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리브슬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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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28대 |
이름 | 레슬리 리브슬리 (Leslie Lievesley) |
생년월일 | 1911년 6월 23일 |
사망년월일 | 1949년 5월 4일 (향년 37세)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스테이블리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178cm |
소속팀 | 동커스터 로버스 FC (1929-193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30-1933) 체스터필드 FC (1933) 토키 유나이티드 FC (1933-1937) 크리스탈 팰리스 FC (1937-1939) |
감독 | 헤라클레스 알멜로 (1945-1946) 토리노 FC (1948-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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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리브슬리는 스테이블리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조는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아스날 FC에서 뛰던 골키퍼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때 입은 손의 부상으로 은퇴 후 광산에서 일을 했다. 리브슬리 역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친숙했으며 로싱턴에서 유스 선수 생활을 했다.1929년, 리브슬리는 동커스터 로버스 FC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30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브슬리는 유나이티드에서 거의 출전 기회를 받지 못했고 유나이티드 역시 1931년의 강등 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리브슬리는 1933년에 체스터필드 FC로 팀을 옮겼고 토키 유나이티드 FC를 거쳐 크리스탈 팰리스 FC에서 1939년에 은퇴했다.
2.2. 감독
리브슬리가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리브슬리는 전쟁 기간에 영국 공군에서 낙하산 훈련 조교로 복무했다.전쟁이 끝나고 리브슬리는 헤라클레스 알멜로에서 1년간 감독 생활을 하며 감독 경력의 첫발을 내디뎠다. 1947년에 리브슬리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직 제안을 거절하고 토리노 FC의 유소년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브슬리는 1948년 올림픽 때 올림픽 대표팀 코치를 역임한 후 1948-49 시즌에 토리노의 1군 감독이 되었다. 당시 토리노는 그란데 토리노라 불리며 3연속 스쿠데토를 따냈던 강팀이었고 토리노는 리브슬리 체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리그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란데 토리노는 비행기 사고로 그들의 영광을 비극적으로 끝내야 했고 리브슬리도 이 사고로 사망했다.
3. 뒷이야기
- 리브슬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두 번이나 추락 사고를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1948년 올림픽 때 리브슬리는 귀국길에 비행기의 브레이크 고장으로 비행기가 격납고에 충돌하는 사고도 겪었다.
- 리브슬리는 잔니 아녤리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아녤리는 토리노 FC에서 리브슬리가 1년을 보낸 후 유벤투스 FC에 합류하도록 설득했고 1949년 4월에 리브슬리가 유벤투스에 부임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약은 사고로 인해 영영 실현될 수 없게 되었다.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