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왕국 국서 დავით სოსლანი | 다비트 소슬란 | ||
성명 | 한국어 | 다비트 소슬란 |
조지아어 | დავით სოსლანი | |
라틴어 | David Soslan | |
가족 | 야다론(아버지) 루수단(어머니) 타마르(아내) 기오르기 4세(장남) 루수단(장녀) | |
생몰 년도 | 미상 ~ 1207년 | |
조지아 국서 재위 기간 | 1191년 ~ 12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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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10대 여왕 타마르의 국서.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여왕에 대한 두터운 충심으로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이끈 인물이다.2. 생애
북캅카스 지역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족인 알란족의 왕자 야다론과 다비트 4세의 딸 루수단의 아들이다. 아들 기오르기 4세 치세에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에브라임[1]의 자손"이며 바그라티온 왕조와 이베리아 왕국의 옛 왕조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며, 일부 학자들은 기오르기 4세의 부친이자 타마르 여왕의 국서였던 그의 혈통을 드높이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일찍이 디미트리오스 1세의 장녀이며 타마르의 숙모인 루수단에 의해 조지아 궁정에 옮겨져 타마르의 소꿉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타마르는 1184년 왕위에 오른 뒤 1185년 류리크 왕조 출신의 유리 보골류프스키와 결혼했다. 유리는 노련한 군인이었지만 방탕했으며, 그녀를 우습게 여기고 조지아 왕권을 자기가 행사하려 들었다. 심지어 여왕을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학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이혼할 기회를 노렸다. 마침 총대주교이자 최고 대신이었던 미하일 2세 미리안니스제가 사망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자신의 지지자인 안톤 그놀리스타비제를 임명하고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하급 귀족들을 궁정 고위직으로 끌여들었다.
1187년, 타마르는 귀족 평의회를 소집해 남편이 매일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동성애를 즐기며 성적 고문을 일삼으니 이혼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평의회는 이혼을 허가했고, 유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1191년, 유리는 조지아로 잠입하여 바르단 다디아니, 구잔 아불라니스제, 봇소 자켈리 등과 동맹을 맺고 조지아 남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녀는 감레켈 토렐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반란군은 트모그비와 에루셰티 전투에서 완패했다. 유리는 항복한 뒤 여왕에게 용서받았다. 그 후 그녀는 두번째 남편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하고, 1191년 그를 남편으로 지명했다. 1194년 유리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카케티 지방을 침공하자, 그가 토벌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캄베차니 전투에서 유리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유리는 트빌리시의 루르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명목상 아내와 왕좌를 공유했지만 실제로는 충실한 신하로 행동했다. 1195년, 그가 이끄는 조지아군은 엘테네즈 토후국의 에미르 아부 바카르를 샴키르 전투에서 격파하고 샴키르 시를 함락했다. 1203년 또는 1204년, 룸 술탄국의 통치자 술레이만샤 2세는 에미르들을 소집해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는 타마르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단순한 여왕"이라 부르면서, 그녀가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아내로 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여노예로 삼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타마르는 군대를 소집하여 남편을 사령관으로 삼은 뒤 교회 발코니에서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가족과 교회를 수호하라고 연설했다.
이후 출정한 그는 바시아니 전투에서 슐레이만샤 2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트라페준타, 림니아, 삼순, 시놉, 케라순트, 코타오라, 헤라클레아 등 여러 해안 도시를 점령했다. 이중 트라페준타엔 타마르의 조카 알렉시오스가 자리를 잡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선포한 뒤 조지아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다.
그는 타마르 여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기오르기 4세와 딸 루수단을 낳았다. 1207년 그가 사망한 뒤 기오르기 4세가 어머니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1213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단독 왕으로 등극했다. 1223년 기오르기 4세가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뒤 루수단이 여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