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1:15:26

런던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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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화재 이후

1. 개요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
Great Fire of London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경 잉글랜드 왕국 런던[1]에서 발생한 대화재. 빵 공장에서 일어난 불로 시작되었으며 당시 소방담당자의 무책임으로 인해 조기에 진화되지 않아, 큰 피해가 발생했다.[2]

하필 연도가 1666년이다 보니, 666 관련해서 저주 드립이 당대에도 퍼졌다.

2. 상세

푸딩 레인(Pudding lane)의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9월 2일부터 5일까지 런던 4/5를 전소시켰다. 이 화재는 자그마치 4일 동안 꺼지지 않았고 87채의 교회, 1만 3천 채의 집이 불타 7만 명이 집을 잃었다.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공식 기록에는 단 6명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불이 너무 뜨거워서 시체가 전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다는 설극빈층이 시민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화재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불타 버렸다.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을 약속하였다.

한편 이 화재로 들도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그전 해인 1664년 말부터 1666년까지 발생한 흑사병(The Great Plague)이 종료되는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 또한 나타났다.

3. 화재 이후

이 사건 이후로 런던 중심지는 완전히 새로운 계획 도시로 세워졌고 석재 건축법이 생기고 유럽 최초로 화재를 담당하는 소방 조직과 소방차(마차), 화재 보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런던의 소방 시스템은 국가 소방 체계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얼마씩 각출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민영 소방 체계였는데 그 빵집이 출자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소방업자들이 출동하지 않아 화재가 크게 번졌다.

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울화의 대상은 외국인가톨릭 교도에게로 돌아갔고 분노한 대중은 이게 다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가톨릭 교도[3] 때문이라면서 거리에서 무차별 폭행했다.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시민의 분노가 왕실로 향할까 봐 사실상 폭동을 방치했고 화재 범인으로 프랑스인 시계공 로베르 위베르가 잡혀 고문 끝에 자기가 범인이라고 실토했으나, 사실 그는 화재 발생 이틀 뒤에 런던에 도착했고 이 사실은 그가 사형당하고 나서야 알려졌다. 이 사건이 있고 200년 뒤에도 사건 애도 추모비에 '이게 다 가톨릭 교황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하고 300년이 지난 1986년에야 실제로 화재 원인을 제공했던 빵집 주인의 후손이 사과하며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몇 세기가 지난 후, 일본의 관동대지진에서도 이 누명이 재현되고 만다.

발화지점인 런던 푸딩레인에는 현재 대화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런던 지하철 Monument역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역 이름인 Monument가 바로 런던 대화재 기념비를 뜻하는 말이다. 기념비는 62미터 높이의 탑으로, 대화재 11년 후인 1677년 준공되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이 건설하였다. 약 20층 아파트에 해당하는 높이이므로 옛날에는 마치 마천루와 같은 랜드마크였지만 현재는 주변에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멀리서는 꼭대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입장료를 내면 내부의 나선 계단을 통해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중간에 쉴 틈도 없이 311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 해서 매우 힘들지만 템스 강과 시티 오브 런던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1] 광역화된 지금의 그레이터 런던이 아닌, 시티 오브 런던과 그 인근지역.[2] 당시만 해도 시장은 화재를 우습게 보곤 이 불은 아녀자의 오줌으로도 금세 제압될거라며 가볍게 여겼지만 그 결과는 알다시피...[3] 그런데 정작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다... 거기다 당시 국왕 찰스 2세가 가톨릭교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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