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돔놀 2세 Domhnall II |
출생 | 1305년 이전 |
스코틀랜드 왕국 마르 백국령 | |
사망 | 1332년 8월 11일 |
스코틀랜드 왕국 더플린 무어 | |
아버지 | 가르트나트 |
어머니 |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의 딸 |
부인 | 이사벨라 스튜어트 |
자녀 | 토머스, 마거릿 |
직위 | 마르 백작 |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데이비드 2세의 호국경을 맡다가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쳐들어온 잉글랜드 귀족들과 맞서 싸우다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아버지 가르트나트는 스코틀랜드의 마르 백작으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경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어머니의 신원은 불확실하나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1]의 딸로 추정된다. 130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매우 어린 나이에 마르 백작이 되었고, 1306년 잉글랜드군에 의해 신원이 확보된 뒤 브리스톨에 보내져서 그곳 주교의 보살핌을 받았다. 1314년 6월 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에게 완패한 뒤 다른 스코틀랜드 포로들과 함께 석방되었지만, 그는 잉글랜드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했다. 1322년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과 함께 스코틀랜드군에 맞섰다.1322년 3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 편에 서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반란군을 상대로 보로브리지 전투에서 맞서 싸워 승리에 일조했으며, 에드워드 2세의 포로로 잡힌 적 중 한 명인 초대 배들스미어 남작 바르톨로뮤 드 배들스미어를 캔터베리로 데려가는 임무를 수행했다.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스코틀랜드로 넘어갔고, 스탠호프 전투 때 스코틀랜드 3개 부대 중 하나를 이끌어 로저 모티머의 잉글랜드군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1329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병사하고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로버트 1세의 친구이자 전우였던 초대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호국경을 맡았으나 1332년에 사망했다. 1332년 8월 2일, 퍼스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귀족 회의에서, 돔놀 2세는 새로운 호국경에 선출되었다. 얼마 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운 잉글랜드 귀족 헨리 드 보몽, 헨리 퍼시, 월터 매니, 토머스 우트레드 등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오자, 그는 이들을 격퇴할 임무를 맡았다.
돔놀 2세는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인은 포스만 북쪽 부분을 경비했고, 포스만 남쪽 부분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가 맡았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전에 마르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 되기를 바라며 8월 6일 포스만 북부의 웨스터 킹혼(현재 스코틀랜드 번티스랜드)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이 한창 상륙하고 있을 때, 로버트 1세의 사생아인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와 파이프 백작 던컨 4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잉글랜드 연대기는 최소 4,000명, 최대 24,000명으로 기술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4,000명이 가장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선 중이던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와 지원 보병을의 공격을 받은 후 격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상륙에 성공했다.(킹혼 전투)
돔놀 2세는 잉글랜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퍼스로 철수한 뒤 킹혼 전투의 생존자들과 합류하면서 전국에 파발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발리올과 헨리 드 보몽은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 덤펌린으로 이동해 식량을 확보하고 무기고를 확보한 뒤 퍼스로 진격했다. 이에 돔놀 2세는 퍼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에르네 강 북쪽 기슭에 군대를 배치하고 다리를 파괴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군대는 연대기 상에서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기술되었는데, 역사가 클리퍼드 로저스는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군의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8월 10일, 잉글랜드군은 에르네 강 남쪽 강둑에 도착했다. 당시 그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의 10배 이상이었고, 강 건너편에 유리한 방어 위치에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지원군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잉글랜드군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군은 해질 무렵까지 에르네 강 반대편에 나란히 주둔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이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배넉번 전투에서의 승리를 회상하고 잉글랜드인에 대한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파괴된 다리 인근에 경비원이 배치되었지만 다른 예방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해가 뜰 때 강 건너편으로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의 측면을 요격하여 혼란을 일으킨 뒤, 적이 패주할 때 추격하여 섬멸해버리기로 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계속 대치하고만 있으면 승리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어둠을 틈타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날 밤, 잉글랜드군 전체가 몰래 강을 건넌 뒤 자정 무렵에 스코틀랜드 숙영지에 도착해 공격을 퍼부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스코트랜드인들은 급히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주력군을 패주했다고 믿었지만, 새벽에 스코틀랜드군이 자기들을 향해 2개 대열을 결성한 채 접근하는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한 장성이 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라고 연설했다. 이 장수의 이름은 연대기마다 다르게 기술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잉글랜드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40명의 용병 기사를 제외하고 전원이 도보로 대열을 결성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보병은 3개의 조밀한 대열로 줄을 섰고, 장창을 든 나머지 보병은 4번째 대열에 위치했다. 보병대는 언덕이 많은 지형으로 좁아지는 계곡 중앙을 점령했고, 장궁병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언덕에 나뉘어 측면에 배치되었다. 기병대는 후방에 남겨졌다.
스코틀랜드인들은 2개의 조밀한 그룹으로 나뉘어 쉴트론[2]을 결성했다. 돔놀 2세는 잉글랜드군에 항복을 권유하려 했지만, 쉴트론 한 부대를 이끌고 있던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가 "당신이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그가 에드워드 발리올과 서신을 주고받는 정황을 알고 있으며, 잉글랜드군이 몰래 강을 건너는 걸 일부러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돔놀 2세는 결백을 호소하면서, 이글랜드군을 공격하는 첫번째 사람이 되어 충성심을 입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브루스는 상대보다 앞서 나가기로 했고, 그 결과 두 쉴트론은 상대보다 먼저 적에 접근하여 무찌르려고 경쟁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군이 적에게 빨리 달려가려고 경쟁하다 보니, 속도가 느린 전사들은 뒤쳐졌고 대열이 흐트러졌다. 이윽고 로버트 브루스와 800명만이 적진에 도착해, 잉글랜드군 중앙 보병대를 10야드(9m) 뒤로 밀어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무너지지 않고 계속 버텼고, 측면에 배치된 장궁병들이 스코틀랜드 장병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일반적으로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거나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없는 투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가 화살에 취약했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중앙으로 밀집했고, 이로 인해 쉴트론의 이동 반경이 제약되었고, 중앙에 몰린 스코틀랜드인들은 무기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으며, 균형을 잃고 넘어진 자들은 즉시 짓밟혔다.
한편, 마르 백작 돔놀 2세가 이끄는 쉴트론 역시 문제가 생겼다. 그들 역시 서두르는 바람에 조직력이 흐트러져 구불구불한 평야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횡대열로 이동해야 했고,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브루스의 쉴트론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한 자들이 뒤엉키면서, 스코틀랜드군의 혼란은 한층 더 심해졌다. 잉글랜드보병대는 그런 그들을 손쉽게 해쳤고, 장궁병들도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 보병들은 아직 살아있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시체 산더미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결국 스코틀랜드군의 저항은 무너졌다. 살아남은 귀족은 말을 타고 도망쳤고, 나머지 스코틀랜드인은 도보로 달아났다. 후방에 배치되었던 잉글랜드 기병대는 말을 몰아 해가 질 때까지 추격해 도망치는 적병들을 살해했다. 이때 돔놀 2세는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제2대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전사했다.
3. 가족
- 이사벨라 스튜어트: 본킬의 기사 알락산더르 스튜어트의 딸.
- 토머스(1330 ~ 1377): 마르 백작. 1351년 잉글랜드의 포로인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스코틀랜드 대표 3인 중 한 명이었고, 1357년 데이비드 2세가 풀려났을 때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넘겨진 인질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때 동행했으며, 잉글랜드와 협상하는 임무를 맡은 스코틀랜드 대사로서 활동했다.
- 마거릿(? ~ 1391): 형제 토머스가 사망한 뒤 마르 여백작이 되었다.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의 부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