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이미자의 노래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노랫말에 따온 복면가왕 출연자에 대한 내용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동백아가씨 문서 참고하십시오.
발매 당시의 LP 표지. |
1. 개요
1964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싱글. 장르는 트로트.1960년대 최고의 히트곡으로 평가받으며, 트로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곡이기도 하다. 이미자의 대표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1.1. 가사
1절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2절
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2절
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1.2. 발표 및 경과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1]의 리메이크 작인 1964년 발표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이다. 한산도[2] 작사 백영호[3] 작곡. 스카라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에서 방음장치를 하고,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녹음했다고 한다.[4]이 노래는 국내가요사상 최초로 가요프로그램에서 35주 동안 연속 1위를 기록하여, 25만 장[5]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6] 당시 신인이었던 이미자를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렸던 곡이다.
1.3. 금지곡 지정 및 해금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돌연 이 곡에 방송금지 조치를 해버렸다.[7] 이유는 일본의 엔카와 비슷하여 왜색풍이 짙다는 것. 당시 정부는 한일수교를 추진하고 있었는 데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저항이 심하였던데다가, 관료들이 한일수교를 계기로 일본 문화의 유행을 우려하여 《동백아가씨》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물론 한국의 트로트가 일본의 엔카와 유사하다고는 하지만, 이전의 다른 가수들의 트로트 곡들은 그때까지 이런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서 유독 이미자의 곡들에 시비를 거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외에도 동백꽂이 일본 꽃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다는 설도 있지만 동백나무는 서해, 남해, 동해안, 제주도에 널리 자생하고, 고려, 조선시대에서도 사랑받았던 꽃이라서 말이 안 된다.
또 다른 이유로 가사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라고 한다. 무얼 기다리느냐는 것으로, 기다릴 일이 없으면 마음에 멍들 일도 지칠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 아마도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 후1987년을 계기로 금지곡들이 모두 풀리게 된다.[8]
2. 여담
- 《동백아가씨》의 동백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일하는 술집 이름(동백 B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제목과 내용인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는 별개의 것인 듯.
- 여성 트로트 그룹 아이리스가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로미나가 2009년 한국 외국어대학교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다. 우연히 간 친구의 집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듣고 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접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녀가 부르는 《동백아가씨》 영상이 우연히 유튜브에 올려지면서#[9] 알려지고, 급기야 이미자에게도 알려지게 되면서, 이미자의 수제자가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가요무대 등의 방송 출연은 물론이고, 이미자 콘서트에도 동행하면서 사제지간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 박정희의 생전 애창곡이《동백아가씨》라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이는 1987년에 가서야 해금된다. 박정희 본인은 이 노래를 혼자 있을 때 듣거나 혹은 안가에서 연회할 때 부르곤 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금지곡에 대해서는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 퍼포먼스 내지 희생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0]
- 김형배 의원이 첼리스트와 시민언론 더 탐사의 증언을 토대로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법무부장관과 김&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만난 뒤《동백아가씨》를 청담동의 고급 술집에서 불렀다는 주장을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해당 의혹은 첼리스트가 거짓말을 했음을 실토하며 완전한 허위였음이 드러났다.
[1] 남쪽 섬마을의 처녀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사랑하여 미혼모가 되고 재회, 이별하는 내용.[2] 본명은 한종명.[3] 본명은 백영효.[4] 당시 이미자는 임신 9개월인 만삭의 몸이었다.[5] 당시에는 3천 장도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6] 이 때에 이미자는 집, 전화, 자동차를 구입할 만큼의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전화는 300만 ~ 500만 원이나 할 정도의 재산목록 1호였다고.[7] 정작 박정희는 이미자를 불러다가 이 노래를 시키거나 혼자 몰래 듣곤 하였다고 한다.[8] 당시 금지곡이었던 382곡 중에서 월북 작가의 작품이었던 88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에 대한 재심 결과 1987년 8월 18일 《동백아가씨》, 《아침 이슬》, 《왜 불러》 등을 포함하여 재심을 통과한 186곡이 1차로 해금되었다. 이후 1987년 9월에는 499곡이 해제되고, 1988년에는 납북 음악가, 월북 음악가 63명의 곡도 해제되었다. 그리고 1994년 냉전의 역사가 사라지면서 783곡이 추가로 해금되었다.출처[9] 로미나가 그녀의 SNS에 올린 것을 누군가가 유튜브에 올렸는데, 열광적인 반응의 댓글이 올라온 사실을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10] 1960~70년대는 미국 유럽의 최신 문물이 일본을 한 번 거쳐서 도입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고, 이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를테면 "겨우 독립한 나라를 또 뺏기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고 대부분의 투자나 현대문화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실질적인 위기의식이었다. 때문에 박정희 시대 정부는 사회결속의 도구로 북한과 함께 일본도 많이 이용했다. 한국이 이런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전환점은 2000년대 중후반 삼성전자가 일본 전자업계를 압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의외로 얼마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