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8 22:49:46

럭스(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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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2. 마지막 빛3. 소녀와 석상4. 우주 / 암흑의 별 스킨 세계관
4.1. 야망의 포옹
5. 구 설정
5.1. 구 배경 15.2. 구 배경 25.3. 리그의 심판

1. 장문

럭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럭산나는 오빠 가렌과 함께 명망 높은 크라운가드 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데마시아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 자리 잡은 크라운가드 가는 대대로 국왕을 수호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럭스의 조부는 폭풍 이빨 전투에서 왕의 목숨을 구했으며, 고모인 티아나는 럭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굴의 선봉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가렌은 소년티를 막 벗었을 무렵 군에 입대해 왕위 수호의 의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했다. 가렌이 떠난 후, 가족들은 럭스가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돕길 원했다. 하지만 럭스는 어릴 때부터 그 일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럭스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탐험하고 싶었다. 데마시아의 성벽 뒤에, 그리고 국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었다. 럭스는 오빠 가렌을 우러러봤지만, 자신에게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라고 말할 때마다 가렌이 미웠다.

가정교사들은 럭스가 크라운가드 가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 일생을 바치도록 지도했다. 하지만 럭스는 그들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거나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심지어 그들도 모르는 지식을 탐구하면서 가정교사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럭스의 삶에 대한 열정과 주변 사람들마저 물들이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가정교사들은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변화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때 마법은 룬테라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고, 생존자들은 마법이 금지된 왕국, 데마시아를 건국했다. 마법의 유혹에 빠져 타락해버린 순수한 영혼들에 관한 전설은 왕국에 널리 퍼져있었다. 실제로 럭스와 가렌의 숙부도 수년 전 추방된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산맥 너머에서는 무서운 소문이 들려왔다. 세상 어딘가에서 마법이 다시 힘을 키우고 있다고...

그리고 어느 날 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럭스는 칼날늑대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럭스의 몸에서 갑자기 강력한 마법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늑대 무리를 궤멸시켰지만, 그 광경을 본 럭스는 두려움에 떨었다. 럭스의 몸에는 크라운가드 가문의 피뿐만 아니라, 데마시아가 두려워 마지않는 마법의 힘도 흐르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악한 존재인가? 감금되고 추방되어 마땅한 혐오스러운 존재인가? 공포와 의구심이 럭스를 사로잡았다. 뭐가 됐건 간에 마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크라운가드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 줄 것이 뻔했다.

가렌이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럭스는 하이 실버미어의 크라운가드 저택에 홀로 남겨질 때가 많았다. 럭스는 점차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마법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마법의 빛을 잠재우려고 애쓰며 밤을 지새우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럭스는 아무도 모르게 마법의 힘을 시험했다. 저택 마당에 내리쬐는 햇살을 조종해 고체화하기도 하고, 빛나는 작은 구체를 만들어 손에 쥐어보기도 했다. 럭스는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16살이 되던 해, 럭스는 아버지 피테르와 어머니 오가사와 함께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에 있는 관사로 갔다. 불굴의 선봉대에 입단하는 가렌을 축하할 목적이었다.

위대한 도시는 럭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도시는 그야말로 모든 백성이 한마음으로 받드는 데마시아 왕국의 숭고한 이념 그 자체였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빛의 사자 수도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궁중 행사에 참여하는 와중에, 럭스는 빛의 사자 수도회의 광휘단 소속 성기사인 카히나와 친해졌다. 카히나는 크라운가드 저택 정원에서 럭스와 함께 훈련하며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럭스가 수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럭스는 전에 몰랐던 역사를 배웠고, 좀 더 다채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데마시아의 방식 외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럭스는 조국을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데마시아가 자신과 같은 마법사들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2. 마지막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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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테르비시아에 지진이 닥쳤다. 땅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면서 쩍쩍 벌어지고 쪼개졌다. 럭스는 애마 불꽃별이를 몰고 무너져버린 망루의 잔해 사이를 달렸다. 사람 키의 네 배는 되는 높다란 백색 석벽이 녹서스의 공성 병기에 몇 주쯤 폭격 당한 것처럼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쓰러진 돌덩이들 틈으로 말을 조심스럽게 몰면서, 푸른색과 흰색으로 된 천막 아래에 꾸려진 임시 치료소로 향했다.

럭스가 일찍이 본 적 없는 규모의 어마어마한 재난이었다. 테르비시아의 건물들은 단단한 화강암과 데마시아산 오크나무로 되어 있었고, 여러 개의 축으로 탄탄히 떠받쳐져 드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의 대부분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온통 먼지에 뒤덮인 사람들이 생존자를 찾아내려고 곡괭이며 삽으로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지만, 그 밑에서는 시체만이 속속 발견되는 중이었다. 도시의 구획을 나누듯 땅을 이리저리 가르는 깊은 균열들 속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고, 예전의 길거리들은 그 밑으로 쑥 꺼져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치료소 앞에 도착한 럭스는 말에서 내리고 천막을 젖혔다. 그녀는 치료사는 아니었지만, 치료에 필요한 물건을 날라주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하다못해 부상자들 옆에 앉아 있기만 하더라도 도움이 될 터였다. 자신은 끔찍한 참사의 현장을 이미 보았으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마음의 각오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천막 안에 줄지어 누워 있는 부상자들은 언뜻 봐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여기저기서 통곡했고, 죽은 아내나 남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건 겁에 질린 채 멍한 눈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아수라장 틈에서 피에 젖은 앞치마를 걸친 채 백랍 물그릇에 손을 씻고 있는 의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럭스는 부리나케 그쪽으로 다가갔다.

“알자르 선생님.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그는 눈물에 젖은 퀭한 눈을 돌렸다. 경황이 없는 듯 그는 잠깐 뜸을 들이고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레이디 크라운가드.”

“럭스라고 부르세요. 어서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참혹한 일에 레이디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끌어들이다뇨.” 럭스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나는 데마시아인이에요. 같은 데마시아인끼리는 서로 도와야죠.”

“옳은 말씀이십니다.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알자르는 지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덕분에 부상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알자르는 그녀를 이끌고 치료소 안쪽으로 더 들어가, 낮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보여주었다. 럭스는 그의 부상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다 으스러지다시피 한 데다 눈에도 붕대를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걸 보니 군인인 모양이었다.

“이분은 구조 작업을 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무너진 집의 잔해에서 한 가족을 다 구출해 내고는,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을 때 하필 두 번째 지진이 일어난 거죠. 옆에 있던 다른 건물이 넘어져서 그 밑에 깔리는 바람에... 폐가 심하게 손상된 상태입니다. 눈에는 유리가 들어갔고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요?” 럭스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만이 아실 일입니다만, 얼마 못 견딜 겁니다. 레이디께서 그의 곁을 지켜주세요. 그러면 베일의 여신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죽어가는 부상자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 메어왔다. 알자르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살 가망이 있는 환자들을 돌보러 떠났다.

“너무 어두워요.” 럭스의 손길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말했다. “맙소사, 아무것도 안 보여!”

“진정해요, 병사. 이름이 뭐지요?” 럭스가 물었다.

“도슨입니다.” 그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던홀드를 구한 영웅의 이름이로군요.”

“예. 아시나 보죠? 옛날에 야만인들하고 싸웠던 사람인데.”

“그럼요, 알다마다요.” 럭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오빠가 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거든요. 같이 전쟁 놀이도 한 걸요. 오빠는 나한테 억지로 프렐요드 해적 역을 시키고, 자기는 도슨 역을 맡았어요. 혼자서 변신괴물들을 물리치고 항구를 지켜냈다는 영웅 이야기가 무척 멋있게 느껴졌던 거겠죠.”

“나도 그 영웅처럼 되고 싶었어요.” 남자가 희미하게 낮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붕대에서 피가 흘러나와 마치 붉은 눈물처럼 보였다. “내 이름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럭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살았어요. 알자르 선생님에게 이야기 다 전해 들었어요. 당신은 데마시아의 진정한 영웅이에요.”

도슨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지더니,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력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왜 아무것도 안 보이죠?”

“당신 눈이...” 럭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눈이... 어떻게 됐는데요?”

“알자르 선생님 말로는, 눈에 유리 파편이 들어갔대요.”

도슨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나는 이제 곧 죽잖아요. 죽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난 마지막으로, 데마시아의... 빛을 보고 싶었...”

도슨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그렇게 말끝을 흐린 순간, 럭스의 안에서 마법의 힘이 꿈틀거리며 고동쳤다. 그녀는 빛의 사자들에게서 배운 대로 주문을 외워서 일단 그 힘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억눌렀다. 그녀는 오랜 세월 훈련을 통해 자기 힘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지금처럼 감정이 격해지면 에너지를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슨의 눈에 감긴 피투성이 붕대에 손을 얹고, 반짝이는 빛의 마법을 손끝으로 내보냈다. 빛은 그의 다친 눈 너머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당신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해줄 수 있어요.”

그녀의 손을 잡아 쥔 도슨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도슨은 자신의 안에 비쳐드는 데마시아의 햇살을 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그가 속삭였다.

3. 소녀와 석상

파일:flesh-and-stone-sketch.jpg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소녀는 조그맣게 되뇌었다.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소녀는 고작 13살이었지만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 가라앉히는데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주문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소녀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여야 한다.

날카로운 눈빛의 보초병이 지키고 있는 도시의 성문을 향해 짐짓 씩씩한 척 걸어가는 소녀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애쓰면서 자꾸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보초병이 그녀를 세운다면 아마 겨우 다잡은 마음이 왈칵 무너져내려 모든 걸 쏟아낼지도 모른다. 그럼 적어도 다 끝나긴 하겠지.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치형 성문을 지나 도시 밖 너른 평야로 향하는 소녀에게 보초병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소녀는 나무가 우거진 산비탈 한쪽에 움푹 들어간 자리를 찾았다. 다시 한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마음 놓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둑이 터지듯 쏟아진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려 내렸다. 이렇게 울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본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마시아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명랑하게 인사를 건네는 쾌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추하고, 너무나 데마시아답지 않은 얼굴이.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눈에 어린 눈물을 닦으며 용기를 짜내 조금 전 사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친구들과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소녀는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이 팔렸다. 현장 작전에 대한 선생님의 지루한 강의보다 후크시아 꿀벌들의 춤이 훨씬 재미있었다. 잘 짜인 군무는 아니었지만 생기 넘치는 무질서가 묘하게 아름다웠다. 벌들의 조화로운 춤에 푹 빠져 기분이 정말 좋다고 느낀 그 순간 갑자기 몸의 중심이 점점 따뜻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익히 아는 온기였다. 보통은 이불에서 빠져나온 깃털을 다시 집어넣듯 온기를 잘 달래 몸 안에 가두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뜨거울 정도로 격렬했다. 전에 혼자 있을 때처럼 열기가 폭발해 무지갯빛으로 온 사방에 퍼질 것 같았다.

갑자기 가느다랗고 하얀 빛줄기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새어 나왔다.

안 돼! 다른 사람이 보면 절대 안 돼! 소녀는 새어 나오는 빛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난생처음 너무 강한 그 힘에 압도되어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교실에서 나가야 했다. 소녀는 일어서서 짐을 챙겼다.

“럭산나,” 선생님이 불렀다. ”너 지금 어디로……”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소녀는 중얼거리며 아무런 설명도 없이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조용한 숲에서 한참 눈물을 쏟고 난 후, 그녀의 발길은 도시 반대편으로 향했다. 소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치를 대가를 생각해보았다. 한 학생이 허락도 없이 교실을 뛰쳐나갔다는 소문이 성 전체에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이런 교칙 위반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그 벌이 무엇이든 그대로 교실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교실에 그대로 있었다면 건물 전체를 눈부신 섬광으로 채우며 폭발하고 말았을 테고 결국 모두들 그녀가 마력이 생기는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거원들이 등장했겠지.

소녀는 마법을 쓰는 이들을 소탕하는 데 쓰이는 신기하게 생긴 장비를 들고 다니는 제거원들을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일단 제거원에게 발각되면 마력을 가진 이들은 왕국 밖 격리촌으로 쫓겨나 격리된다. 그리고 럭스의 가문이 속한 위대한 사회에는 다시는 발을 들일 수 없다.

그 점이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다. 가족들이 그녀를 가문의 수치로 여길 거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아, 그녀의 오빠. 그녀는 가렌이 할 법한 말들을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다. 소녀는 가끔 신비한 힘을 타고난 사람들이 영웅으로서 사회의 존경과 가족의 축복을 받는 세상에서 사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소녀가 살고 있는 곳은 데마시아다. 마법의 파괴적인 힘을 잘 알고 그 힘을 악으로 정의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점점 절망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생각하다 럭스의 발길이 멈춘 곳은 갈리오의 석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거대한 석상은 먼 옛날 데마시아 군을 보호하기 위해 제작되어 군인들과 함께 국경 밖 전투에 동행했다. 페트리사이트로 만들어진 갈리오는 마법을 흡수하는 능력 덕분에 전투마법사들의 공격으로부터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오는 충분한 마력이 몸속에 쌓이면 생명을 얻어 움직인다고 한다. 지금은 주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기억의 길에 산처럼 우뚝 서 있다.

럭스는 조심스럽게 석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오래된 거인이 그의 발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늘 석상은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며 그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상상이긴 했지만 소녀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럭스는 다른 데마시아인들과 달랐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찬란한 미소와 쾌활한 기운의 럭스는 진중하고 고지식한 데마시아인들 사이에서 단연코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로 그 빛. 아주 어렸을 때부터 럭스는 자신의 심장이 가슴 속에서 뛰쳐나오려는 듯 뜨겁게 불타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땐 빛의 세기가 약했고 감추기도 쉬웠다. 하지만 이제 감추기엔 그 힘이 너무 강해졌다.

럭스는 죄책감에 휩싸여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자, 말해봐!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해보라고!” 럭스는 소리쳤다.

이런 모습은 그녀답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니 상처 입고 지친 영혼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마음을 고르며 짧은 숨을 내쉬고 난 후 그런 식으로 감정을 내뱉은 것이 금방 부끄러워졌다. 세상에, 내가 정말 석상한테 소리를 지른 거야? 민망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특정 시기가 되면 많은 여행자가 데마시아인의 결의를 상징하는 이 조각상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억의 길로 순례를 온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기억의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지 여기저기 살피던 중 저 위에서 건조하고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럭스는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석상의 꼭대기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석상의 왕관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들이 있긴 했지만 새소리 같진 않았다. 마치 흙으로 빚은 무거운 항아리를 자갈 위로 끌고 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럭스는 한참 석상을 쳐다보았지만 석상은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일 때문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럭스는 움직인 것이 무엇이든 한 번 더 움직여보라는 듯 석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정말로 뭔가가 움직였다. 석상의 눈이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안구가 아래쪽으로 돌아 땅 위에 있는 럭스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충격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거대한 석상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 그녀의 상상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다리가 최선을 다해 석상으로부터 멀리, 그리고 빨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아주 깊어서야 럭스는 집에 도착했다. 가족들이 있는 대저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새하얀 아치형 입구로 들어섰다. 집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이 잠들어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온종일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수 킬로를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 사항일 뿐. 잠자리에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오가사는 웅장한 로비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문을 쏘아보고 있었다.

“지금이 대체 몇 신줄 알고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각을 훨씬 넘어 자정이 지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널 퇴학시키지 않기로 했다.” 오가사가 말했다. “이번 문제를 처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니?”

럭스는 울고 싶었지만 종일 울어서인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들 그걸 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점점 심해지고 있구나. 그렇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걱정하는 것조차 지친 럭스가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말이야.” 그녀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네가 통제를 못 하고 있잖니. 계속 이러다간 결국 누군가 다치고 말 거다.”

럭스는 전투에서 마법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육신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버리고 영혼은 둘로 갈라졌다고 했다. 그런 파괴적인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자책하고 싶었지만 온종일 끊임없이 감정의 격류를 겪었기 때문인지 그저 멍했다.

“내가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했단다.” 오가사가 말했다.

럭스는 욕지기를 느꼈다.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데 전문이라면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거원이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은 친구야. 내가 진작에 불렀어야 했는데. 아주 신중한 사람이니까 믿어도 돼.”

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욕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치료제.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상담하러 오기로 했다.”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오가사가 말했다. “우리만의 비밀로 남을 거야.”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럭스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벌써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어둠 속에 묻어줄 깊은 잠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까다로운 문제는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또다시 폭발할 빛이 그녀 안에서 계속 커갈 것이다. 아침이면 제거원이 끔찍한 치료를 위해 약을 들고 도착할 것이다. 럭스는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페트리사이트를 갈아 만든 약을 마시고 나면 여러 차례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그 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그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 번개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지금 막 떠오른 계획이 효과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두렵기도 했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고 나니 어렴풋한 희망도 느껴졌다.



더욱 깊어진 밤, 럭스는 미친 듯 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하얀 아치 입구를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 성문 앞 보초들을 몰래 따돌렸다. 남쪽으로 쭉 내려간 후 기억의 길을 따라 수 킬로를 달려 갈리오의 석상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저기요?” 소녀는 자신이 석상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석상 거인이 밤의 정적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단상으로 다가갔다. 페트리사이트로 만든 차가운 단상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놓았다. 페트리사이트는 무슨 맛이 날까? 분명 엄청 쓸 거야. 그녀는 만약 이 계획이 효과가 없다면 곧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저기, 당신이 마력이 생기는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 절 고쳐주세요. 전 진짜 데마시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녀는 석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석상은 데마시아인의 삶처럼 고요하고 확고부동한 모습이었다. 오늘 밤엔 흔하게 날아다니던 박쥐조차 조용했다. 그녀가 몇 시간 전에 들었던 것, 아니 봤다고 생각했던것은 그녀의 상상이었나 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럭스는 단상에서 손을 뗐다. 그때였다.

작은 소녀 사람.” 저 위에서 큰 울림이 들렸다.

럭스가 눈을 들어보니 거대한 석상이 고개를 아래로 기울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바보야!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 너를 고쳐주지 않을 거야. 널 작은 벌레처럼 밟아 뭉갤 거라고.

“내 발이 너무 간지러운데……” 거인이 말했다.

갈리오는 이해하기 힘든 말로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소녀를 보곤 의아했다. 소녀를 몇 년 동안 지켜봤지만 저렇게 빨리, 저렇게 시끄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갈리오는 소녀가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매년 가족여행 길에 그에게 들를 때마다 그녀를 보았다. 깡총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녀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도록 애쓰면서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잘 놀다가 갑자기 웅대하게 선 석상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곤 했다. 갈리오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동안에는 세상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세상은 짙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고 사람들의 모습은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소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빛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밝은 빛이 아니었다. 소녀가 근처에 있을 땐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묘한 기운이 그의 돌덩어리 몸 안을 휘저어 안개를 걷어냈다.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한 느낌이었다. 소녀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갈리오는 그녀로부터 전달된 묘한 따사로움이 그의 발가락을 간질이는 걸 느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그 빛이 자신의 다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가 10살쯤 됐을 땐 그 온기가 너무 강력해서 1킬로 밖에서도 소녀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평소 오던 날이 아닌데 오늘 그녀가 또다시 왔다. 그녀의 힘은 격렬히 타올라 갈리오의 차가운 몸속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녀가 그에게 생명을 준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갈리오는 놀랍도록 명료하게 그녀의 눈부신 광명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의 별을 모두 모아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멀어지고 있었다.

갈리오는 그녀가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생명도 함께 빠져나가 다시 차갑게 굳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굳어버린다면 소녀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따라가야 했다.

거대한 두 다리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 몇 걸음 만에 소녀를 따라잡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소녀의 손가락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와 갈리오의 다리를 향해 발사되었다. 그 묘한 느낌이 그의 몸속에서 점점 강력해졌다. 갈리오는 자신의 몸이 폭발해서 데마시아 여기저기에 흩뿌려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리오는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은 더 따뜻해졌고 더 생기가 돌았다. 그는 몸을 숙여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소녀를 안아 올렸다. 소녀는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거인은 분수에서 뛰노는 아이처럼 웃었다.

“작은 금빛 머리 인간.” 거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아주 재미있구나. 가지 마라.”

소녀는 충격을 다스리며 대답했다. “어……어차피 못 가요. 당신이 이렇게 잡고 있는데 어떻게 가요.”

자신의 행동이 소녀를 놀라게 했음을 알게 된 갈리오는 조심스럽게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작은 소녀를 만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몰랐다. 난 뭔가를 때려 부술 일이 있을 때만 깨어나거든.” 그가 설명했다. “내가 박살 낼 만한 게 있나? 커다란 걸로?”

“아니요.” 소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같이 찾아보자.” 그는 성큼성큼 몇 걸음 옮기다 제 자리에 그대로 선 소녀를 보았다. “나와 함께 가지 않는 건가? 소녀 사람?”

“안 가요.” 소녀는 자신의 대답이 거인을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대답했다. “전 지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거든요.”

“아. 미안하다. 소녀 사람.”

“음. 전 그만 가 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뜻이 전달되리라 생각하며 럭스가 말했다.

갈리오는 그녀를 바로 뒤따랐다. “너는 도시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 그가 지켜보다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모르겠어요. 저한테 어울리는 곳으로요.”

거인은 머리를 소녀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너는 데마시아 사람이다. 너는 데마시아에 어울린다.”

처음으로 소녀는 거인이 자신을 이해해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의 문이 살짝 열리는 걸 느꼈다.

“당신은 이해 못 해요. 당신은 이 왕국의 상징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녀는 많은 걸 말하지 않고도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단어를 찾고 있었다. “나는 문제가 있어요.” 그녀가 마침내 고르고 고른 단어를 말했다.

“문제? 넌 아무 문제가 없다. 넌 나에게 생명을 준다.” 석상이 그녀의 눈높이로 얼굴을 낮추며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소녀가 말했다.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게 정상인데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라고요.”

놀란 갈리오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놀람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넌 마법사구나.” 그가 기쁨에 들떠 큰 소리로 말했다.

“쉬! 제발 조용히 해요.” 소녀가 간청했다. “사람들이 듣겠어요.”

“난 마법사를 물리친다.” 그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넌 아니다. 난 네가 좋다. 넌 내가 좋아하게 된 첫 번째 마법사다.”

럭스는 갈리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대신 짜증이 났다. “이봐요. 당신한테는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겠지만 난 정말 괴롭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또 사람들이 당신이 없어진 걸 알아차릴 거라고요.”

“나는 상관없다. 알아차리라고 해라.”

“안돼요!” 럭스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암담했다. “제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갈리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곤 즐거운 것이 떠올랐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것을 한 번 더 해봐라. 너의 멋진 별빛으로!” 그는 럭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큰 소리로 말했다.

“쉿! 소리 좀 낮춰요!” 그녀가 다시 한번 사정했다. “내 병 말이에요?”

“그렇다.” 갈리오가 조금 낮아진 톤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게다가 하면 되는 거고요. 자 이제 어서 돌아가세요.” 그녀가 또 한 번 사정했다.

“난 갈 수 없다. 너한테서 멀어지면 난 다시 잠들 것이다. 내가 다시 깨어날 때면 넌 아마 이 세상에 없겠지. 작은 소녀.”

럭스는 잠시 생각했다. 지칠 대로 지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인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빛을 소환하면 떠난다고 약속해 줄래요?” 그녀가 물었다.

거인은 잠시 고민하다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럼 한번 해 볼게요.”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쪽으로 두 손을 모았다가 갈리오를 향해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아주 미약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계속 시도했지만 하면 할수록 빛은 점점 더 약해졌다.

“나 정말 피곤한가 봐요.”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쉬어라. 기운이 생기면 그때 나에게 너의 마법을 부려다오.” 갈리오가 말했다.

“음.” 럭스는 그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을 보낼 수도 없고 나도 갈 곳이 없으니 여기서 자는 편이 낫긴 하겠네요.”

그녀는 푹신한 풀이 자란 곳을 찾으려 바닥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적당한 곳을 찾자 바닥에 누워 망토로 따뜻하게 몸을 감쌌다.

“자, 이제 난 잘 거예요.” 하품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자야 해요.”

“아니다. 나는 너무 많이 잔다.” 갈리오가 대답했다.

“그럼 그냥……모르겠어요. 그냥 잠깐 동안 정지하면 안돼요?”

“난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 그냥 가만히 서서 살아있지 않은 척 해봐요.”

“알았다. 그냥 여기 서서 네가 쉬는 걸 지켜보겠다. 소녀 사람.” 갈리오가 말했다.

“그러지 마요.” 그녀가 말했다. “누가 날 지켜보는데 어떻게 편히 자겠어요. 돌아서서……저쪽을 보면 안 돼요?”

갈리오는 소녀의 말대로 몸을 돌려 저 멀리 데마시아의 수도에서 흘러나오는 어스름한 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소녀처럼 흥미롭진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갈리오를 등진 채 혼자 있게 된 럭스는 눈을 감고 잠 언저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잠시 후 갈리오가 등을 돌린 걸 확인하고서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럭스는 빠르게 뛰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거인에게서 가능한 멀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달아나지 않으면 그녀의 마법이 다시 그에게 힘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분명 다시 그녀를 찾으러 오겠지. 아침이 되면 왕국의 모든 순찰대가 간밤에 사라져버린 크라운가드 소녀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석상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심지어 그녀를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를 깨운 마력의 원천이 그녀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해 낼 것이 분명했다.

럭스는 종일 혹사한 다리가 아팠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위치를 파악할 만한 지형지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구름숲 근처라는 건 확실했다. 숲을 이룬 장대한 홍피나무들이 남쪽으로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수색대로부터 몸을 숨기기에도, 아침으로 먹을 만한 걸 찾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틀 정도면 숲을 가로질러 바스카시안 산림촌 중 한 마을에서 쉴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기발한 계획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계획이었다.

럭스의 눈에 숲의 입구가 보였다. 장대 같은 나무들이 가운데 솟은 가장 키 큰 나무를 중심으로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었다. 숲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잠깐 멈춰 서서 헤어지게 될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오빠 가렌과 그녀가 사랑하는 말 ‘불꽃별이’, 그녀의 어머니도 생각났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하니 슬펐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고 상록수가 빽빽이 자란 어두운 숲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시 투성이 홍피나무 가지에 긁히고, 진동하는 송진 냄새를 참아가며 숲을 헤맨 지 한 시간 만에 럭스는 자신의 계획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배에선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열심히 걷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던 자신감은 구름 뒤로 숨어버린 보름달과 함께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곤 야행성 동물들의 킁킁거림과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인 어두운 숲속. 럭스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빛을 조금만 쓰자. 멀리 나와 있으니까 조금만 쓰는 건 괜찮을 거야..

그녀는 두 손 사이에 빛을 뿜는 작은 구체를 불러왔다. 불빛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춤을 추자 주위의 동물들이 놀라 허둥댔다. 하지만 빛은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버렸고 다시 암흑이었다. 럭스는 손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한 적도 없는데 그리 쉽게 나타났던 능력이 왜 정말 필요한 때에는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 때 깨달았다. “거인 때문이구나. 틀림없어.

그때 숲속에서 소곤거림이 들렸다. 서서히 목표물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걸음과 나지막한 속삭임.

갑자기 뒤에서 쑥 나온 팔이 럭스의 목을 단단히 감아 그녀를 옭아맸다. 럭스는 적어도 두 명의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딜 가시나, 아가씨?” 괴한들 중 한 남자가 물었다.

럭스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남자가 목을 더 세게 졸랐다.

“넌 격리촌에 있어야지. 안 그래?” 그가 말했다.

“아니야……” 럭스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가까스로 내뱉었다. 괴한은 그녀의 턱 아래에 끼운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컥! 난 아니……”

“우리가 바본 줄 아나, 아가씨?” 세 번째 남자가 말했다. “이리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주지.”

괴한들이 밧줄로 그녀의 두 팔을 묶으려 하자 럭스는 팔을 잡히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정신을 집중했지만 이상하게도 분명 그녀에게 있던 마법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럭스는 가까스로 한 손을 빼내 정확하게 괴한의 턱을 가격했다. 그가 쓰러지면서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두 명의 괴한은 분노에 휩싸여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무리 중 한 명이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어.”

그들은 그녀를 더 세게 묶었다. 그녀의 팔이 아프도록 최대한 매듭을 꽉 조였다. 바로 그때 천둥이 치는 듯 둔탁한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들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더 빨리, 더 크게 들리자 겁에 질린 괴한들은 그 출처를 찾으려 잠시 멈추었다.

쿵. 쿵. 쿵. 지진 같은 울림이 지속적이고 일정한 박자로 들렸다. 마치 거대한 발소리처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공포에 질려 얼어 있던 한 남자가 물었다.

땅은 점점 더 심하게 흔들렸고 이젠 나무 부러지는 소리도 함께 났다. 뭐가 내는 소리든 그것은 이제 숲으로 들어왔고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저건……”

모두 고개를 들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상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갈리오의 뒤로 홍피나무들이 성냥개비처럼 부러져 있었다. 괴한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하지만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거대한 페트리사이트 손이 그들을 낚아채 들어 올렸다. 갈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손아귀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싸우는 시간인가?” 거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과 교전하겠다!”

그는 괴한들을 쥔 손을 펴고 손바닥으로 그들을 짓뭉개려는 듯 다른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안돼요! 제발 그만 해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인은 땅 위에서 밧줄에 묶인 팔로 그의 발목을 치고 있는 럭스를 발견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녀가 소리쳤다.

당황한 갈리오는 럭스의 말대로 남자들을 땅으로 내려놓고 풀어주었다. 그들이 후다닥 꽁무니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전력 질주해서 도망가고 있었다. 럭스는 팔을 묶은 줄을 풀려고 꼼지락거리면서 거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말대로 돌아섰는데 너는 사라졌다. 소녀 사람.” 그가 말했다. “왜 숲에 있는 건가?”

“나……나도 모르겠어요.” 럭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갈리오는 새로 친구가 된 작은 금발 머리 소녀와 함께 언덕에 기댄 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가끔 깊은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럭스가 자주 내뱉곤 했던 걱정의 탄식과는 달랐다. 조용하고 깊은 밤,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이 채워지는 완벽한 순간, 그럴 때 나오는 평온한 한숨이었다.

“나는 보통 이렇게 오래 깨어있지 않는다.” 거인이 말했다.

“나도요.” 소녀가 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인간들은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나? 우리도 대화를 해야 하나?”

“아니요. 이것도 좋은데요. 평화롭고……좋아요.” 소녀가 대답했다.

갈리오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에게서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았다. 무언가 사라졌다. 그녀 안의 찬란한 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별처럼 빛나지 않았다.

“왜 슬픈 표정을 짓는 거예요? 당신 덕분에 난 다 나았는데.”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으면 난 집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요.”

갈리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소녀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내 말은, 병이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아마도 매일 당신을 보러 올 수도 있다고요.”

“안 된다.” 침묵을 지키던 거인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안 되는데요?” 소녀가 물었다.

“작은 소녀 사람. 넌 특별한 존재다. 네가 기억하기도 전부터 나는 너의 특별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힘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내 옆에 있으면……너의 힘이 사라진다.”

“하지만 덕분에 당신이 생명을 얻잖아요.”

갈리오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나에게 생명이란 아주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너의 힘은 모든 것이다.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된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둘은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도시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막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이른 아침, 럭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성벽 밖에서는 갈리오가 기억의 길옆 단상에 늘 서 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럭스는 오롯이 혼자 자신의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머리가 약간 벗어진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다른 나라의 약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럭산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악문 이 사이로 오가사가 말했다.

럭스는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바로 이분이란다.” 그녀의 어머니가 속삭였다. “네 그……문제를 고쳐주실 분이야.”

어머니에게 단단히 결심한 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려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 순간 아찔함이 느껴졌다.

“있잖아요, 어머니?” 그녀가 드디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저분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실은 그만 보내 드렸으면 좋겠어요.”

제거원은 기분이 상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맸다.

“아니에요. 그냥 계세요.” 오가사가 그를 말렸다. 그녀는 럭스를 구석으로 데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해. 저분은 널 돕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고 오셨어. 네가 데마시아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야. 잊은 거니? 네가 병에……”

“그건 병이 아니에요!” 럭스가 외쳤다. “난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예요. 언제가 이 왕국에 그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나한테 불만 있는 사람은 덩치 큰 내 친구랑 먼저 얘기해야 할 거예요.”

그녀는 어머니와 제거원을 뒤로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럭스는 침대에 몸을 던지며 깊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마음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여름날 연못처럼 고요했다. 그녀 몸속의 초대받지 않은 빛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 시작과 끝을 느낄 수 있었고 분명 언젠가는 조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잠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이 늘 외던 주문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빛도 절대 그림자를 없애지못한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 더 선명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말에 담긴 기분 좋은 울림이 그녀의 마음에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4. 우주 / 암흑의 별 스킨 세계관

4.1. 야망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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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뭉쳐진 존재.

잔혹한 미소가 펼쳐진다. 날카로운 이빨이 항성계 저편까지 박혀 있다.

그는 망각이 형태를 얻어 탄생한 암흑의 존재, 소멸의 사자이다.

그의 이름은 쓰레쉬이다.

그의 엄청난 중력이 나를 점점 끌어당긴다. 한데 얽힌 암흑 물질이 나를 감싸며 고요함으로 잠식한다.

야망의 포옹.

그러나, 그의 뒤에는 더욱 거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중력의 힘이 나의 모든 것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나는 그 부름에 저항하려 안간힘을 쓴다. 쓰레쉬의 손아귀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빛을 부른다. 그러나 내 안에서 피어나는 모든 빛줄기는 영원히 빛을 갈구하는 그 손길을 따라 끝없는 암흑의 구덩이로 사라진다.

암흑의 별.

쓰레쉬가 웃자 에너지의 파동이 물결치며 우주로 퍼져 나간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작은 빛이여. 너는 곧 암흑의 별에 삼켜질 테니." 그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절망의 파도가 가슴속에 밀려온다.

포기해.

그가 나를 광활하고 영원한 침묵의 공간으로 힘껏 끌어당긴다. 나는 그의 속박에 저항하지만,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되돌아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끌어당기는 별의 어두운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쓰레쉬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럭스."

나를 받아들여라.

"우주 의회가 널 막을 거야." 나의 목소리가 암흑의 별의 엄청난 중력에 흔들리고 일그러져, 내 의지는 간데없이 텅 빈 허풍만을 메아리친다.

그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실패를 앞두고 있다.

지평선으로 들어가라, 럭스.

그가 나를 당긴다.

나는 암흑의 별의 벗어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쓰러진다.
그들은 하나둘씩 나타났다. 성좌로 만들어진 빛의 신호는 끝없는 별의 광채로 불타고 있었으며, 끓어오르는 창조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마스터 이는 천상의 검을 우아하게 휘둘러 캄캄한 우주에 길을 냈다. 곧 카사딘신 짜오가 그 뒤를 이었다. 춤추듯 기민한 자야에 이어 라칸이 나타났고, 룰루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변덕으로 어슬렁거리다 끝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여왕 애쉬가 우리의 빛에 이끌리기라도 한 양, 눈부시게 빛나는 화살처럼 시공간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내가 모두의 모습을 살피는 동안, 다른 자들은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했다.

나의 신호를 받아, 셀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 우주 의회 구성원들이 다시 모인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신 짜오였다. "모두가 모인 것은 오랜만이군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가끔 너무 딱딱하긴 하지만, 신생별을 품는 성운을 지키기 위한 신 짜오의 진중함과 헌신은 언제나 내게 깊은 존경과 감탄을 자아냈다.

"너무 오래됐지." 카사딘이 답했다.

"그런데 아직 보이지 않는 자들이 있군." 마스터 이가 투덜댔다.

자야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굴렸다. "언제나 불참하는 자들이 있지. 놀랍지도 않아."

"하지만, 개중에는... 걱정되는 자들도 있어." 애쉬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신 짜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 말씀이시군요."

라칸이 끼어들었다. "모데카이저도. 심술궂은 늙은이 같으니. 어딜 간 거야?"

"우린 모두 늙었소.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자들도 있지만." 마스터 이가 답했다.

"진의 빛이 사라졌어." 룰루의 맑고 순수한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했다.

놀라 웅성대는 소리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툴툴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룰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우주의 존재가 소멸하면, 남은 존재들은 그 상실의 메아리를 느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의 빛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낀 후였다.

그 후로 나는... 그가 남긴 뒤틀리고 망가진 항성계를 보았다. 어둡고 흉악한 모습이 되어 버린 그는 파괴와 죽음, 기괴함을 즐겼다. 별은 블랙홀이 되고, 조각난 행성은 궤도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방황하고 있었다. 혼돈과 파괴가 가득했다.

아름다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자야가 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소멸의 사자가 나타난 후로, 암흑의 별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애쉬가 무리 사이를 미끄러져 지나가며 하나씩 눈을 마주했다. "그는 암흑의 별을 인도해 우리의 창조물로 잠식하고 있어. 우리가 생명과 빛의 가능성을 창조하면... 그는 파괴를 일삼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의 행동을 묵과하고, 엔트로피를 지나치게 쫓는 존재로만 받아들였어." 그녀가 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중 하나를 삼켜버린 거야.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소멸의 사자를 찾아 처단하기 위해 모인 것이군요." 신 짜오가 창을 휘두르자, 반짝이는 성운의 흔적이 남았다.

"아니야." 애쉬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암흑의 별은 빛의 원천을 삼킬 때마다 강력해지지. 우리가 한꺼번에 접근하는 건, 쓰레쉬가 원하는 바야."

'우리'가 원하는 바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애쉬가 다시 한번 무리 사이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각자 흩어져 알려진 타락자들을 쫓도록 해. 암흑의 별과 쓰레쉬는 우리 중 한 명만이 접근해 봉인하는 거야. 그들의 파괴 행위를 저지하는 거지."

모두의 눈이 내게로 옮겨졌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왕 폐하. 폐하께서—"

"나는 천상의 활로 다른 타락자들의 추적을 지휘할 거야." 애쉬가 말을 끊었다. "별의 광채와 성좌 봉인에 익숙한 럭스야말로 그들의 위협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자네 임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 거야, 럭스. 하지만, 우주를 수호하는 우리의 임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는 자네밖에 없어."

나는 여왕에게 걸어가 그녀 곁에 서서 흔들리는 마음을 감춘 채 확고하게 말했다. "암흑의 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지금은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요. 진이... 사라졌을 때, 제가... 가장 강력하게 느꼈어요."

진실과 거짓이 섞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우리' 사이의 유대를 느끼는 거야. 너 '자신'을... 보는 거지.

나는 이를 악물고 머릿속의 목소리를 몰아냈다.

나는 우주의 동료들을 훑어보았다. 태초에 순수한 빛으로부터 태어나 영원토록 빛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힘을 합쳐 은하계 전체를 창조하고, 우주의 신비를 만들어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춤추다 흩어져 새카만 우주 공간을 섬세한 문양으로 수놓았다. 하지만 진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암흑의 부름을 들었다.

그 부름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할 수 있을 때도 있었지만, 결코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암흑의 별의 파동과 함께 공명하는 작은 파편, 저주받은 끔찍한 공허와 뒤엉켜 춤을 추는 그 소리가 끝도 없이 속삭이며 나를 괴롭혔다.

멈출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의회의 동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에 반하는 이 어둠의 씨앗을 품은 채 태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애쉬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의무의 화신이다. 빛의 힘이 가슴속 배신의 소리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쓰레쉬를 처단하고, 암흑의 별을 우주 어딘가에 봉인해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한 눈부신 작품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다면... 마침내 그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를 잠재우고 내 안의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그럴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너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실패했다.

어둠을 받아들여라.

나는 종말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너는 빛보다 강력한 존재다. 처음부터 그랬지.

아니.

믿음을... 잃으면 안 된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의무는 너를 속박할 뿐이야. 너는...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나는 끝없는 공허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점점 더 빠르게 끌려갔다. 엄청난 압력과 힘이 나를 당기고 압박하며 몸을 부수고,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산산이 조각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꺼져 가는 힘을 붙잡으며 가슴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빛의 흔적을 갈구했다.

번득이는 빛, 최후의 섬광이 보였다.

하지만 그 옆에는...

어둠의 조각이 섬광과 함께 춤을 춘다.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럭스... 해방되어라.

야망을 펼쳐라.

나의 형상이 깜박인다.

조각난 별의 광채가 중력장 속에서 흩어진다.

최후의 선택.

마지막 기회.

우주의 빛인가,

아니면

영원한

어둠인가?

5. 구 설정

5.1. 구 배경 1

럭스의 본명은 럭산나, 그녀는 빛이 가득한 곳에서 태어났다. 데마시아 왕궁 근위대 가문의 금쪽같은 딸 럭산나는 그녀의 높은 신분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듯했다. 럭스의 생활이란 대개 높은 지위의 자제들을 위한 고등 교육을 소화하거나 화려한 상류층 파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자신에게 비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일례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목격했다고 믿게 했으며 종종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소녀는 다른 이가 외우는 주문을 한 번만 듣고도 그것을 역으로 시전할 수 있었는데 실로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 이 기품 있는 아가씨를 특별한 천재로 받들었으며 그녀는 데마시아 정부와 군대, 그리고 시민 모두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마법 대학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입학시험을 보게 된 럭스는 자신에게 빛을 다루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좋은 일에 사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겸허한 천재 소녀를 어느 군대가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 후 데마시아 군은 그녀를 비밀 작전 요원으로 선발했고 럭스는 곧 대담한 업적을 세워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임무를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역시 녹서스 사령부 침투 작전을 회고할 것이다. 이 위험천만한 작전에서 럭스는 녹서스와 아이오니아의 분쟁에 관련된 중요한 내부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데마시아와 아이오니아 양쪽 모두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럭스는 정찰과 감시가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다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 진정한 길은 역시 리그 오브 레전드에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오빠의 뒤를 이어 데마시아 전역에 영감을 불어넣었고 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민중의 빛'이 되었다.

"적들은 럭스의 인도하는 빛을 경계하지만,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그 빛이 희미해질 때이다." - 데마시아의 힘 가렌.

5.2. 구 배경 2

럭산나 크라운가드는 젊고도 강력한 빛의 마법사다. 그러나 그녀가 태어난 데마시아는 마법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곳이기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힘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다. 자칫 발각되어 추방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녀는 마법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나갔고, 지금은 고국을 위해 그 힘을 은밀히 사용하고 있다.

럭산나보다는 럭스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데마시아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서 명망 높은 가문인 크라운가드 가의 딸로 태어났다. 크라운가드 가는 집안 대대로 국왕을 수호하는 영예로운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럭스의 조부는 ‘폭풍 이빨 전투’에서 왕의 목숨을 구했고, 아버지는 ‘사이러스의 난’이라고 알려진 녹서스의 침공 당시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럭스의 오빠인 가렌도 그와 같은 명예로운 일을 해낼 거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럭스와 가렌 남매는 최대한 이른 나이부터 전투, 승마, 사냥을 배웠다. 그런데 가렌은 집안의 전통을 따라 데마시아의 정예 부대 중 하나인 불굴의 선봉대에 들어가기로 한 반면, 럭스는 국경 밖의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부모님은 그녀의 생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자식은 둘뿐이었기에,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책임을 럭스에게 맡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책임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고집불통 이상주의자 럭스의 장래 희망은 변하지 않았다. 가렌은 럭스에게 꿈을 포기하고 본분에 충실하라고, 데마시아인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한다고 타일렀지만, 오빠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럭스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서 화를 냈다.

큰 포부와 눈부신 야망을 품은 활달한 소녀 럭스는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가정교사들은 그녀가 가업을 물려받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려 했지만, 럭스는 매번 새롭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다른 관점을 내세워 토론을 벌임으로써 그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럭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과 같은 생기를 마주하면 저절로 누그러들게 마련이었다. 럭스는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차 자신의 특별한 면모가 그리 당연하게 여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의 내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는 게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어느 날 황혼 녘에 그녀가 북쪽 산에서 혼자 승마를 즐기고 있을 때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해가 서편으로 저물었을 때, 그녀의 말이 그만 얼어붙은 땅 위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앞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럭스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발이 묶였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걸어가려 해도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수 없는 거리인 데다, 고통스러워하는 말이 너무 걱정돼서 그대로 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가렌이라면 이럴 때 말을 빨리 죽여서 고통을 없애줘야 한다고 말했겠지만, 럭스는 어렸을 때부터 타고 다닌 애마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산자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고 혼자서 노숙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 굶주린 칼날늑대 무리 하나가, 그녀의 말이 흘린 피 냄새를 맡고 신선한 고기를 찾아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집에서는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럭스 때문에 식구들 모두가 걱정에 빠졌다. 아버지와 가렌이 함께 그녀를 찾으러 나섰지만, 밤새도록 수색을 벌여도 성과는 없었다. 마침내 럭스를 발견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나 되어서였다. 그녀는 겁에 질린 말 옆에 꼭 붙어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고, 그 주위에 칼날늑대 여섯 마리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털가죽이 시커멓게 그을리거나 녹아버린 상태였다. 럭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고, 다만 다친 말을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빌었다. 결국 집에서 마차를 한 대 보내서 럭스와 그녀의 애마를 모두 데려오게 했고, 그녀는 말을 정성껏 간호해서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그날 이후로 럭스는 자신이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데마시아에서는 혐오의 대상으로 통하는 마법의 능력이었다. 럭스는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마법에 대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마법 때문에 룬테라 전체가 멸망할 뻔했으며, 그녀의 삼촌도 마법사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게다가 데마시아의 전설이나 동화에는 마법사가 악의 하수인으로 등장하거나 선량한 사람이 마법을 접하고 타락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넘쳐났다. ‘나도 사악해지는 걸까? 나는 죽임당하거나 성벽 밖으로 추방되어야 할 혐오스러운 존재인 걸까?’ 럭스는 두려움과 의혹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밤에는 몸에서 자꾸만 빛이 저절로 새어 나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움켜쥐기 일쑤였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럭스는 심리적으로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열세 살 되던 해 어느 날 밤, 데마시아의 수도에서 거대한 조각상 하나가 어둠 속을 버젓이 걸어 다녔다는 그 밤, 그녀는 변했다. 이후에 하이 실버미어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수도에 머물렀다. 그가 하이 실버미어에 들르는 날은 드물었고, 남매는 서로 만나는 일이 줄어들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한편 럭스는 두려움을 떨치고 마법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호위병들을 따돌리고 인적 없는 숲으로 떠나서, 남들 눈을 피해 몇 시간씩 마법 연습에 매달렸다. 그녀는 마법을 마음껏 펼쳐보면서 동시에 통제하는 법도 익혀나갔고, 마침내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빛을 구부려서 상대방의 시야를 차단하거나 어지럽힐 수도 있었고, 손바닥으로 섬광을 뿜어낼 수도 있었으며, 허공에 빛나는 형상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빛을 아주 강하게 응축해서 무언가를 태우거나 파괴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게 무서웠지만, 이제는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어 기쁘기만 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가 마법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은 아직 많고도 많았다. 이후 몇 년 동안 크라운가드 저택에서는 럭스 때문에 종종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안 곳곳에 빛이 춤추듯 떠다니고, 조각상이 사람에게 시를 읊는가 하면, 아무도 없는 데서 웬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크라운가드 가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명하려 애썼다. 문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들도 내심 알고 있었지만, 고통스러운 진실을 인정하고 가문을 세간의 이목에 노출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럭스의 어머니는 그녀를 현실 세계에 붙잡아두기 위해, 가문의 영지를 시찰하고 주민들을 만나보라는 임무를 맡겼다. 럭스는 처음에는 그 일을 부담스러워했지만 금세 적응하고 최선을 다해 임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이고, 형편이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그녀는 영지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럭스가 열여섯 살 되던 해,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에 정식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럭스와 그녀의 부모는 가렌의 입대식을 보기 위해 데마시아의 수도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럭스는 ‘빛의 사자 수도회’의 자선 활동에 참여하며 불우한 이들을 도왔고, 하이 실버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고 재치 넘치는 사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빛의 사자’의 전투 조직인 ‘광휘단’ 소속 성기사 카히나와 친구가 되기도 했다. 럭스는 무도회나 이런저런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석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짬짬이 카히나를 만나 전투 시합을 했고, 삽시간에 그녀와 깊은 유대감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럭스의 남다른 면모는 어김없이 힘을 발휘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도시 밖으로 나가서 마법을 쓰곤 했다. 데마시아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름다워 보였지만, 아무리 예쁜 정원이라도 그 어디에선가는 어둠이 싹틀 수 있다는 것을 럭스는 알게 되었다. 숲 어귀에 있는 어느 마을에서 겪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 마을에는 주민들을 잡아먹는 괴물둘의 소굴이 있었다. 럭스는 놈들을 뒤쫓아 숲속의 본거지까지 찾아냈다. 괴물들이 사는 지하 동굴 안에는 그들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젊은 혈기와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럭스는 마법의 힘을 끌어올려 번쩍이는 섬광의 폭풍으로 놈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수십 마리가 죽었지만, 괴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럭스는 금세 수세에 몰렸다. 충동적으로 행동에 나섰다가 적들을 과소평가한 탓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그녀를 덮치기 직전, 마침 그 괴물들의 소굴을 추적하고 있던 광휘단 소속의 특공대가 나타나 럭스를 구해주었다. 그 특공대의 대장은 카히나였다. 그리고 카히나는 럭스가 마법을 쓰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광휘단은 럭스를 빛의 사자 수도회의 핵심 지도부로 데려갔다. 거기서 럭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데마시아 국경 밖에서 마법을 이용해 적들을 염탐하는 일을 하거나, 아니면 마법을 내키는 대로 휘두르며 살되 영원히 나라에서 추방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데마시아의 고위 조직이 마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데에 럭스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제안 자체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선뜻 첫 번째 선택지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사실은 그녀의 가족에게도 알려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크라운가드 가에서는 럭스가 왕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차출되었으며, 광휘단의 일원으로서 수도에 남아 일해야 한다는 통보만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님은 깜짝 놀랐지만, 럭스가 결국 데마시아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데에 기뻐하며 하이 실버미어로 돌아갔다.

럭스는 몇 년간 수도에서 광휘단과 함께 훈련을 받고 수도회 내부 교육을 받은 뒤,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러 나라를 떠났다. 동부 데마시아와 녹서스 제국 사이의 완충 지대에 잠입하여, 혹시 녹서스 측에서 그 완충국들을 병합시켜 데마시아에 대항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지는 않은지 알아보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럭스는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녹서스의 첩자들은 실제로 완충국들의 정부에서 암약하면서 그들 사이에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럭스의 활약 덕분에 그 나라들이 서로를 연이어 배신하고 기만하면서 동맹은 삽시간에 무너져버렸다. 이후에도 럭스는 어떤 임무를 맡든 잘 소화해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척척 처리해내는 수완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데마시아의 성벽 밖으로 나간 럭스는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문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고 접한 그녀는 데마시아의 상식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고국에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단점도 있었다. 럭스는 나라 밖을 다닐 때는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했지만,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가렌을 만날 때는 자신의 힘을 감췄다. 가족들은 여전히 그녀가 데마시아의 충직한 일꾼인 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5.3.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럭스
날짜: CLE 20년 10월 17일

관찰

럭스가 들뜬 소녀처럼 신나서 씩씩하게 달려 들어온다. 소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후광처럼 빛을 발하는 게 천사를 보는 것만 같다. 어리숙한 행인들이야 빛깔 고운 옷이나 햇살같이 환한 미소를 보고 방심할지 몰라도, 노련한 전사들이라면 갑옷을 입고도 편하게 움직이는 럭스의 모습에 긴장하여 발길을 멈출 것이다.

럭스는 잠시 멈춰 서서 영리한 눈길로 주위를 한눈에 살핀다. 손가락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지휘봉을 빠르게 휙휙 움직이는 품이 꽤 초조한 모양이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니라는 듯 "흥"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리곤 뚜벅뚜벅 걸어 나와 장갑 낀 손으로 눈앞의 대리석 문을 홱 열어 젖힌다. 가볍게 지휘봉을 휘리릭 돌리자, 눈 부신 빛의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럭스는 한입에 집어삼킬 것 같이 깜깜한 어둠 속으로 겁도 없이 뛰어든다.

회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오빠, 데마시아의 힘 가렌이 눈앞에 서 있었다. 표정은 엄격했지만 어딘지 따뜻하고, 헤어진 후 리그 경기 방송을 통해서만 간간이 보며 실제로 보면 이런 모습일 거라 상상했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뭐니?"

럭스는 우쭐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리그의 심판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든 심판 내용에 대해 함구령이 내려지지만, 나름 조사해 본 결과 리그가 소환해 낸 환상을 통해 후보들의 내밀한 이유를 이끌어내고 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럭스에게 그 정도는 애들 장난일 뿐, 이들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원하는 바로 그 대답을 해 주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럭스는 몸을 쭉 펴고서 허상에 불과한 오빠의 누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데마시아의 이름으로, 정의의 편에서 싸우기 위해서."

"진짜 이유가 뭔데, 럭산나?"

"우리 동맹들에 승리를 안겨주고, 적에겐 패배를 선사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입문서 <신중한 발걸음>에서 인용한 이 두 구절은 당당한 데마시아인이라면 누구나 흔히 암송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럭스의 포부가 이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오빠의 찌푸리는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폭발하며 둘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가끔 데마시아 왕립 학교의 유리 복도에 빛이 반사되며 온 사방으로 현란한 무지갯빛이 드리워지곤 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었다. 럭스의 피부는 수정 가루가 곱게 뒤덮은 듯 아른거리며 반짝였다. 둥실 떠오르는 기분으로 빛이 온몸을 감싸게 두자, 온몸이 투명해지며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변했다.

럭스는 아직 이런 기이한 현상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어, 정말 적절치 못한 순간 이런 일이 닥치곤 해서 속이 상했다. 부모님께 환영처럼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서둘러 집 쪽으로 달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번번이 변신은 금방 풀려버려, 학교를 빼먹어 마음만 켕기고 결석 처리만 또 한 번 늘어나고 말았다.

럭스는 크라운가드 저택의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갔다. 부엌 쪽에서 나직이 이야기하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세 명의 군 장교가 차려 자세로 부모님께 무언가 말씀을 드리고 있었다. 럭스는 가슴이 철렁해서 거실 쪽으로 물러났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은 방해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럭스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려다 바로 그 잊고 싶은 고통의 순간, 자기 이름을 거론하는 걸 듣고야 말았다.

럭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럭산나를 거두어주신다니 우리 가문에 정말 큰 영광입니다. 그 애는 제 오빠 가렌과 마찬가지로 큰 일꾼이 될 거에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 의자가 마루에 끼익 끌리는 소리가 났다.

"진심입니까, 릴리아님? 따님은 지금 부모님의 보살핌이 무엇보다 필요한 나이고, 무엇보다 오빠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국왕 폐하의 명이시지 않습니까. 군에서 부모의 몫까지 다해 주실 테구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억눌러왔던 기억이 무자비하게 되살아나면서, 럭스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어 소식을 전해주던 부모님. 방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힌 자신. 억지로 집에서 끌어내던 거친 손아귀에 몹시 아프던 두 팔. 한사코 부모님을 보지 않으려 숙인 얼굴 위를 가리던 머리칼. 매일 밤 잠자리에서 삼키던 뜨거운 눈물. 정신 차리라고 고함쳐대던 우렁찬 목소리들. 이런 짓을 한 가족을 저주하던 자신의 비명 소리.

그리고는 동료 신병들과 나란히 정의의 서약을 낭송하는 자기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책장이 다 닳도록 읽고 또 읽었던 신중한 발걸음 입문서가 안겨주던 평안함. 럭스가 직접 지도했던 신입 학생 반의 교육 시간. 빛나는 데마시아의 깃발 아래 행진하며 가슴 뻐근하던 긍지. 모범적인 품행으로 받은 표창.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국심.

그리고 자신이 자진해서 사랑하게 된 것의 실체를 깨달은 공허함.

숨 가쁘게 몰아쳐 오던 기억이 잦아들고, 이제 럭스는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리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빠져나갔으나, 시험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굳이 고개 들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리그에 들어오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인정하겠나?"

힘겨운 숨이 목구멍에 걸려, 속삭이듯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흩어지더니, 조각조각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럭스는 온몸이 들썩이도록 흐느껴 울며 땅바닥에 엎어졌다.

우뚝 버티고 선 가렌의 환영이 서서히 흩어지며, 늘 친절하기만 하던 얼굴이 거칠고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방금 넌 나와 마음을 나눈 거다. 리그의 챔피언이 되려면 다른 이들이 네 마음속에 들어가도록 허락해야 하고, 그들도 네 진정한 신념과 목적을 너 자신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돼야만 한다. 준비가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진 이미 잘 알겠지."

오빠는 등을 돌리고는 복도를 따라 저 앞에 있는 한 쌍의 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시 멈춰 손을 내밀어 주는 법도 없고, 따라오는지 한 번 돌아봐 주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럭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음을 다잡았다. 잠깐 동안 오빠를 소리쳐 부를까, 다시 대전당 안으로 달려가 리그의 모든 것을 꿰뚫는 시선에서 피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데마시아 최고의 마법사들에게 시험받던 때나 녹서스 심장부까지 나 있는 터널을 몰래 정찰하던 때보다도 더욱 중요한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최초의 진정한 도전이었다. 자신은 크라운가드 가(家)의 사람이 아닌가, 살면서 닥쳤던 다른 시련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도전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럭스는 날렵하게 지휘봉을 손에 쥐며 박차고 일어섰다. 이제 질문에 대한 자신이 첫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데마시아에 헌신하는 그녀의 애국심이 진실임을 증명해 보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