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레넥톤은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나이 많은 형들과도 자주 싸움을 벌였다. 그 어떤 모욕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덕분이었다. 형 나서스는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레넥톤은 싸움을 즐겼다. 나서스가 명문 '태양의 신학교'에 입학하며 집을 떠나자 레넥톤의 폭력 행위는 더욱 심각해졌다. 나서스는 동생의 폭력성이 감옥살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여 동생이 슈리마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레넥톤은 군인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나서스의 영향력 덕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군대에서의 훈련은 축복이었다. 레넥톤은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몇 번이고 싸웠다. 여전히 거칠고 사나웠지만 신의와 용맹함으로 유명해졌다. 이름 높은 장군이자 전술가가 된 나서스는 수많은 대전투의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실전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레넥톤이었다. 이후 외딴 도시 주레타를 구한 레넥톤은 황제의 지시로 대위의 자리에 올라 '슈리마의 수장'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레넥톤과 몇 안 되는 병사들은 백성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남쪽으로 이어지는 오지의 험난한 길에서 열 배나 많은 적군과 대치했다. 승리는커녕 아무도 레넥톤이 살아 돌아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전투였다. 하지만 레넥톤은 나서스가 이끄는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텼고, 침략군은 대패했다. 수십 년 동안 활약한 레넥톤의 명성은 초월체 군단의 신성전사와도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전장에서 레넥톤은 존재만으로 아군에게 귀감이 되었고, 적군에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무수한 전투로 굳은살이 배기고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할 무렵, 레넥톤은 형의 병중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 다시 만난 형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어 있었다. 불치의 병환이었다. 그러나 나서스의 위대한 업적만큼은 바래지 않은 채로 온 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나서스는 군사적 수완도 뛰어났지만 제국의 대도서관을 관리하며 여러 고전 문학 작품을 편찬하거나 번역하기도 했다. 그런 이를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나서스는 초월 의식을 치를 자격을 인정받았다. 초월 의식을 보기 위해 도시 전체가 한자리에 모였지만, 나서스는 제단으로 올라가 태양 원판 앞에 설 힘이 없었다. 레넥톤은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은 생각하지 않고 두 팔로 형을 들어 안은 채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레넥톤은 결국 군인일 뿐이었다. 그는 슈리마에 나서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넥톤은 파괴되지 않았다. 태양 원판의 눈부신 빛 속으로 두 형제가 모두 떠올라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빛이 가셨을 때, 군중의 눈앞에는 장대한 두 신성전사가 서 있었다. 나서스는 단단한 몸에 자칼 형상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레넥톤은 거대한 악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칼은 가장 영리하고 총명한 짐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악어의 대담한 공격 방식은 레넥톤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훌륭한 영웅이었던 레넥톤은 필멸자로선 상상도 못 할 새로운 힘까지 갖추게 되었다. 레넥톤의 지휘 아래 슈리마군은 수많은 유혈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단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상대로부터 자비를 바라는 법이 없었다. 레넥톤의 전설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널리 퍼져 나갔고, 적군들은 그를 '사막의 도살자'라 칭했다. 레넥톤이 듣기에도 싫지 않은 별명이었다. 하지만 나서스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초월체가 된 레넥톤의 인간성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레넥톤은 해가 갈수록 잔인해져 살육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그가 전장에서 저지른 갖가지 잔혹 행위를 놓고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레넥톤은 슈리마의 충실한 수호자로 남아 이케시아의 반란과 뒤이어 일어난 끔찍한 전쟁에도 자리를 지키며 여러 황제를 섬겼다. 시간이 흘러 젊은 황제 아지르는 초월체 군단에 들어가 슈리마의 백성에 어울리는 불멸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레넥톤과 나서스는 수도에서 하루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형제가 도착했을 때 슈리마의 찬란한 수도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힘을 빼앗긴 태양의 원판도 추락하고 있었다. 대학살의 중심에서 두 형제는 황제를 기만하고 사악한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된 마법사 제라스를 발견했다. 형제는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제라스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넥톤은 도시 밑에 있는 황제의 능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간 뒤 형에게 고분을 봉인해 달라고 외쳤다. 다른 묘안이 없음을 알고 나서스는 마지못해 동생의 뜻을 따랐다. 제라스와 레넥톤은 싸움을 이어 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숙한 곳에서 서로를 노리며 무수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깥세상에서는 슈리마의 거대 문명이 모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제라스는 사악한 거짓말을 속삭여 레넥톤을 도발했다. 제라스의 독사 같은 속삭임은 서서히 레넥톤의 영혼을 잠식해 갔다. 제라스는 레넥톤의 성공을 시기하던 나서스가 기회가 오자 혼자 불멸의 생을 누리려고 그를 제거한 것이라며 레넥톤을 세뇌했다. 레넥톤의 정신에 시나브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라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점점 더 깊이 쐐기를 박았다. 레넥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탐욕스러운 필멸자들이 도굴을 노리고 황제의 능을 열자 레넥톤은 분노로 포효하며 형의 냄새를 찾아 사막 위를 질주했다. 하지만 레넥톤이 갇혀 있던 사이 슈리마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초월체 군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은 대다수가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레넥톤은 무리를 이끄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사막의 약탈자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피에 굶주린 이들이 찾아와 레넥톤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들은 레넥톤이 종종 미친 듯이 광분하며 피아 식별을 하지 못해도 개의치 않았다. 지난 날 의기양양하던 명예로운 영웅의 모습이 엿보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 뿐, 이제 레넥톤은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피와 복수를 갈구하는 미친 야수와 다를 바가 없다. |
2. 어둠의 속삭임
‘나는 신인가?’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한때는 신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 위대한 일만 기둥의 궁전 꼭대기에 태양의 원판이 황금처럼 빛나던 시절에는. 그때 레넥톤은 다 죽어가던 고대인 한 명을 품에 붙든 채 햇빛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고, 둘이서 함께 빛 속에서 모든 상처와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 기억은 레넥톤 자신의 것이 맞나? 그가 필멸자였을 때 겪었던 일일까? 아마도 그런 듯했지만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로 뒤죽박죽이었다. 사막의 공기에 뿌옇게 들끓는 파리떼처럼 기억들이 웅웅거리며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현실인가? 지금 나는 무엇인가?’ 지금 레넥톤은 사막의 지하 동굴에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맞을까? 아마도 그런 듯했지만 자신의 감각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레넥톤은 한없이 오랫동안 장막 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어둠이 흩어지면서 그는 빛의 세계로 내던져졌다. 마구 쏟아지는 모래를 헤치며 정신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보니, 땅이 살아 움직이듯 요동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하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가 지표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석상들이 모래를 뚫고 솟아나왔다. 괴물 같은 머리가 달린 전사들의 형상이었는데, 고대의 신들을 묘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뒤이어 악의를 품은 유령들이 지하에서 속속 올라와 레넥톤을 덮쳐왔다. 사방에서 빛이 번뜩이고 하늘의 달들과 별들이 빙빙 도는 가운데, 그는 부활하는 고대의 도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다가 사막 한복판에서 비틀거리며 멈춰섰을 때는 눈앞에 온갖 환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수많은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으리으리한 궁전과 황금빛 신전, 살육과 배신의 현장이 보였다. 그리고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이 고작 한 사람의 허영심과 자만심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광경도... 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넥톤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공포만큼은 너무나 생생했다. 예전에는 빛이 그의 몸을 치유해 주었는데, 이제는 빛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홀로 사막을 방황하다 보니 눈부신 뙤약볕에 살갗이 그을릴 뿐 아니라 영혼까지 타들어가는 듯했다. 자꾸만 북받치는 증오심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햇빛을 피해 이 지하 동굴로 피신했는데, 여기 웅크려 앉아 울고 있으니 이번에는 귓가에 웬 속삭임이 들려왔다.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레넥톤을 에워싸고 수군거리면서 그의 서러움을 부추겨대는 것이었다. 레넥톤은 갈고리 모양의 검은 손톱이 달린 길고 울퉁불퉁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누르며 자기 자신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둠 속에 도사린 그 속삭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다. 그 속삭임은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레넥톤이 어떤 일에 실패하는 바람에 수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마음 한편에서는 그 이야기가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레넥톤의 구미에 맞게끔 꾸며지고 왜곡된 허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제는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모조리 헷갈렸다.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자신이 어둠 속에 갇혔던 순간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빛이 사라지던 광경도, 그 빛 너머에서 레넥톤을 내려다보던 한 자칼의 얼굴도... 그 자칼이 바로 레넥톤을 영겁의 어둠 속에 처박은 배신자였다. 불현듯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레넥톤은 분에 받쳐 눈물을 문질러 닦아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레넥톤의 정신으로 침입하는 모든 통로를 훤히 아는 것 같았다. 한때 확고했던 신념도, 미덕도 모두 그 속삭임 때문에 망가져버린 것 같았다. 슈리마?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름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광기의 베일에 싸인 채 신기루처럼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한때는 꿰뚫어보는 듯 날카롭고 형형했던 그의 눈동자는 억겁의 시간에 걸친 어둠 속에서 뿌옇게 흐려져버렸다. 단련된 구리처럼 매끄럽고 튼튼했던 그의 피부는 이제 둔탁해지고 여기저기가 갈라져버렸다. 사형 집행인의 모래시계 속에서 모래가 떨어지듯, 그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에서 먼지가 풀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는다고 해도 별 유감은 없었다. 이미 너무 오래 살았고, 소멸될까 봐 두려워 떨며 지낸 세월도 너무 길었다. 그런데 자신이 과연 죽을 수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레넥톤은 자신의 앞에 놓인, 손잡이가 없는 초승달 모양의 도끼 한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이케시아의 전사 왕이 쓰던 것이었다. 레넥톤이 그 왕의 군대를 격파했을 때 이 도끼의 자루도 함께 부서졌던 것이 언뜻 기억났다. 그래서 레넥톤이 자루를 다시 만들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걸로 자결해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둠 속의 속삭임은 레넥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복수를 해야 한다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그게 레넥톤의 운명이라고. 그를 어둠의 구렁텅이에 처박았던 자칼의 얼굴이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자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동굴 벽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들이 별안간 흩어지면서 벽화가 드러났다. 아득히 먼 옛날 필멸자들이 그려놓은 조잡한 낙서들이었다. 여기저기 벗겨지고 빛이 바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지만, 예전에 레넥톤이 보았던 그 사막 도시의 전성기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둥들이 늘어선 수로를 따라 맑고 차가운 강물이 흐르고, 햇빛을 듬뿍 받은 비옥한 토양이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 높다랗게 우뚝 선 궁전 꼭대기에는 독수리 모양의 투구를 쓴 왕이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짙은 빛깔의 로브를 뒤집어쓴 형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아래에는 전쟁용 갑옷으로 무장한 거인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초승달 모양의 도끼를 들고 구부정히 몸을 구부린 악어 같은 외모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전사이자 학자의 풍모를 갖춘 자칼이었다. 레넥톤은 악어 거인 쪽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 벽화를 그린 필멸자가 초월자인 레넥톤에게 느꼈던 경외심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 옆의 자칼은 분명 레넥톤을 배신한 그자일 것이다. 레넥톤은 자칼의 형상 아래에 새겨진, 다 지워져가는 희미한 글자를 읽어보았다. “나서스... 형.” 그 이름을 본 순간, 먹구름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듯 자신의 정체가 기억났다. “나는 사막의 도살자, 레넥톤이다.” 레넥톤은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며 초승달 도끼를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자 오랜 세월 몸에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해묵은 상처들이 치유되고, 찢어진 피부가 재생되고, 살가죽에 본래의 옥색 빛깔이 되돌아오고 탄력이 살아났다. 레넥톤은 비로소 자신의 소임을 찾았다. 한때 그는 빛을 통해 소생했지만, 지금은 어둠이 그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막강한 육체에 어마어마한 힘이 넘쳐흐르고, 근육이 팽창하고, 눈은 나서스에 대한 증오로 붉게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또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레넥톤은 이제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도끼날을 어루만지며 자칼 전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은 나를 배신하고 어둠 속에 혼자 버려뒀지. 그 대가는 죽음으로 치르게 해주겠어.” |
3. 이빨
사막에서 장작은 귀했다. 하지만 검게 물든 베커라의 폐허에는 모닥불에 던져 넣을 새까맣게 탄 목재가 많았다. 사막약탈단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벽 너머로 들어왔을 때 도시는 이미 지독한 폐허가 된 후였다. 텅 빈 거리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매로우마크에서 잡아 온 포로들은 고대 신의 노여움이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했다. 라즈 블러드메인은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오아시스와 모닥불에 모인 사람들이 돈 대신 거래하기도 하는 슈리마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살이 붙으며 왜곡되곤 했다. 이야기는 전달될 때마다 소름 끼치는 묘사가 덧붙으며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신은 모래 위를 걷지 않아. 그러는 것은 인간과 괴물뿐이지.' 사막약탈단 단원들은 인간이자 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대한 사우렌 도마뱀을 타고 다니는 이 잔인한 약탈자들은 돈을 노리며 사이 칼리크의 흙길을 공포에 몰아넣거나 노래의 계곡에서 재미로 샤칼 비적을 사냥하곤 했다. 남쪽의 기온이 떨어지자 약탈단의 먹잇감 추적자 사이 서사는 무리를 이끌고 더 따뜻한 북쪽으로 올라가 대사막의 중심부에 새롭게 떠오른 수도를 찾아 이동하는 상단을 습격했다. 이런 행렬에는 뚱뚱한 상인과 사제, 절박하고 뭐든 쉽게 믿는 자가 많았다. 지진 때문에 땅속에 묻힌 도시가 드러난 게 아니라 고대의 황제가 사라진 제국을 되찾으려고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한 자들이었다.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매복한 사막약탈단이 사막 폭풍에서 튀어나오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입과 사방을 꿰뚫는 창이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맞서는 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항복한 자는 굶주린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라즈는 줄에 묶인 사우렌이 모닥불을 향해 입질하며 으르렁거리자 씩 웃었다.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거대한 파충류 모습의 사우렌은 햇볕에 말라 딱딱해진 비늘로 옆구리가 덮여 있었다. 땅에 스칠 듯 굴곡진 배는 모래에 쓸려 단단했다. 사우렌의 꼬리가 이 저주받은 도시에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를 내리쳤다. 폐허 곳곳에는 유령이 도사렸다. 산산이 부서진 돌을 통과하는 차가운 바람에는 죽어 가는 자의 메아리가 실려 왔고, 벽에는 마치 그림자를 그린 듯한 실루엣이 그을려 있었다. 이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사이 서사가 쪼개진 지붕보를 가장 큰 모닥불에 던졌다. 밤하늘로 불똥이 일자 사이 서사 앞에 반딧불이가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다. 라즈도 힘이 셌지만 저 지붕보를 쉽게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골 가면을 쓴 바스타야 사이 서사는 저 무거운 목재가 잔가지라도 되는 듯 쉽게 들어 올렸다. 인간의 것이 아닌 육체에 지붕보의 어마어마한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즈는 어둠에서 잠시 깜빡거리던 불똥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뭔가 알 듯 말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위에 뭐 있어요?" 아눅타가 라즈의 시선을 따라 위를 보며 말했다. 아눅타가 움직이자 갑옷의 비늘 판금이 부딪히며 쇳소리가 났다. 가운데 붉은 머리만 남기고 빡빡 민 머리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아눅타의 얼굴 문신이 불빛에 비쳐 빛나자 마치 뼈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불똥 말이야. 아주 밝게 타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더군." "그게 왜요?" 라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갑자기 현자라도 됐어요? 응고지처럼?" "아니, 응고지는 무슨. 하지만 불똥은 살아서 타다가 사라지잖아. 마치 우리 인생처럼. 우리도 불똥과 다를 바 없어." 아눅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눅타의 귀에 걸린 상아 고리가 술 취한 달처럼 흔들렸다. "네, 응고지는 전혀 아니네요. 응고지는 정말 똑똑했거든요. 부관님은 그냥 말만 그럴듯하고요." 라즈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지는 모습에 아눅타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은 아눅타가 가슴 위로 팔을 교차하고 엄지손가락을 잽싸게 손바닥에 대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이 서사의 부관인 라즈 블러드메인은 이빨로 가득한 사우렌 무리의 긴 주둥이에 자신을 던져 버릴 수도 있는 자였다. 운이 나쁘면 사이 서사가 타고 다니는 마카라의 먹이가 될지도 몰랐다. 마카라는 10m가 족히 넘는 길이에 꼬리부터 세 개의 거대한 머리까지 날카로운 비늘이 박힌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우렌이었다. 하나같이 길쭉한 턱은 말도 한입에 삼킬 정도로 커다란 데다가 갈고리 모양의 이빨까지 잔뜩 박혀 있었다. "사냥 전날 밤이야. 이런 밤에는 길에서 잡은 고기만 죽이지. 관례를 바꾸게 하지 마." 아눅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얼마 전 잡은 포로들이 모여 있는 부서진 곡물 저장고로 향했다. 케네세트의 북쪽 모래 언덕 길에서 데려온 이들은 새 황제를 보러 남쪽으로 순례를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그중 넷은 이미 마카라가 집어삼킨 상태였다. 남은 다섯은 비쩍 말라 요깃거리도 안 될 듯했다. 적어도 넷은 그랬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하나는 도시에서 살았는지 피부가 좋고 이도 전부 제대로 나 있었다. 허리를 보아하니 배를 곯아 본 적도 없어 보였다. "저놈." 라즈의 말에 아눅타가 남자를 라즈의 발치로 끌고 갔다. 남자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다른 포로들은 남자가 끌려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남자가 북쪽 해안 지대 특유의 강약 없는 억양으로 말했다. "돈이라면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제발 절 짐승에게 먹이지 마십시오!" "순례자치고는 너무 잘 먹은 것 같은데." 라즈가 남자의 뚱뚱한 배를 찌르며 말했다. "순례자라뇨? 아니, 전... 그게..." 아눅타가 남자의 등에 창끝을 들이밀었다. "뭐하는 놈이야? 빨리 말해, 멍청아!" "전 오단 스틸라바입니다. 벨준에 있는 멜리락스 사원의 대원로이지요."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원하시는 건 뭐든 드리겠습니다.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사제라고?" 라즈가 몸을 가까이 기울여 남자를 휩싸고 있는 공포의 냄새를 만끽했다. "사제는 신의 충실한 종이라고들 하더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말이야. 당신은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 같지 않은데, 오단 스틸라바." "죽여 버려요." 남은 포로 중 한 명이 말했다. "이왕이면 천천히요." 라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행들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저 뚱뚱한 돼지가 아지르가 있는 남쪽으로 데려다준다면서 우리 돈을 가져갔어요!" 여자가 내뱉듯 말했다. "우리가 굶주릴 때 혼자만 잔뜩 처먹고. 음식을 달라고 애걸하니 저자의 수행단이 우릴 두들겨 팼어요. 하루만 더 있었으면 우린 사이 사막에서 굶어 죽었겠죠." 라즈는 여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늑대처럼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와 황혼 같은 피부색을 지닌 여자의 눈이 이글거렸다. "넌 누구지?" "달리아예요. 모래와 태양의 자랑스러운 딸이죠." "물과 그림자가 함께하기를, 달리아. 손바닥 좀 보여 줘." 달리아는 거친 밧줄에 묶여 있는 손을 내밀었다. 라즈의 손끝이 군데군데 딱딱해진 달리아의 손바닥을 지나 엄지손가락 끝을 쓸었다. "너도 순례자가 아니군. 이건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이야." 달리아가 손을 잡아 뺐다. "넌 뭐였지? 상단 경비? 도굴꾼? 용병?" "셋 다 해 봤어요." 라즈가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자를 사우렌에게 먹일까?" "네. 발부터요." 웃음을 터뜨린 라즈가 칼을 뽑았다. 케수의 깨진 이빨을 깎아서 만든 칼이었다. 라즈의 사우렌은 마카라처럼 크지 않았고 머리도 하나뿐이었지만 이빨만큼은 마카라 못지않게 길고 날카로웠다. "마음에 드는 여자야." 라즈가 아눅타에게 말하며 들쭉날쭉한 칼날로 달리아의 밧줄을 톱질하듯 잘랐다. "따라 와." 달리아가 일어서자 몸을 돌린 라즈가 저항하는 오단 스틸라바를 끌고 갔다. "시키는 대로 하면 살 수도 있어." 아눅타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라즈가 고기를 가지고 다가오는 모습을 본 사우렌이 목청을 높이며 그르렁거렸다. 당기는 힘이 세지자 사슬 목줄이 팽팽해지며 안쪽으로 박혀 있는 징이 비교적 부드러운 목살을 파고들었다. 케수가 라즈를 보더니 먹이를 기대하며 입을 쩍 벌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베커라의 나무가 사막 노을 같은 핏빛으로 타올랐다. 내일 여정이 잘 풀릴 것이라는 징조였다. 빛은 다른 단원들을 비추었다. 모닥불 주위로 스물세 명의 전사가 이리저리 쌓인 잔해와 돌덩어리, 폐허에서 끌고 온 벤치로 대충 만든 투기장 주변에 늘어져 있었다. 가벼운 천, 모피, 삶은 사우렌 비늘 갑옷을 두른 그들은 마지막 남은 소금 친 스칼라시 고기와 발효한 에카설 우유로 만든 독주를 양껏 먹고 마셨다. 최근 습격에서 약탈해 온 것이었다. 휘어진 칼과 이빨을 단 창으로 무장한 이들의 이름은 사이 사막의 흙길을 가로지르는 상단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장 기후가 혹독한 지역에서 수년간 약탈과 살인을 이어 온 이들은 거칠고 자비 없으며 변덕스럽고 오만해졌다. 그러나 사이 서사만큼은 아니었다. 사이 서사는 상상 이상의 열기에 유리로 녹아내린 돌 더미 위에 왕이라도 된 듯 앉아 있었다. 라즈보다 키가 절반은 더 큰 약탈단의 우두머리 사이 서사는 동쪽에서 온 바스타야로 바위 같은 사자의 머리와 근육질 몸을 가진 육중한 체구였다. 길게 기른 두툼한 갈기는 강철 끈과 마법의 힘이 담겨 있다는 부적에 엮여 가닥가닥 땋여 있었다. 길게 째어진 사이 서사의 노란 눈이 라즈가 다가오는 모습에 가늘어졌다. "뭘 가져왔지, 라즈 블러드메인?" "신선한 고기입니다." 라즈가 아눅타에게서 오단 스틸라바를 낚아채며 외쳤다. "기만으로 가득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영혼이죠." "마카라가 좋아하는 것이군." 사이 서사가 발톱이 달린 손을 뻗어 가까운 마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카라가 세 개의 입을 쩍 벌리고 그르렁거리며 쉭쉭 소리를 냈다. 누런 송곳니 사이로 썩은 고기 조각이 낀 게 보였다. 분홍빛 목구멍은 불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타르 구덩이 같은 여러 개의 눈은 굶주림으로 번뜩였다. 마카라는 이미 사이 서사 몫의 포로를 잡아먹었지만 그 식욕에는 끝이 없었다. 마카라는 사우렌 중 서열이 가장 높았다. 따라서 다른 사우렌은 마카라가 배불리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라즈는 오단 스틸라바를 모닥불 옆의 원형 전투장으로 밀어 넣었다. 가장자리에 머리뼈가 널려 있는 전투장의 안쪽 모래는 붉은색을 띠고 끈적거렸다. 오단 스틸라바가 꼴사납게 나자빠지며 무릎으로 허둥지둥 일어나자 사이 서사가 그 앞에서 기도라도 하듯 양손을 움켜쥐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오단 스틸라바가 울부짖었다. 사막약탈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카라가 먹음직스러운 고기에 이성을 잃고 목줄을 세게 당겼다. 사이 서사가 사슬 목줄을 홱 잡아당겼지만 오단 스틸라바를 향한 마카라의 식욕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 한번 가지고 놀아 봐라, 라즈 블러드메인! 우리를 즐겁게 해 봐!" 사이 서사가 명령했다. 라즈는 일어서려던 오단 스틸라바의 등을 찼다. 그리고 두 팔을 높이 든 채 활짝 웃으며 원형 전투장을 천천히 돌았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먹잇감은 모두 소진되었다. 다시 사냥에 나설 시간이다!" 환호성이 다 허물어진 도시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주먹과 창이 허공을 찌르는 것과 함께 사우렌의 포효가 울렸다. "동쪽과 북쪽에서 오는 상단은 물과 그늘을 찾아 흙길을 오가지!" 라즈가 전투장 둘레를 따라 활보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결국 무엇을 찾게 될까?" "죽음!" 사막약탈단이 함성을 질렀다. 라즈가 귓가에 손을 대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뭐라고?" "죽음!" "다시!" 라즈가 집요하게 요구했다. "죽음! 죽음! 죽음!" 라즈가 씩 웃더니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베커라가 정적에 잠겼다. 이따금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오단 스틸라바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 그들은 죽음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도 모두 죽음을 찾게 되겠지. 하지만 자칼이 우리를 태양 없는 땅으로 데려가기 전에 우리는 적을 죽이고 약탈할 것이다. 힘없고 나약한 것은 벌을 받는 세상이다. 그러니 모두에게 이 제물을 바치겠다!" 사막약탈단이 함성을 지르자 라즈가 오단 스틸라바에게 곧장 다가와 손목에 묶인 밧줄을 끊었다. 환한 표정으로 고맙다며 흐느끼던 남자는 라즈가 손에 날이 들쭉날쭉한 칼을 쥐여 주자 얼굴을 굳혔다. "아니, 이게 무슨..." "가도 좋아." "가도 좋다고요?" 스틸라바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정말입니까?" "맹세하지. 전투장 밖으로 발을 내딛기만 한다면 그냥 보내 주겠어." 라즈는 남자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물러나며 떨고 있는 포로로부터 등을 돌렸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포착한 스틸라바는 단검을 높이 들고 라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지막 순간, 라즈는 몸을 슬쩍 움직여 칼날을 피한 후 휙 돌아 스틸라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스틸라바는 손에 쥔 단검을 놓치며 다리를 저는 짐승처럼 쓰러졌다. "일어나." 라즈가 단검을 차서 가까이 보냈다. "부탁입니다." 스틸라바는 무기를 무시하며 말했다. "가도 좋다고 했잖습니까." 스틸라바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부러진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술 위를 적셨다. 라즈는 스틸라바를 일으켜 세운 후 다시 손에 칼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이 이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야. 신들이 보고 있다고. 이런 식으로 신을 마주하고 싶나? 궁상맞게 질질 짜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최선을 다하면 신들이 당신 영혼을 돌봐 줄지도 몰라!" 스틸라바의 눈에 증오심이 짙어졌다. 라즈는 스틸라바가 배를 노리고 칼을 찔러 오자 뒤로 휙 물러났다. 그다음은 위쪽으로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 맨손으로 공격을 쳐 낸 라즈는 스틸라바가 미치광이처럼 칼을 휘두르자 몸을 휙 돌리며 거리를 벌렸다. 스틸라바의 실력은 좋고 나쁘고를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접시에 놓인 고기를 썰 때 외에는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라즈가 서투른 공격을 손쉽게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찔러 봐!" 그때 스틸라바의 뒤로 케수의 머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케수는 평소와 전혀 다른 소리로 끊임없이 그르렁거렸다. 라즈는 방어구를 두른 팔뚝으로 위에서 내리치는 공격을 막은 후 스틸라바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스틸라바는 허리를 숙이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지만 전과 달리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라즈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이 서사를 힐끗 쳐다봤다. 어느새 일어선 사이 서사는 도시 성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라즈는 몸을 돌렸다. 모닥불의 빛 뒤로 보이는 그림자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금빛 광택이 반짝였다. 그 형태는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과 비슷했지만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컸다. 그때 뭔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왔다. 그 물체는 라즈의 머리 위를 지나 모닥불 근처에 떨어졌다. 전투장을 둘러싼 전사들은 놀라서 소리치며 자신의 무기로 손을 뻗었다. 피 냄새를 맡은 사우렌 무리는 미친 듯이 사슬 목줄을 잡아당겼다. 라즈는 그 물체의 정체를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도시의 서쪽 성문을 경계하라고 보냈던 전사, 욱셈 하트스플리터였다. 성한 곳이 하나 없었다. 몸 주위가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어 갔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욱셈이 눈을 깜빡이더니 마치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모래를 할퀴는 것이다. 욱셈에게 한 걸음 내디딘 라즈는 옆을 스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오단 스틸라바!' 정신이 딴 데 팔린 라즈는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목표를 빗나간 공격에는 힘조차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칼은 치명상을 입히는 대신 라즈의 둔부를 살짝 스쳤을 뿐이었다. 몸을 돌린 라즈의 눈에 자신의 칼을 쥔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오단 스틸라바가 원형 전투장 가장자리를 넘어가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자유다! 밖으로 나왔으니 날 놔주시오! 약속했잖습니까!" 라즈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케수. 죽여." 곧바로 고개를 돌린 오단 스틸라바는 거대한 사우렌이 송곳니가 달린 입을 쩍 벌리고 돌진해 오는 모습을 보았다. 입은 순식간에 닫혔다. 이제 이 세상에 오단 스틸라바는 없었다. 모래에 남은 발자국만이 방금까지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었다. 라즈는 머릿속에서 오단 스틸라바에 대한 생각을 밀어냈다. 도시 경계에 있던 그림자가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숨이 턱 막혔다. '신은 모래 위를 걷지 않아. 그러는 것은 인간과 괴물뿐이지...' 이러한 라즈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이었다. 그것은 서서 걷는다는 것 외에는 인간과 비슷한 점이 전혀 없었다. 등이 굽었는데도 사이 서사보다 머리가 반 정도는 더 큰 존재의 뒤로 두꺼운 꼬리가 질질 끌렸다. 칙칙한 금과 녹슨 청동으로 만든 갑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두 눈은 황달에 걸린 듯 누랬고, 초록색과 황토색이 섞인 피부는 주름투성이였다. 무시무시한 머리를 숙인 악어의 주둥이가 신선한 고기를 찾아 킁킁거렸다. 라즈는 그의 정체를 알았다. 가라앉은 사원 벽에 저것과 닮은 존재가 새겨져 있었다. 라즈는 자신의 창날에 그것을 직접 새기기도 했다. 오아시스 주변에서는 그의 이름을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눈이 멀었지만 고대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으며 진실만을 말하고 다닌다는 방랑자 마크루는 그 신의 업적을 이야기하며 억제되지 않은 공격성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했다. "아지르의 전령..." 고개를 쭉 뺀 아눅타가 경탄했다. "레넥톤..." 달리아가 말했다. 그 이름을 들은 거대한 존재가 달리아 쪽을 휙 돌아보며 등에서 커다란 초승달 검을 빼냈다. 스칼라시도 반으로 가를 듯한 무기였다. "놈은 어디 있지?" 레넥톤이 물었다. 영겁의 시간 동안 비명을 질러 거칠어진 레넥톤의 목에서는 건조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눈앞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신이 있는데도 달리아는 꼿꼿이 서 있었다. 반면 사우렌은 복종의 의미로 배를 모래에 붙이고 눈을 뒤집은 채 낮게 그르렁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마카라조차 머리 셋 달린 몸을 낮추었다. 라즈가 보게 되리라고 생각지도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라즈는 옆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잊은 채 그 옆에서 함께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원형 전투장 주위에 모인 사막약탈단이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본 라즈의 입가가 경멸로 말려 올라갔다. 굴복은 약자나 하는 짓이었다. 존중은 피로써만 얻을 수 있었다. 레넥톤은 전사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다가왔다. 사이 서사가 왕좌에서 내려오자 그제야 위를 보고 그들의 존재를 인식했을 뿐이었다. "난 사막약탈단의 먹잇감 추적자 사이 서사다." 사이 서사가 말하며 마카라의 안장에서 사우렌 비늘 방패를 끌렀다. "감히 내 도시에 들어와서 우리 단원을 죽이다니 배짱 한번 좋군." 레넥톤은 이제야 초토화된 주변이 보이는 듯 눈을 깜빡이며 폐허를 둘러보았다. "네 도시라고?" "오늘은 그렇지." 레넥톤의 무기에 맞먹는 검을 뽑아 든 사이 서사가 원형 전투장으로 들어섰다. "그렇다면 놈이 어디 있는지도 알겠군." 레넥톤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의식인 양 사이 서사를 따라 전투장으로 들어섰다. "통치자는 뭐든 알고, 뭐든 보는 법이니까! 거짓말쟁이들의 속삭임. 감언과 기만. 난 전부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라즈는 빙빙 도는 두 전사의 힘이 미치지 않게 아눅타와 달리아가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레넥톤의 말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라즈는 두 거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찾는 게 누구지?" 사이 서사가 검을 돌리며 말했다. "배신자!" 레넥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믿음을 저버린 내 형제! 놈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 사이 서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꽝 울리는 소리가 베커라의 무너진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언제나 피에 목말라하는 사이 서사는 어디서든 즐길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사이 서사가 사냥꾼의 눈으로 약점과 허점을 찾으며 레넥톤의 몸을 눈여겨보았다. "자칼? 나서스 말인가?" 레넥톤은 전설과 다름없는 형제의 이름이 나오자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 초승달 검을 쥔 손의 힘이 풀렸다. 레넥톤은 알 수 없는 광기에 발톱 달린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그 이름을 말하지 마." 레넥톤이 경고했다. 건조하게 긁히는 낮은 목소리는 다가오는 모래 폭풍의 위협처럼 위험하게 들렸다. "놈은 분명히 여기 있었어. 마법이 깃든 초월체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 있다. 이곳에서만 말이야. 내 형제와 어둠에서 속삭인 그자가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어. 사막의 모래가 나를 불렀다. 웅얼거리는 바람은 놈이 온다고 알려 주었지. 이제 죽고 싶지 않다면 놈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답을 알려 준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지?" "대가 따윈 없다. 사지를 멀쩡히 놔두는 것 정도는 고려해 보지." 사이 서사는 고개를 젓더니 반의반 바퀴를 돌며 검을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앞으로 방패를 뻗었다. 레넥톤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시무시하면서도 어쩐지 침울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내게 맞설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초월체다. 인간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지!" "늘 신을 죽여 보고 싶었는데." 사이 서사가 검을 휘둘렀다. 룬 문자가 새겨진 검에는 죽은 자에게서 잘라 온 주물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게 제정신이 아닌 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사이 서사는 선명한 진홍색 흉갑을 검으로 치며 말했다. "무한 평원에 있는 무덤에서 가져온 검이다. 이 갑옷은 고대 전사의 해골에서 벗겨 온 것이지. 그 해골, 크기가 당신과 비슷하더군. 동족의 물건으로 죽여 주지." 분노에 찬 포효를 한 레넥톤이 사이 서사를 향해 튀어 나갔다. 사이 서사의 방패에 초승달 검을 후려치자 깨진 비늘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이 서사가 반격하자 레넥톤의 기세가 주춤했다. 레넥톤이 비틀거렸다. 사이 서사가 검으로 레넥톤의 늑골을 공격하자 검은 기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레넥톤이 반격했지만 검은 다시 방패에 막혔다. "놈이 만든 폐허를 꿰차고 내 복수를 막다니!" 레넥톤이 포효했다. 또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레넥톤은 휘청거린 후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리를 유지했다. 레넥톤의 눈에서는 전에 없던 존중이 보였다. 싸움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레넥톤의 예상과 달리 사이 서사는 엄청난 힘과 실력을 지닌 전사였다. 게다가 무기와 갑옷도 레넥톤의 것과 비등한 수준이었다. 어느새 일어난 사막약탈단 단원들은 무기를 들고 허공을 찌르며 우두머리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사이 서사가 달려들어 레넥톤의 어깨와 얼굴을 향해 이빨 박힌 방패를 날렸다. 레넥톤은 사이 서사를 떨쳐 내고 날쌔게 비켜섰다. 큰 체구치고는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였다. 레넥톤의 꼬리가 날아오자 몸을 숙여 피한 사이 서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패로 레넥톤의 방어를 무너뜨린 후 레넥톤을 원형 전투장 반대편으로 메다꽂았다. 모닥불 위로 떨어진 레넥톤이 몸을 굴렸다. 레넥톤의 살이 불에 검게 그을리며 어둠 속으로 불똥이 날아갔다. 레넥톤은 머리를 흔들더니 침을 뱉었다. "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군!" 레넥톤이 고함을 질렀다. "네 눈에서 그 거짓말쟁이의 얼굴이 보인다. 어서 말해!" 사이 서사가 다시 달려들어 레넥톤의 옆구리를 감싼 황금 갑옷을 베었다. 레넥톤은 물러서는 대신 돌진하여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사이 서사를 내리쳤다. 사이 서사는 첫 번째 공격을 막아 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공격까지 피하진 못했다. 두 전사의 검이 맞부딪치자 허공에서 은색과 청동색이 뒤엉키며 치명적인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레넥톤은 전투장의 왼쪽으로 돌았다. 사이 서사는 오른쪽으로 갔다. 피투성이가 된 둘의 호흡이 거칠었다. 먼저 공격한 것은 사이 서사였다. 레넥톤은 발목으로 낮게 날아오는 공격을 쳐 낸 뒤 몸을 돌려 상대를 잽싸게 찔렀다. 그 충격에 사이 서사의 어깨에 달린 황금 보호구가 쪼개졌다. "전설에서는 당신이 위대한 전쟁의 신이라고 하더군." 사이 서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당신이 이케시아의 죽은 왕에게서 어떻게 그 검을 빼앗았는지, 어떻게 왕의 군대를 쳐부수고 검의 자루를 부쉈는지 들었어." 사이 서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낮은 곳까지 추락했는지,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되었는지도 말이야." 레넥톤이 으르렁거리며 돌진했다. 사이 서사는 첫 번째 일격을 방패로 막은 후 두 번째 일격을 검으로 받아쳤다. 세 번째 일격까지 쳐 낸 후에는 미끄러지듯 움직여 네 번째 일격을 피했다. 고대의 강철에서 끼익 긁히는 소리가 나며 옥빛 불꽃이 일었다. 그때 이빨이 사이 서사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사이 서사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꼬리에 후려 맞은 가슴이 붉게 물들었다. 두 전사는 뒤로 물러섰다.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겼다. 레넥톤은 붉어진 입으로 씩 웃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은 훔친 마법 덕분이다. 그게 없었다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테지." "어쨌든 이렇게 서 있잖아." 사이 서사가 조롱하듯 허리를 숙였다. 레넥톤은 손에서 손으로 초승달 검을 돌리더니 양손으로 꽉 붙잡고 사이 서사를 향해 내리쳤다. 방패로 검을 막은 사이 서사는 어마어마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사이 서사가 레넥톤을 지나쳐 구르며 검으로 레넥톤의 허벅지를 긁었다. 레넥톤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전투장 밖에서 지켜보던 라즈는 사이 서사가 싸움을 끝내길 바랐다. 쫓아가 결정타를 날리길 바랐다. 두 전사는 다시 거리를 좁혔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장례식 종소리 같았다. 사이 서사의 방패가 부서졌다. 레넥톤의 갑옷은 너덜너덜한 금빛 조각이 되어 늘어졌다. 레넥톤이 쿵쿵거리며 다가갔다. 이내 오래된 검의 끝이 사이 서사의 뺨을 깊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를 퉤 뱉어낸 사이 서사는 힘을 가득 실은 양 주먹을 레넥톤의 갈비에 꽂아 넣었다. 지독한 공격에 레넥톤이 휘청거렸다. 수 세기 동안 그 어떤 초월체도 겪어 보지 못했을 고통이었다. 레넥톤의 자세가 흔들렸다. 노란 눈은 뒤죽박죽 섞인 채 역사의 먼지가 되어 사라진 승리와 죽음의 기억과 환영을 되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부탁이야!" 레넥톤이 소리쳤다. "형제여! 저자는 너무 강하다! 이제 어쩔 수 없어!"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틈을 포착한 사이 서사는 레넥톤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검으로 공격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이 서사의 검이 레넥톤의 얼굴에 치명타를 가했다. 레넥톤이 고통에 신음하며 검을 마구 휘둘렀다. 어설픈 일격에 갑옷이 부서지고 사이 서사의 몸이 찢겼다. 사이 서사는 아랑곳 않고 다시 공격하여 레넥톤의 손목을 공격했다. 레넥톤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포효했다. 사이 서사가 레넥톤을 단단히 붙잡고 가슴을 정통으로 공격한 것이다. 사막약탈단이 환호했다. 라즈도 승리에 기뻐하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두 전사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얼핏 보면 포옹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검은 액체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자 모래가 쉬이이익 소리를 내며 유리처럼 변했다. 레넥톤은 엉망이 된 뺨을 사이 서사의 어깨에 기대었다. "내 형제가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되었을 것을... 이제 너무 늦었다." "뭐가 너무 늦었다는 거지?" 사이 서사가 검을 뽑아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 말이야." 레넥톤의 안에서 옅은 에메랄드빛이 차오르며 온몸으로 번지더니 강렬한 빛줄기가 여러 갈래로 터져 나왔다. 원형 전투장의 모래가 공중으로 떠올라 몸을 똑바로 세운 레넥톤 주위를 빙빙 돌았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베커라에 들어왔던 자가 아니었다. 라즈는 레넥톤의 진정한 모습을 목도했다. 오래전 잊힌 마법의 힘에 레넥톤의 형태가 부풀어 올랐다. 태양에서 흘러든 힘과 함께 레넥톤의 몸집이 커져 갔다. 레넥톤의 상처가 아물었다. 피부는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변하며 빛나는 활력으로 고동쳤다.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검은빛에서 선명한 붉은빛으로 바뀌더니 작은 루비 방울이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너덜너덜한 손은 제 모습을 찾아 갔고, 금과 청동 쪼가리로 갈가리 찢긴 갑옷은 번지르르한 밀랍처럼 흐르더니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광택을 되찾았다. 황달에 걸린 듯 누런빛이 돌던 눈은 이제 새로 태어난 별처럼 빛나며 이글거렸다. 맑은 눈에서는 더 이상 광기로 흐렸던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모든 전사가 다시 무릎을 꿇고 신의 자비를 빌었다.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라즈조차 이런 존재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에는 수치심이 들지 않았다. 이 존재를 빚은 힘이 타는 듯한 파동이 되어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눈앞의 존재는 경탄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 어떠한 전설도 이러한 힘을 지닌 신성전사의 진정한 모습을 담아낼 수는 없었다. 사이 서사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이 거대한 괴물 앞에서 검은 무용지물이었다. 레넥톤은 멀쩡해진 손을 뻗어 사이 서사를 들어 올렸다. 인간이 가장 왜소한 동물 새끼를 목덜미로 잡아 들어 올리는 모습과 흡사했다. "하찮은 필멸자여." 레넥톤의 목소리가 도시의 허물어진 벽에 반사되어 메아리쳤다. "나는 초월체다. 수많은 군대를 격퇴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성문을 봉쇄해 불을 질렀지. 나는 셀 수 없이 오래전에 세상을 파멸시켰다. 그런데 네가 그런 나와 맞서겠다고?" 레넥톤은 손목을 휙 꺾어 사이 서사의 몸을 마카라 쪽으로 던졌다. 커다란 마카라의 머리가 위로 향하더니 입이 콱 닫혔다. 세 개의 머리가 예전 주인을 먹어 치우자 라즈는 몸을 흠칫했다. 레넥톤이 몸을 숙여 사이 서사의 검을 회수했다. 대검은 레넥톤의 손에서 장난감 칼 같아 보였다. "이제 이 검의 주인은 누구지?" 라즈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것을 느꼈다. 사막약탈단 단원들은 사이 서사의 부관인 라즈를 바라봤다. 차가운 지방이 혈관을 막은 것처럼 피가 차갑게 식어 둔해진 느낌이었다. 라즈는 검을 쥐면 죽는다는 생각에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라즈가 앞으로 걸어갔다. 언젠가 사막약탈단을 이끌겠다는 꿈은 헛된 희망이 되고 말았다. "사이 서사는 당신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검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사막약탈단의 먹잇감 추적자입니다." "검을 든 무리를 이끌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 끝났다." 이글거리는 레넥톤의 눈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우울감이 얼핏 보인 것만 같았다. "군대나 추종자 따위는 필요 없다. 난 이 도시 너머에서 내 형제의 냄새를 찾아야 하거든. 내가 형제를 찾았을 땐 이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레넥톤은 라즈 쪽으로 사이 서사의 검을 던졌다. 검은 칼끝부터 모래에 꽂혀 잘게 떨렸다. "네 우두머리는..." 레넥톤이 라즈 쪽으로 발을 옮기며 말했다. "내 형제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나? 아니면 헛되이 죽은 것인가?" "그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라즈가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모래에 꽂힌 검을 뽑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뭘 하는 거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당신이 잠시나마 잊지 못할 대결을 펼치겠습니다. 절 죽이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레넥톤은 웃음을 터뜨리며 거대한 머리를 내저었다. "넌 내가 죽일 가치도 없는 존재다. 내가 찾는 것은 신의 심장이야. 이 검을 네게 건넨 것은 그저... 뭐라고 했지? 아, 그래, 이제 네가 먹잇감 추적자라는 의미였다." 검을 내린 라즈는 검날을 보던 시선을 들어 주위에 모여든 전사들을 바라봤다. 방금 레넥톤이 한 말보다 더 기쁜 말은 없었다. "레넥톤 님." 누군가 말했다. 몸을 돌린 라즈의 눈에 아눅타 옆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달리아가 들어왔다. "남쪽으로 가던 중 저희를 노예로 사로잡은 남자가 가라앉은 도서관을 찾는 필경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도서관은 지리마 너머 절벽 안에 숨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정말 형제분이 학식에 조예가 깊다면 그분도 그와 비슷한 장소를 찾아다닐지 모릅니다..." 레넥톤은 한숨을 쉬며 씁쓸한 기억에 잠긴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식을 향한 열정이 대단하긴 했지. 내가 적의 도시에 있던 대도서관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유혈 사태까지 갈 뻔한 적도 있으니까..." 몸을 돌린 레넥톤은 성큼성큼 걸어 다시 자신이 왔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어둠이 레넥톤을 삼키자 레넥톤은 몸집이 줄어들며 빛이 나는 거대한 신의 모습에서 처음 베커라에 들어왔던 구부정한 모습의 광기 어린 외톨이 방랑자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레넥톤이 사라지자 라즈는 달리아와 아눅타를 돌아봤다. "살고 싶어?" 달리아에게 물으며 허리를 숙인 라즈는 오단 스틸라바가 잡아먹힌 땅에서 이빨로 만든 칼을 주웠다. "살고 싶어요." 라즈는 달리아에게 칼을 건네며 쉭쉭 소리를 내고 있는 케수를 향해 고갯짓했다. "저 녀석이 널 등에 태우면 우리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지."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즈는 달리아의 대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 당신은 뭘 타고요?" 아눅타가 말했다. 라즈는 등의 가죽 고리에 사이 서사의 검을 집어넣었다. 마카라의 가운데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라즈는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마카라는 가시 돋친 이빨을 드러내고 라즈가 다가오는 것을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자, 쉽게 쉽게 가자고..." |
4. 사막의 후예[1]
5. 구 배경
5.1. 슈리마 개편 이전
슈리마 출신으로 변경되기 전의 설정이다.레넥톤은 룬테라와 아득히 떨어진 이세계에서 종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수인족 수호자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 나서스는 고대의 지식과 윤회사상의 가르침이 보관된 대서고를 관리하고 있었고, 레넥톤은 서고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안을 가진 레넥톤은 서고를 방문하는 이들의 모든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불순하거나 사악한 의도를 가진 자가 발각되면 그 즉시 내쫓는 일을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레넥톤은 지속적으로 사악한 기운에 노출되었고 부정적인 기운에 그만 동화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악한 마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증오심은 결국 레넥톤을 광기의 심연으로 빠뜨리고 만다. 그러던 도중 레넥톤은 악한 이들을 처단하면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도살자의 분노'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레넥톤은 이제 분노의 불씨를 형에게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오로지 형 나서스만이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그를 당해낼 수 없었던 레넥톤은 점점 더 뒤틀린 적개심이 축적되어갔다. 이윽고 그의 세계에 내전이 발발하고 레넥톤은 형의 반대 세력에 동참하게 된다. 나서스는 분노의 족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레넥톤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설득해보려 노력했지만, 동생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나서스는 마음이 아팠지만, 동생 레넥톤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레넥톤 역시 죽음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들이 형을 소환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레넥톤 자신도 형처럼 어디론가 소환되고 있었다. 강력한 마법에 사로잡힌 레넥톤은 수많은 시공간이 마구 뒤섞인 현실 사이를 수백 년은 되는 듯한 시간 동안 굴러떨어졌다. 마침내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악취와 연기가 가득 들어찬 자운의 하수도였다. 레넥톤은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상황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광기가 그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수도의 메케한 냄새 사이로 어렴풋이 피어오르는 친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 익숙한 향기를 좇아가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형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는 이제 형 나서스를 찾아 전쟁학회로 향했다. "나의 형제는 공허한 존재가 되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속은 텅 빈……." - 사막의 관리자 나서스 |
5.2.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후보: 레넥톤
날짜: CLE 21년 1월 14일
관찰
야수와 같은 피조물이 먹잇감을 찾는 양 정신 없이 두리번대며 복도로 튀어 들어온다. 멀리 자운에서부터 끈질기게 추적해 온 냄새가 그를 바로 이 곳 전쟁 학회까지 이끌었다. 절대 착각할 수 없는 그 진한 내음이 여기 이 곳, 대전당에 진동하고 있다.
갑자기 분노에 휩싸여 네 발로 털썩 바닥을 딛자, 레넥톤의 거대한 무기가 요란하게 대리석 바닥에 부딪친다. 이 냄새가 어디서 풍겨오는 건지 휙휙 둘러보는 눈엔 오싹한 광기가 서려 있고, 거칠게 움직이는 온 몸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다.
돌연, 레넥톤이 똑바로 일어서더니 단숨에 검을 낚아채고는 돌로 된 아치로 둘러싸인 문으로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거대한 몸집에서 터져 나온 갑작스러운 그 동작에, 문은 손이 닿기도 전에 먼저 벌컥 열린다. 먹잇감이 가까이 있다는 확신이 든 레넥톤은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고 그대로 돌진한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친형, 나서스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괴물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단 한 가지는, 운명의 순간에 형을 낚아채갔던 그 날 소환술의 진짜 목표는 형이 아닌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리라.
엄습해 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던 레넥톤은 문득 다시 굳건한 대지를 딛고 서 있음을 깨닫는다. 발 밑이 푹 꺼져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느라 속이 다 뒤집힐 지경이다. 주변이 아직도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이 눈앞이 온통 흐릿해서 급히 눈을 깜박여 본다. 망설이듯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빛의 기둥 밖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이 곳이 낯선 숲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은 석조 단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짙은 나무 향내, 활활 타는 횃불, 마법의 기운이 대기에 떠돌고 있다. 레넥톤은 도무지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 건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찬찬히 살핀다. 고민에 빠진 듯한 신음 소리는 필시, 저 멀리까지 퍼져나갔으리라.
갑자기, 틀림없는 형의 냄새가 근처에서 풍겨와 코를 감돌고 지나간다. 레넥톤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힘껏 박차고 달려 내려간다. 벌어진 길쭉한 주둥이에 잔뜩 나 있는 날카로운 이에서는 먹이를 기대하듯 침이 흘러 떨어진다. 피가 끓어오르며 우람한 두 팔에 혈관이 불끈 솟아, 거미줄처럼 툭툭 번져간다.
모퉁이를 돌자, 쓸모 없는 미니언 무리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나서스의 모습이 보인다. 빛나는 황금빛 갑옷을 걸친 형은 사뭇 능숙하게 머리 위로 지팡이를 휙휙 휘둘러 미니언들에게 영혼의 불길 세례를 내리고 있다. 나서스가 부리는 마법의 힘에 지축이 뒤흔들리며, 눈부시게 일렁이는 마법의 불꽃이 조그만 피조물들을 불태워 버린다.
하지만 레넥톤의 눈에는 이 모든 게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심판의 대상만 보일 뿐이다.
레넥톤은 귀찮게 막고 서 있는 운 나쁜 미니언을 죄다 도륙하며 나서스에게 덮쳐든다. 오랫동안 못 보고 지내던 동생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알아채지 못하던 나서스는, 자기 목을 노리고 날아든 거대한 곡선형 검이 허공을 가르자 그제서야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해 사라진다. 섬광을 발하며 사라진 나서스가 이내 안전한 거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2]
"레넥톤?!"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 오는 레넥톤의 일격을 지팡이로 막아낸 나서스는 레넥톤의 가차 없는 공격에 차츰 뒤로 밀려난다.
"형제여, 그만! 도대체 여기서 뭘하는 건가?"
레넥톤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번진다. "학살이지!"
말을 그치기가 무섭게 몸을 웅크리더니,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린다. 창공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는 곡선형 칼날이 흉포한 호를 그린다. 이번엔 틀림 없이 살을 베었다는 확실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 나서스의 몸이 털썩, 땅으로 쓰러지며 레넥톤은 형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을 이 최후의 순간을 음미하며 그 위로 우뚝 선다.
돌연, 빛 줄기가 비추더니 나서스의 몸이 사라진다.[3]
레넥톤은 방금까지 나서스가 있던 그 자리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미친 듯이 찢어 발긴다. 분노에 가득 차 돌아보지만 주위를 둘러싼 숲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포효를 내지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서스의 냄새를 다시 포착한 레넥톤은 길을 따라 온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저 멀리, 아까와 비슷해 보이는 석조 단상에 서 있는 나서스가 보인다. 그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는 입가에서 분노의 포효가 흘러나온다. 갑자기 살벌한 무기를 든 엄숙한 표정의 수호자 세 명이 계단 꼭대기의 위압적인 탑 밑에 나타나 그를 막아 선다.
레넥톤은 건강미 넘치는 빨강 머리 여인이 자신을 향해 발사하는 총알을 칼날로 막아내며 거침없이 돌진한다. 우람한 미노타우로스가 지면을 쿵 내리치고, 별나게 커다란 아르마딜로가 그를 막아내려 네 발로 버티고 서지만, 피의 갈망에 사로잡힌 악어의 적수가 되기엔 무리다. 결국 나서스에게 돌진하는 레넥톤에게 밀려 세 명의 수호자가 모두 나가 떨어진다.
곧바로 레넥톤은 어둠 속에 쓰러진다.
야수는 싸늘한 돌 바닥에 큰 대자로 뻗은 채 정신을 차린다. 두건을 쓴 마법사 여럿이 손을 쭉 내민 채 둥그렇게 그를 에워싸고 있다. 그들이 웅얼거리는 이상한 단어들이 빛나는 마법의 그물을 짜 내려가 레넥톤의 몸을 단단히 속박하고 있다.
시야가 환해지자, 방 건너편에서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나서스의 모습이 보인다. 레넥톤이 으르렁대며 형을 덮치려 하지만, 마법의 사슬이 강력하게 옭아매고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나서스는 도무지 속마음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오랫동안 레넥톤을 지켜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서스는 곧 돌아서서 빛의 제단으로 올라선다.
나서스는 이렇게 말하더니 이내 사라진다. "아직 우리의 갈등을 해결하기엔 이른 것 같군. 잘 있게, 형제여."
레넥톤이 고개를 뒤로 홱 젖히며 포효를 내지르자 온 방이 뒤흔들린다. 형이 지척에 있다는 맹렬한 분노와 그런데도 제 손으로 끝장내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를 집어삼킨다.
빙 둘러싸고 선 소환사들은 이 피조물에게 통상적인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리그가 선택한 존재가 마침내 이 곳에 도래했기에.
5.3. 11.3 패치 이전
불길에 그을린 슈리마 사막에서 다시 일어선 무시무시한 분노의 초월체, 레넥톤. 한 때 그는 슈리마 최고의 전사로서 무수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슈리마의 몰락과 함께 사막 아래 무덤 속에 갇혔고, 강산이 변하는 억겁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보내면서 서서히 광기에 굴복해 갔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레넥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가둔 형에 대한 복수뿐이다. 레넥톤은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유년 시절 레넥톤은 싸움을 몰고 다녔다. 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나이 많은 형들에게도 기죽지 않았다. 그 어떤 모욕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덕분이었다. 한 번 밖에 나갔다 하면 새로운 상처와 멍이 생긴 채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공부벌레 형은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레넥톤은 싸움을 즐겼다. 나서스가 명문 ‘태양의 신학교’ 입학생으로 발탁되어 집을 떠난 뒤, 레넥톤의 폭력 행위는 형의 부재 속에서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가끔 고향을 찾을 때마다 나서스는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고 피를 흘리며 귀가하는 동생을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레넥톤의 폭력성이 감옥살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여 레넥톤이 슈리마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레넥톤은 군인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나서스의 영향력 덕분에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입대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의 훈련과 조직생활은 레넥톤에겐 축복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슈리마에서 가장 무섭고 유능한 전쟁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해 몇 번이고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거칠고 사나운 만큼, 신의 있고 용감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나서스는 장군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 훈장을 받았고, 두 형제는 수많은 전쟁에서 함께 싸우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기질의 차이와 잦은 의견 대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서스는 전략, 군수, 역사 분야에, 레넥톤은 교전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나서스가 전략을 짜면 레넥톤은 실전에 나아가 승리를 일궈내었다. 레넥톤은 슈리마 국경의 산길에서 벌어진 불리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슈리마의 수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침략군은 남쪽 해안으로 침투해 외딴 도시 주레타를 공격하려 했다. 바로 저지하지 않으면 주레타는 함락하고 시민들은 학살될 것이 분명했다. 레넥톤과 몇 안 되는 병사들은 백성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열 배나 많은 적군과 대치했다. 승리는커녕 아무도 레넥톤이 살아 돌아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전투였다. 하지만 레넥톤은 하루 밤낮 동안 끈질기게 고지를 사수했고, 나서스가 이끄는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전원이 부상을 입고, 살아 서 있는 병사의 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레넥톤은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레넥톤은 수십 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존재만으로 아군에게 귀감이 되었고, 적군에겐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연이은 승리로 레넥톤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적국이 항복을 선언하여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일도 왕왕 생겨났다. 무수한 전투로 굳은 살이 배기고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할 무렵, 레넥톤은 형의 병중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 다시 만난 형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어 있었다. 먼 옛날 귀족의 씨를 말렸다고 전해지는 부패의 저주와 같은 불치의 병환이었다. 그러나 나서스의 위대한 업적만큼은 바래지 않은 채로 온 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기도 했지만 대도서관의 관장이자 슈리마 최고의 문학가이기도 했다. 태양의 신은 나서스를 위한 초월 의식을 진행하라고 사제단을 통해 뜻을 밝혔다. 초월 의식을 보기 위해 도시 전체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병이 깊어진 나서스는 초월의 제단으로 향하는 계단을 끝까지 올라갈 힘이 없었다. 레넥톤은 사랑하는 형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태양 원판의 신성한 에너지로 인해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알면서도, 두 팔로 형을 들어 안고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형이 살 수만 있다면 목숨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레넥톤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결국 군인일 뿐이었고, 형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장군이었다. 레넥톤은 슈리마에 나서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넥톤은 파괴되지 않았다. 태양 원판의 눈부신 빛 속으로 두 형제가 모두 떠올라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빛이 가셨을 때, 군중의 눈 앞에는 장대한 두 초월체가 서 있었다. 나서스는 단단한 몸에 자칼 형상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레넥톤은 거대한 악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형제 모두 어울리는 형상이었다. 자칼은 가장 영리하고 총명한 짐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악어의 대담한 공격 방식은 레넥톤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슈리마는 이 두 반인반수가 제국의 새로운 수호자가 된 것에 감사를 올렸다. 훌륭한 전쟁 영웅이었던 레넥톤은 초월체가 된 후, 필멸자로선 상상도 못할 새로운 힘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는 그 어떤 보통의 존재보다 강하고 빨랐으며 고통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초월체는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지만 수명이 매우 길어 수백 년 동안 제국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레넥톤이 총사령관을 맡은 슈리마군은 무적의 군대가 되었다. 그는 원래도 무자비한 지휘관이자 포악한 전사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초월 의식 이후엔 가공할 위력을 갖게 되었다. 레넥톤의 지휘 아래 슈리마군은 수많은 유혈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단 한 번이라도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상대로부터 자비를 바라는 법이 없었다. 레넥톤의 전설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널리 퍼져나갔고, 적군들은 그를 ‘사막의 도살자’라 칭했다. 레넥톤이 듣기에도 싫지 않은 별명이었다. 나서스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초월체가 된 레넥톤의 인간성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레넥톤은 해가 갈수록 잔인해져 살육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그가 저지른 갖가지 잔혹행위를 놓고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레넥톤은 슈리마의 충실한 수호자였고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안보와 번영을 지키며 여러 대의 황제를 섬겼다. 아지르 황제의 재위 기간 중 어느 날, 마력의 불덩이가 지하 감옥 안 마법 석관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불덩이는 한 마을을 초토화시킨 뒤 사막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도주했다. 레넥톤과 나서스는 이 전설의 괴물을 포획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두 형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젊은 황제 아지르는 마법사 제라스의 계략에 넘어가 초월 의식을 치렀다. 결과는 참혹했다. 레넥톤과 나서스는 수도에서 하루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황제의 초월 의식이 불발되었을 때 그 충격의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고 서둘러 돌아갔을 때 슈리마의 찬란한 수도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지르가 죽고, 도시의 백성들도 거의 모두 목숨을 잃은 후였다. 힘을 빼앗긴 태양의 원판도 추락하고 있었다. 잔해의 한가운데에서 두 형제는 사악한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된 제라스를 발견했다. 두 형제는 고대의 불덩이를 잡아 두었던 마법 석관에 제라스를 가두려 했다. 하루 밤낮을 꼬박 싸웠지만 제라스의 위력을 압도할 순 없었다. 제라스는 석관을 부수고, 태양 원판에서 빨아들인 힘으로 마법 공격을 가해 왔다.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태양 원판은 땅으로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제라스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넥톤은 깊고 깊은 ‘황제의 능’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간 뒤 형에게 고분을 영원히 봉인해 달라고 외쳤다. 제라스를 막을 다른 묘안이 없음을 알고 나서스는 마지 못해 동생의 뜻을 따랐다. 레넥톤과 제라스가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동안 나서스는 무덤이 다시는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봉했다. 제라스와 레넥톤은 어둠 속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그들의 기나긴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바깥 세상에서는 슈리마의 거대 문명이 붕괴되어 모래 먼지와 함께 흩어졌다. 제라스는 사악한 거짓말을 속삭였고, 그의 악의와 영겁의 어둠은 수세기에 걸쳐 레넥톤의 영혼을 잠식해 갔다. “네 형은 네 성공을 시기했지. 초월도 함께 하고 싶지 않아 했어. 네 형은 널 일부러 가둔 거야.” 레넥톤의 정신에 시나브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라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점점 더 깊이 쐐기를 박았다. 광기에 굴복한 레넥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 용병 시비르가 ‘황제의 능’을 발견하여 봉인을 해제했고, 레넥톤과 제라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레넥톤은 분노로 포효하며 형의 냄새를 찾아 슈리마 사막 위를 질주했다. 레넥톤은 자신을 버린 배반자 나서스를 처치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막을 떠돌기 시작했다. 지난 날 의기양양하던 명예로운 영웅의 모습이 엿보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 뿐, 이제 레넥톤은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피와 복수를 갈구하는 미친 야수와 다를 바가 없다. |
[1] 레넥톤이 직접 등창하진 않지만 유니버스 페이지에 링크는 되 있다.[2] 게임상으로 따지면 나서스가 점멸을 사용한 것이다.[3] 게임상으로 따지면 부활한 것. 잠깐 죽자마자 부활한거면 스펠을 부활/점멸을 든건가 나서스는 트롤러에게 조종당하는 중이었다[4] 이렇게 레넥톤이 여러 명의 챔피언을 순삭하고 날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챔피언들이 소환사들의 링크에 매여 진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동안 레넥톤은 제약없이 힘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링크로 인한 제약이 점차 약해지는 과정이 바로 레벨 업 시스템이다.18레벨로 날뛴 레넥톤[5] 게임상의 일명 우물 포탑 정확히 말하자면 넥서스 오밸리스크이 레넥톤을 공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