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17:57:49

도키 요리토

土岐頼遠
(미상 ~ 1342년)

1. 개요2. 생애3. 도키 씨의 이후

1. 개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친 무장으로 이른바 '바사라 다이묘(婆娑羅大名)'[1]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도키 요리토는 아버지 요리사다(頼貞)와 함께 처음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호조 도쿠소 및 로쿠하라 단다이를 섬겼지만, 나중에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에 호응하여 반 가마쿠라 막부 측으로 돌아섰고,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섬기며 그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무장으로서 공을 세웠다.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2]의 타타라하마 전투에서는 기쿠치 다케토시, 교토에서는 닛타 요시사다,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의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의 아오노가하라 전투, 와키야 요시스케[3]와의 전쟁 등 북조측의 무장으로서 남조과의 싸움에 여러 차례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태평기』에 의하면, 요리토가 현지 미노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아오노가하라 전투에서, 아키이에가 이끄는 대규모 오슈 군세(50만 기라고도 한다) 대군을 상대로 아시카가측의 다른 부대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요리토는 정병 1천 기(騎)를 이끌고 귀신같이 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아시카가군은 패전했고, 요리토도 일시 행방불명이 되었다(나중에 귀환). 다만 이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게 커서, 훗날의 진군 경로 전환, 나아가 아키이에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여겨진다. 태평기 안에서 요리토의 무명(武名)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문을 이어 받아 도키 집안의 가독이 되었고, 미노의 슈고로 취임하여, 본거지를 도키에서 아쓰미로 옮기고 슈고쇼를 나가모리 성(長森城)으로 정했다.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앞서 에치젠에서 북조측에 패해 미노의 네오 성(根尾城)에서 농성하던 와키야 요시스케를 9월 19일에 조카 도키 요리야스[4] 등과 함께 쳤다. 와키야 요시스케는 오와리(尾張)로 달아났다.

이후에도 각지를 전전하며 북조-아시카가 쇼군가를 위해 싸우며 거의 무로마치 막부의 '창업공신'에 준하는 숱한 전공을 세우고 무장으로써의 이름도 높아졌지만, 그로 인해 드높아진 자신의 위세를 내세워 여기저기서 교만하게 굴며 뻐기고 다니는 등 처세에는 그리 밝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고코쿠 3년/고에이 원년(1342년) 9월 6일 사냥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고곤 원(光嚴院)[5]의 행차와 마주쳤다.

고곤 상황의 어가를 수행하던 수행원들은 당연히 "원(院)의 행차요, 이 무슨 무례인가? 썩 물러나시오."라고 외쳤지만, 술에 취해서 돌아오는 길이었던 도키 요리토나 그의 수행원들은 고곤 원의 행차라는 수행원의 말을 듣고도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원(인)인지 개(이누)인지[6] 그딴 거 난 모르겠고,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건방지게 물러나라 마라야. 개라면 이렇게 해 줘야지!"라면서 고곤 상황이 타고 있던 우차를 발로 걷어차고, 사냥감을 몰듯이 어가 주위를 말을 타고 빙빙 돌면서 을 쏘아대기(!)까지 했다.

당시 쇼군 다카우지의 동생으로 막부의 정무를 맡고 있던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이 소식을 듣고 제대로 격노하여 요리토 체포를 명한다. 요리토는 일단 자신의 본거지 미노로 도망쳐서 모반을 꾀했지만 실패했고, 선종 승려 무소 소세키(夢窓疎石)[7]가 있는 임천사로 도망쳐 구명을 탄원했다. 또 곳곳에서 "도키 요리토가 인에게 한 짓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는 전공이 높은 자이니 이번 한번은 특별히 살려 주시라"는 구명 탄원이 잇따랐지만[8]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요리토가 한 짓은 명백히 강상죄이고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대신 그의 자손까지는 연좌시키지 않겠다"며 기어이 도키 요리토에 대한 처형을 명령했다. 도키 요리토는 임천사를 포위한 막부군에 체포되어 연행, 12월 1일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애초에 요리토 같은 바사라 다이묘들에게는 많든 적든 조정 등 기존의 권위를 얕보는 풍조가 있었고, 황실이나 지사(寺社)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당시에 널렸지만, 도키 요리토가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것은 고곤인이 타카우지의 막부와 북조 조정의 대의명분을 보장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조적(朝敵)으로 몰린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쇼군으로 임명되고 재기할 명분을 얻은 것도 고곤 천황의 선지에 의해서였고[9] 고곤 상황이나 그가 원정을 행하고 있는 고묘 천황은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에 맞서기 위한 북조 조정의 중심이자 타카우지의 존립 근거였는데, 도키 요리토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고곤 상황의 권위를 흔들 수 있는 행위였고, 동시에 무로마치 막부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다요시는 형이자 쇼군인 타카우지와 무로마치 막부, 그리고 북조 조정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창업공신을 쳐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법명은 승선사각연대오(乗船寺覚然大悟)로, 일본 기후 현 기후 시 데치카라오 신사(手力雄神社)에 있는 보협인탑(宝篋印塔)이 도키 요리토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무장으로서의 활약이 많지만 문화인으로서의 측면도 있어서[10] 『신천재화가집』 · 『신습유화가집』 · 『신후습유화가집』에 도키 요리토가 읊은 와카가 실려 있다.

3. 도키 씨의 이후

도키 씨는 혼세(本姓)를 겐지로 하는 미노 겐지(美濃源氏)집안으로, '라이코우'라는 음독으로 유명한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의 7대 손인 미쓰히라(光衡)가 미노의 도키 군(土岐郡)에서 거주하게 되면서 도키를 묘지로 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요리미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요리(賴)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도키 요리토가 처형된 뒤, 다다요시의 말대로 도키 요리토의 자손은 연좌를 면했지만, 미노 슈고 도키 씨의 가독은 요리토의 조카 도키 요리야스에게 계승되었으며, 요리토의 아들들은 아쓰미 군 옆 혼쇼 군(本巣郡)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토착하였다고 전한다. 요리야스는 아들이 없어서 조카인 야스유키(康行)를 양자로 들여서 가독을 이었는데, 야스유키가 쇼군 요시미쓰(義満)에게 토벌을 당해 기존에 도키 집안이 슈고로 거느리고 있던 오와리 ・ 이세(伊勢)의 슈고직을 잃었다(도키 야스유키의 난).

요리야스의 다른 형제인 요리타다(頼忠)가 미노 슈고로 임명되고 도키 가문을 이어나갔지만, 이후에도 미노 안에서 가신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다. 요리마스(頼益) - 모치마스(持益) - 나리요리(成頼) - 마사후사(政房)의 대를 거쳐 요리노리(頼芸)[11] 대에 가신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에게 쫓겨나기에 이른다.

혼노지의 변으로 유명한 아케치 미츠히데가 바로 도키 집안 출신이라고 하는데[12] 아케치 씨가 도키 집안의 분가이긴 하지만 막상 사료에는 미츠히데 이 사람의 부모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1차 사료가 없고[13] 미츠히데 진짜 아케치 씨가 맞긴 한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1] 기존의 상하 존비 질서를 무시하고 화려한 복장과 사치스러운 행동거지를 즐기는 미의식을 가리켜 '바사라'라고 한다. 바사라는 불교 용어인데 어쩌다가 이런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이런 바사라 다이묘들은 대체로 실력주의를 내세워 기존의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나아가 공가(公家)나 천황 같은 이름뿐인 당시의 권위를 가볍게 보고 반발, 조소하는 풍조가 강했다. 전국 시대의 '하극상' 풍조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2] 엔겐은 북조의 연호이고 겐무는 남조 고다이고 천황의 연호이다. 아시카가 타카우지와의 협상으로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에게 양위한 뒤, 고다이고 천황은 나라의 요시노로 달아나서 자신은 양위한 적이 없고 여전히 천황이며, 고곤 천황에게 넘긴 삼종신기도 사실은 가짜이고 내가 가진 것이 진짜이니 내가 바로 정통 천황이라고 선언한 뒤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3] 닛타 요시사다의 동생이다.[4] 요리토 자신의 형인 요리키요(頼清)의 장남이다.[5] 원(院)은 일본에서 상황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고곤 천황은 1333년에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고묘 천황에 대해 원정을 행하고 있었다.[6] 일본말로 개를 '이누'라고 하는 것에 빗대서 상황을 개라고 조롱한 것이다.[7] 선종 승려로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개인적으로 귀의하고 있었다. 도키 요리토 본인도 그를 미노로 초빙하여 가모 군에 묘락사 · 동광사를 창건하기도 했다.[8] 사건이 벌어진 게 9월인데 처형은 12월 1일에 집행됐을 정도니 막부 안에서도 도키 요리토의 처형에 대해서 말이 많이 나왔던 모양이다. 이런 걸 보면 인망은 확실히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9] 고곤 천황은 지묘인통의 천황으로써 가마쿠라 시대에 치천의 군 자리를 놓고 대립하던 다이카쿠지통 출신의 천황 고다이고 천황과는 라이벌 관계라고 할 수 있다.[10]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바사라 다이묘의 특징이기는 하다. 대표적으로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창업공신 가운데 한 명이었던 오미 슈고 사사키 도요.[11] 읽는 방법이 요리노리(よりのり), 요리아키(よりあき), 요리나리(よりなり), 요리요시(よりよし)로 다양해서 이거다 하고 정해진 게 없다. 보통은 요리요시로 읽는 법이 알려져 있는데,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의 영향인 듯하다.[12] 혼노지의 변이 벌어지기 전에 아타고 신사에서 공물 바치고 지은 하이쿠 "지금 이때는 / 비가 밑을 적시는 / 5월이로다(時は今 雨が下しる 五月哉)"가 유명하다. ときはいま あめがしたしる さつきかな는 "토키(土岐)는 일본어로 '지금 이때', 천하(天が下→天下)를 지배하는(知る→支配する) 5월이로다"로도 해석될 수 있어서, '도키 출신인 내(미츠히데)가 바야흐로 이 5월에 천하를 얻겠다', 다시 말해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13] 미츠히데 본인은 미츠(光)를 집안 대대로 써왔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에도 시대 족보의 기록이고, 정작 도키 아케치 씨 사람 중에 '미츠'를 돌림자로 쓴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