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넉번 전투 영어: Battle of Bannockburn | ||
시기 | 서기 1314년 6월 23일 ~ 6월 24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스털링 주 배넉번 | |
원인 |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 |
교전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로버트 브루스 에드워드 브루스 토머스 랜돌프 로버트 2세 키이스 제임스 더글러스 | 에드워드 2세 험프리 드 보헌 에이머 드 발랑스 길버트 드 클레어† 로버트 드 클리포드† |
병력 | 총원: 약 5,000 ~ 8,000명 | 총원: 약 20,000 ~ 25,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전사자: 11,700명 포로: 500명 |
결과 | 스코틀랜드의 승리와 독립 쟁취 |
1. 배경
스코틀랜드군은 폴커크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왕위를 계승받은 에드워드 2세가 1309년과 1310년, 2차례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의 청야전술에 휘말려 큰 소득 없이 철군해야 했다.스코클랜드의 전략은 큰 효과를 발휘하여 잉글랜드는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차츰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꼴이 되어버린다. 잉글랜드에 비해 미약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스코틀랜드군으로써도 잉글랜드의 주력군이 상대가 아니라면 전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점차 스코틀랜드 지역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된다. 스코틀랜드군은 급기야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고, 이에 대응하여 잉글랜드가 주력군을 편성하여 북진하면 스코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산지로 도주하고 잉글랜드군은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다 지쳐 돌아가는 상황이 1314년까지 반복되었다.
크고 작은 승리를 반복하면서 전력을 비축하고 대대적인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로버트 브루스의 스코틀랜드군의 전력은 날이 갈 수록 증강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은 하나씩 로버트에게 넘어가고 있었고 1314년 3월에는 스코틀랜드군이 에든버러 성을 함락시키며 스코틀랜드 내부의 잉글랜드 영토는 오직 보즈웰과 스털링 성만 남아있게 되었다.
잉글랜드가 그동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까닭은 당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간의 대립이 거의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2세가 내부 정리에 힘을 쏟는 사이, 스코틀랜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고 그 사이 브루스의 스코틀랜드군이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그런데 1313년 10월, 이사벨라 왕비의 중재로 잉글랜드 귀족들이 형식적으로나마 국왕에게 사죄하고 에드워드 2세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잉글랜드의 극심한 내부 갈등이 임시적으로 봉합되었다.
내부의 문제를 얼추 해결한 에드워드 2세는 이제 스코틀랜드에 역량을 제대로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다시는 활개치지 못하도록 당대 최강의 정벌군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는데, 상당한 전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고 그 사이 스코틀랜드군이 스털링 성을 포위했으며, 성 수비대가 스코틀랜드군 사령관인 에드워드 브루스와의 합의 하에 1314년 6월 24일까지 지원군이 오지 않을 시 항복하겠다는 협상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긴박한 상황을 감안하여 에드워드 2세는 완비되지 않은 부대를 이끌고 친히 출진한다. 잉글랜드의 준비가 완전하지 못한 것은 스코틀랜드군에게 다행인 일이었으나, 문제는 완비되지 않은 잉글랜드군의 숫자가 무려 2만 5천. 당시 한창 기세가 오르던 스코틀랜드군의 숫자는 8천으로 에드워드 2세가 미처 완비하지 못한 잉글랜드군의 숫자가 로버트가 전력으로 끌어모은 스코틀랜드군 3배에 달했던 것이다.[1]
스코틀랜드의 로버트는 당연히 스털링 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했어야 했으나 아군의 내부 사정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당대 로버트가 이끌던 스코틀랜드의 게릴라 전술은 이 시점에서는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패배가 없지만 결정적인 승리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잉글랜드군만 보면 도주하기만 하니 로버트 휘하의 스코틀랜드 영주들의 불만이 누적되어왔다. 에드워드 2세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던 시점에서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로버트를 불신하며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기에 로버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스털링 성의 포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잉글랜드 지원군과 전면전을 펼쳐 그들을 분쇄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3배 이상의 수적 우위를 갖춘 적을 상대로 무턱대고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는 벌이지만, 주력군 사이의 전면전은 피하고 공격을 감행할 기회를 노린다는 것을 목표로 뉴 파크 숲 입구와 배넉번 강이 흐르는 늪지 사이에 진을 구축하고 잉글랜드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바야흐로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최대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2. 전개
1일째
스코틀랜드의 전초부대는 잉글랜드군의 접근을 확인한 뒤, 철수하여 본대로 복귀하였다. 이미 날이 늦은 터라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것이라 여겨졌으나, 후퇴하는 스코틀랜드 전초부대를 추격해온 잉글랜드의 전위부대가 돌연 스코틀랜드 본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잉글랜드 전위부대의 공격은 맹렬하여 헨리 드 보헌이라는 잉글랜드군 기사가 무려 로버트 1세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일까지 있었다. 왕이 직접 칼을 휘두르는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로버트는 드 보헌의 랜스를 피한 뒤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찍어 죽여버려 건재함을 과시함으로써 스코틀랜드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다만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으므로 함께 참전한 가신들과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로버트에게 무모했다며 질책했다.
드 보헌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군 기병대가 두 방향으로 나뉘어 돌격을 개시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이 빽빽한 밀집장창벽(쉴트론)을 꾸려 방어선을 형성하였고, 전장인 배넉번이 습지 지형이라 기병대의 돌진은 실패하고 곧 패퇴하였다. 잉글랜드군은 한번 패퇴한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돌격을 연속적으로 개시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2일째
첫날의 패배 이후 잉글랜드군은 수적으로 불리한 스코틀랜드군이 선제공격을 걸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잠시 공세를 멈추고 전황 파악에 나섰다. 그런데 숲에 숨어있던 스코틀랜드군이 뛰쳐나와 공격을 개시했고, 잉글랜드군의 대응이 늦은 사이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사격을 개시하며 보병의 돌진을 엄호했다. 스코클랜드의 궁수들은 잉글랜드의 장궁병대에 의해 곧 무력화되어 후퇴했으나 그 사이 스코틀랜드 보병들이 창끝을 겨누며 잉글랜드군 목전까지 다다랐다.
이에 대응하며 잉글랜드군은 중기병대를 내보냈으나 스코틀랜드 보병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빽빽한 창날의 벽을 세워 맞섰고 잉글랜드 기병대는 격퇴당하고 만다. 이 광경을 지켜본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는 총공세를 개시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잉글랜드군은 개울과 잡목들로 가득한 배넉번의 지형에 묶여 진형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고, 선두의 기병대와 보병대가 얽혀 혼란까지 빚어지고 있던 탓에 수적 우위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는 전황이 악화되자 장궁병대를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강력한 잉글랜드 장궁병에 의해 스코틀랜드군은 큰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이대로는 폴커크의 참패가 다시 재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그간 아껴둔 기병대를[2] 본격적으로 투입시켜 잉글랜드 장궁병대를 향해 돌격시켰다. 몇 번의 패퇴로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대응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을 덮치자 궁병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와해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군은 지속적으로 전황을 우세하게 가져가고 있었으나, 2만에 달하는 잉글랜드군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병력을 가진 터라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잉글랜드군은 연이은 패퇴에도 수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예비대까지 모두 투입한 스코틀랜드군으로서는 이제 최후의 공세를 펼쳐야만 했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장궁병대에 패퇴하고 물러나 있던 자신의 궁수대를 다시 투입했다. 이들이 잉글랜드군 머리 위로 화살을 퍼붓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보병대가 정면에서 시간을 벌었고,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우회하여 잉글랜드군의 후미를 강타하자 잉글랜드군은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곳곳에서 붕괴되다 결국 전장에서 패주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이 모두 도주한 전장에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내지른 거대한 승리의 함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폴커크 전투의 참패 이후 14년 만에 스코틀랜드군이 야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것이었다.
2.1. 승리의 원인
스코틀랜드는 모든 면에서 잉글랜드한테 열세였다. 스코틀랜드 보병대는 잉글랜드 보병과 정면으로 맞붙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문제는 수적으로만 이미 3배 열세. 궁병과 기병도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잉글랜드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3]비교할 가치도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열세인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정면에서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각 부대 사이의 유기적인 협동공세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군 보병의 밀집 장창벽(쉴트론)은 잉글랜드 중기병대도 격퇴할 만큼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했고, 클랜 중심의 무장화된 수렵, 목축 사회에서 징발된 하이랜더를 주축으로 한 켈트식 보병들의 충격력 또한 대단했으나, 잉글랜드군 장궁병들에게 심각할 정도로 취약했다. 특히 잉글랜드군 장궁병대는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좋은 무기를 지닌 정예 궁수들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4] 동일한 숫자라고 해도 불리한 상황인데 수적으로도 잉글랜드가 우세하니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사격전에서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보병대가 잉글랜드 장궁병의 공격을 견디면서 접근만 하면 승산이 있었으나,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잉글랜드는 정예 장궁병대 이외에도 강력한 기병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국토 대부분이 평야인 잉글랜드는 기병 양성이 쉬운 환경이었고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할 경제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가지고 있어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육성된 중장갑 기사단까지 다수 동원할 수 있었다.[5][6]
반면 스코틀랜드는 지역 상당수가 산지로 이루어져있어 기병을 양성하기는커녕 사람이 먹을 곡식을 수확할 농경지도 충분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기병을 육성하는 것도 어렵고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보니[7]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중무장보다는 기동성을 강화한 경무장 기병대로 게릴라전이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대한 약탈 공격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8][9]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더 브루스는 이런 절망적인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아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여 잉글랜드군의 부대를 나누어 차례차례 격파하고 최종 국면에서는 보병-기병-궁병의 총공세로 잉글랜드군의 숨통을 끊었다. 유기적 협동과 총공세는 말이 쉽지 통신 수단도 제한적인 시대에 사방으로 나누어진 아군 부대들이 올바른 위치에서 정확한 시기에 공격과 방어를 맞추어 수행하도록 조율하는 것은 대단히 난해한 작업이다.[10]
로버트 1세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적을 이루어냈다. 휘하 부대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스코틀랜드군의 위협인 잉글랜드 장궁병의 견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스코틀랜드측의 우위인 보병의 돌격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밀착시켰고, 또 이 과정에서 주력인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열악한 궁병대를 방패로 내세우는 등. 상대와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모든 상황에 맞추어 주도면밀하게 대응한다는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다. 가히 교과서적인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는 무능에 가까운 졸렬한 지휘를 거듭하였다. 애초에 전장의 환경이 개울과 잡목이 많아 잉글랜드의 최정예 기병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는 장소였음에도 군대를 진입시켰고, 여기에 아군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수적 우위만을 믿고 전투를 개시하기까지 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적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 아래 싸움에 임했으니 어찌보면 잉글랜드의 패배는 예정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결과
스코틀랜드의 독립.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의 공격을 받는 가운데 국왕의 근위대가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겨우 목숨을 건져 전장에서 도주할 수 있었다. 허나 전투의 결과로 스털링 성이 항복하면서 스코틀랜드 내부의 거점을 모두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기사 1천 이상, 보병대의 절반 가량을 잃어 다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세를 취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에드워드 2세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국정의 주도권이 의회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의회는 난국에 빠진 잉글랜드의 위기를 타파할 능력이 없었고, 친국왕파와 반국왕파 사이의 권력다툼은 더욱 심각해졌으며, 여기에 전 유럽을 휩쓴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정이 혼란에 빠지기에 이른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극한의 다툼 끝에 반왕파 세력과 내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나 간신을 총애한 끝에 인망을 잃어 끝내는 아내와 아들의 손에 왕위를 잃고 유폐되어 의문사를 당하고 만다.
배넉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인 독립 상태가 되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 이후 14년 만의 야전에서 거둔 결정적 승리로 인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불안정한 왕위를 굳건히 하게 되었고 그 이전 폴커크 전투의 패배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스코틀랜드인들의 사기도 충만해졌다.
이후 잉글랜드가 1328년 에든버러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다.
배넉번의 전장을 내려다 보는 로버트 브루스의 동상 |
4. 대중매체에서
1968년에 나온 민중가요이며 현재 스코틀랜드의 국가인 <Flower of Scotland>는 바로 이 배넉번 전투를 소재로 쓰였다.영화 브레이브 하트 마지막 장면에서 "1314년 스코틀랜드는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라고 나오는 대사는 이 전투의 승리를 의미한다.
2018년 넷플릭스에서 로버트 1세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한 영화 아웃로 킹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투인 라우든 언덕 전투는 사실상 배넉번 전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전투가 하루 안에 벌어지는 점을 제외하면 밀집 장창병진의 위력과 습지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중장기병 등 상당히 전사 고증이 잘 되어 있다.[11]
문명 6에서 스코틀랜드 문명의 지도자로 로버트 1세가 등장하는데, 지도자 특성 이름이 배넉번이다. 해방 전쟁을 치를 때 보너스를 얻는, 배넉번 전투의 의의가 반영된 효과이다.
같은 이름의 칵테일이 존재한다. 스카치 위스키 1oz에 토마토 주스 3oz, 우스터셔 소스 1dash를 셰이크하고 하이볼 글래스에 담아낸 후 저민 레몬으로 장식하면 완성. 블러디 메리와 비슷한 레시피지만 기주가 다르기에 맛도 상당히 다르다.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인의 영혼, 토마토 주스의 붉은 빛깔은 잉글랜드인의 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1] 더구나 에드워드 2세의 잉글랜드군이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들도 아니었다. 잉글랜드가 자랑하는 장궁병대에 중기병대까지 보유하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잉글랜드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2]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중무장도 아니고 숫자도 적어서 잉글랜드 기병대와 정면대결을 벌일 수 없었기에 후방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3] 스코틀랜드의 궁병대는 2일차 전투에서 기습적으로 선공을 개시했으나 잉글랜드 장궁병대가 반격을 개시하자 곧 패퇴하고 말았고, 스코틀랜드의 기병대는 아예 대적조차 불가능하여 처음에는 전장에 내보내지도 않았다.[4] 인구도 경제력도 잉글랜드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궁병의 숫자도 많고, 좋은 무기와 훈련을 받아 정예병 육성 또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5] 다만 잉글랜드 왕국의 프랑스 영토는 왕국의 국력을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했으나 반대로 왕국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요소이기도 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잉글랜드의 프랑스 영토를 두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 사이에 격렬한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6]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 에드워드 1세 시대에도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프랑스 지역의 잉글랜드 영토를 두고 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에드워드 1세의 조부 존 왕 시절에 프랑스의 잉글랜드 영토 상당수를 잃은 이후 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 지역에 남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상당한 국력을 쏟아야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스코틀랜드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던 걸 보면 잉글랜드의 체급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7] 잉글랜드 왕국과 갈등을 빚고 있던 프랑스 왕국이 간간히 자국 기사단을 스코틀랜드에 파견해주긴 했으나 지리적인 문제로 많은 숫자가 지원되지 못했고 애초에 스코틀랜드는 중무장 기병대를 유지할 경제력도 없었다.[8] 당대 스코틀랜드군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게임 토탈 워 시리즈 중 하나인 미디블2: 토탈 워의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 귀족, 귀족 검병대, 귀족 장창병 같은 충격 보병계열은 게임 내 최강급 중 하나로 우월한 국력의 잉글랜드 보병보다 강력하지만 궁병이나 기병들은 제대로 된 게 거의 없다(...). 기병은 공용 유닛인 봉건 기사대가 끝이고, 스코틀랜드 하이랜더 귀족 궁병대는 원거리 사격보다 근접 공격이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지경.[9] 다른 게임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역사적인 고증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숙적 잉글랜드에 비해 인구나 세수 차이가 3분의 1에서 5분의 1까지 벌어져있다. 외교적 수단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부터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극한의 하드코어 플레이가 강요된다.[10] 서기 533년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반달 왕국군은 로마 제국군에 맞서 부대를 나누어 로마군의 3면을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가 부대 사이 상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가 각개격파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는 열강 이탈리아 왕국군이 에티오피아 제국군을 상대로 비슷한 전술을 벌이려다 거의 똑같은 이유로 참패. 아군부대를 나누어 각기 능동적인 작전을 벌이는 것은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성공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11]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실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일단 잉글랜드군에 장궁병이 등장하지 않고, 스코틀랜드군이 순차적으로 잉글랜드군 기병, 장궁병, 보병들을 제압했던 역사와 달리 초반부 기사단 돌격을 장창 방진으로 막았던 것은 비슷하지만 후에는 난전만 지속되다가 스코틀랜드군이 이기는 다소 맥빠지는 연출이다. 특히 에드워드 2세는 후방에서 지휘했지 영화처럼 본인이 직접 기사단 돌격에 나서지 않았다. 다만 이 모든 걸 구현해내려면 제작비가 훌쩍 뛰는 것도 사실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