐른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실제로 낙뢰로 인해 감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한편 낙뢰 사고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은 니시호 산장 직원들과 니시호타카 진료소의 의사들 등 약 20여명이 현장을 찾아와 구조 활동을 도왔고 가까스로 화를 모면한 학생과 교사들, 부상자들은 산장으로 피신했으며 사망자들의 시신도 임시로 산장에 안치되었다. 실종자 3명은 낙뢰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나가노현 방면으로 튕겨 날아간 것이 확인되었으나 짙은 안개로 수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수색은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1일 밤에는 사고 소식을 접한 의사 2명이 카미코치에서 추가로 지원을 왔으며 육상자위대에서도 구조 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마츠모토후카시 고등학교에 대책본부가 설치되고 교장을 포함한 교직원 5명이 카미코치를 찾아갔다.
이튿날인 8월 2일 실종자 수색이 시작되었고 3명 모두 능선에서 약 300m 아래쪽에 위치한 사면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사망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3. 피해 상황에 관하여
이 사고에는 똑같이 낙뢰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혼재한 데다 피해 정도에도 크게 차이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당시 강풍과 폭우로 하반신이 젖은 상태에서 일행이 길게 일렬로 내려갔다는 점, 금속류를 몸에 지니고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일종의 피뢰침 같은 상태가 되어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추측된다.반면 울퉁불퉁한 사면이나 바위 뒤편 등에 숨어 있었던 사람들은 비교적 경상에서 그쳤고 정상 부근에 있던 사람들은 몸이 저리고 마치 무언가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번개에 직격되지는 않았다. 이는 "번개가 쳤을 때 손끝에서 파란 빛이 지면을 타고 갔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전위차 해소 과정에서 정전기에 의한 쇼크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졌다. 다만 화상이나 충격파로 인해 넘어지면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고 금속제 수통과 식기 등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큰 전기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4. 여파
등산중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낙뢰 사고에서도 한 번에 사상자가 24명이나 발생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사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큰 화제가 되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등산 행사 중에 발생한 참사였던 탓에 나가노현의 각 학교에서는 등산 관련 행사를 일시 중단 또는 폐지하는 경우도 많았다.한편 사고가 발생한 1967년에는 낙뢰의 원리와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30여년이 지난 1990년대 이후 연구가 거듭되고 각종 안전 대책 실시로 사고율을 감소시킬 수 있음이 증명됨에 따라 일본에서도 낙뢰 사고에 대비한 구체적인 안전 대책이 실시되었다.
5. 기타
- 1968년 피해자들이 재적했던 마쓰모토후카시 고등학교에서는 '독표에 기원한다(独標に祈る)'는 제목의 추도 문집을 발행했다. 글뿐만 아니라 관련 사진들도 게재되어 있다.
- 소설가 아가와 히로유키[3]의 <개와 아사짱(犬と麻ちゃん)>이라는 소설에서 이 사건이 짧게 나온다. 해당 작품은 일본의 고도성장기 직후인 1960년대 후반이 배경으로, '작년 여름'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등장인물의 표현으로 시기가 언급된다.[4]
[1] 니시호타카타케 낙뢰 조난사고[2] [Ruby(上高地, ruby=かみこうち)]. 니시호타카타케가 위치한 히다 산맥 남부의 아즈사강 상류에 있는 곳으로 일본 국가 특별명승·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지명의 한자 표기는 와다츠미의 자식인 바다의 쿠니츠카미 호타카미노미코토(穂高見命)가 이 산에 강림하여 호타카 신사에서 모셔지게 된 데서 유래한 '神垣内'였다가 현행 표기로 바뀌어 지금까지 자리잡았다.[3] 동화 <기관차 야에몽>의 작가.[4] '작년 여름'이라는 인물의 말로 미루어 보아 작품의 구체적인 시대 배경은 1968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