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푸엔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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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
스페인의 前 축구감독 | ||
이름 | 라푸엔테 Lafuente | |
본명 | 라몬 데라푸엔테 레알 Ramón de La Fuente Leal | |
출생 | 1907년 12월 31일 스페인 왕국 빌바오 | |
사망 | 1973년 9월 15일 (향년 65세) 스페인국 마드리드 | |
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선수(아웃사이드 라이트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바라칼도 CF (1923~1926) 아틀레틱 클루브 (1926~193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34~1936) |
감독 |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1940)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43~1945) | |
국가대표 | 8경기 (스페인 / 1927~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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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전 축구인.2. 생애[1]
2.1. 축구 선수
2.1.1. 클럽
빌바오에서 태어난 라몬 데라푸엔테 레알(Ramón de La Fuente Leal)은 라푸엔테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라푸엔테는 16살이 되던 1923년, 바라칼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26년에는 아틀레틱 클루브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라푸엔테는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호세 이라라고리 등과 스페인 최고 수준의 공격진을 구성했고 그에 걸맞게 아틀레틱 클루브는 이 시기에 리그 3회 우승, 코파 델 레이 4회 우승 등 라리가 초창기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우뚝 섰다. 라푸엔테는 6시즌 동안 211회의 공식 경기[2]에서 64득점[3]을 넣으며 당시 빌바오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라푸엔테는 1934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다소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1935년 코파 델 프레지덴테 데라레푸블리카 8강전에서 라푸엔테는 세비야 FC의 골키퍼 기예르모 에이사기레와 충돌, 다리 경골과 비골의 이중골절[4]로 이듬해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스페인 내전까지 터졌고 라푸엔테는 선수 은퇴를 결정했다.
2.1.2. 국가대표
라푸엔테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27년 4월 17일 산탄데르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였다.라푸엔테는 1935년까지 8경기의 A매치에 출전했고 그 중에는 1934년 월드컵에서의 2경기도 포함되어 있다.
2.2. 감독
1940-41 시즌에 라푸엔테는 리카르도 사모라가 구금되어 공석이 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의 감독을 맡아 10경기를 소화했고 5승 4무 1패의 기록을 남겼다.그 이후 1943년부터 2년간 데포르티보의 감독을 맡았다.
3. 수상
3.1. 클럽
- 아틀레틱 클루브 (1926~1934)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리그 96회, 컵 대회 56회, 지역 대회 59회.[3] 리그 26골, 컵 대회 17골, 지역 대회 21골.[4] 정강이 뼈가 부러진 상태. 의술이 그때와는 상당한 차이가 날 정도로 발달한 현재도 이런 이중골절 판정을 받으면 1년 정도는 피치에 나서지 못한다고 봐야한다. 이런 부상을 입었던 선수를 예로 들면 아론 램지, 이청용, 루크 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