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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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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霊気, ruby=れいき)]

1. 개요2. 레이키의 역사
2.1. 창시자 우스이 미카오의 생애2.2. 서양으로 전파
3. 설명

1. 개요

1922년 일본에서 우스이 미카오(臼井甕男)가 시작한 에너지 치료. 193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 전파되어 현대에는 서구의 대체의학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현대에는 유사과학, 대체의학으로 보기도 한다. 손바닥에서 신비로운 에너지가 나와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하면, 레이키를 두고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2. 레이키의 역사

2.1. 창시자 우스이 미카오의 생애


레이키의 창시자 우스이 미카오(臼井甕男)는 게이오(慶應) 원년(1865) 음력 6월 24일(양력 8월 15일)[1] 오늘날 기후현 야마가타시 다니아이(谷合)에서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스이 미카오의 묘비에 따르면 우스이의 호는 暁帆[2]이고, 그의 집안은 헤이안 시대 말-가마쿠라 시대 초를 살다 간 무장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 1118-1201)의 자손이라고 한다. 우스이 미카오의 인생은 대부분이 메이지-다이쇼 천황 재위기와 겹치지만, 행적의 자세한 내용은 별로 전하지 않는다. 우스이는 십대 중반 무렵에 고향 다니아이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3]

우스이 집안이 천태종을 믿었기 때문에 우스이 미카오는 천태종 사찰에 들어가 전통적인 사무라이 교육과 함께 불경을 공부했다.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이라 그런지 무술도 함께 배웠다고 한다.[4] 스즈키 사다코(鈴木貞子)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우스이는 늘 종교적인 데에 관심하며 안심입명(安心立命)[5]의 경지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배운 불교는 물론 도교, 개항 이후 들어온 서양학문이나 그리스도교까지 접해보았다. 수 차례 중국과 유럽, 미국에도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종교적인 물음에 답을 찾으려 했다. 우스이는 사업가나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했으나 어느 하나 제대로 마음을 잡진 못했다.

그러던 중 우스이와 알고 지내는 어느 선승(禪僧)이 '죽어보는 체험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스이는 죽을 각오로 단식수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이쇼 11년(1922) 초, 만 56세 나이로 교토 인근에 있는 구라마산(鞍馬山)[6]에 들어가 삼칠일(21일)간 단식하며 기도하던 중, 온 우주가 일체화되고 영기(靈氣)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7] 레이키(영기)란 호칭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우스이가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가락 끝을 다쳤는데, 손을 발 끝에 대었더니 바로 통증이 사라지고 피가 멈추며 상처가 나았다고 한다. 하산해서 어느 식당에 들렀더니 식당 주인의 손녀가 충치 때문에 아파했는데, 우스이가 손녀의 뺨에 손을 대었더니 바로 아픔이 사라졌다고 한다.[8] 이것이 레이키의 시작이었다. 우스이는 그해(1922) 4월부터 '우스이 레이키 요법학회(臼井霊気療法学会)'라는 이름을 내걸고 도쿄에서 환자 치료를 시작했는데 매우 성황리에 번창했다.

우스이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전수하는 방법을 만들어 레이주(霊受)라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영어권의 영향으로 '어튠먼트'라고 부른다. 우스이는 자신을 조조(肇祖)라 칭하며 제자들을 거두었는데, '조조'란 한자어는 시조(始祖), 개조(開祖)의 동의어이다. 우스이로부터 레이주로 능력을 전수받아 독립한 이들은 사범(師範)이라 불렸는데, 우스이가 평생 동안 거둔 사범은 모두 스물한 명이었다.

도쿄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듬해(1923)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우스이는 도쿄에서 제자들과 함께 레이키 요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키를 창시한 지 4년이 지나 다이쇼 15년(1926) 3월 9일, 만 60세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했다.[9] 우스이는 레이키의 창시자지만, 레이키 치료사로서는 겨우 4년간 활동했을 따름이다.

사후에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区)의 사이호사(西方寺)란 절에 묘를 썼다. 묘 앞에는 '영법조조 우스이 선생 공덕지비(霊法肇祖臼井先生功徳之碑)'라고 새긴 석비가 있는데, 우스이가 사망한 이듬해(1927)에 세웠다. 비문은 패전 이전의 일본어 문어체로 쓰여 일본인들도 읽기가 쉽지 않다는 모양이다.

2.2. 서양으로 전파

우스이의 사범 중에는 하야시 주지로(林忠次郎 1879-1940)라는 전직 일본해군 대좌가 있었다. 하야시는 우스이로부터 사범 자격을 얻은 뒤 1925년에 해군에서 제대하여 역시 도쿄에서 레이키 치료소를 개원했고, 1930년에는 (우스이와 별도로) '하야시 주지로 레이키 연구회'라는 다른 레이키 단체를 창설했다.

한편 하와이의 일본계 이민자 2세인 하와요 다카타(高田ハワヨ, 1900-1980)[10]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하와이에서 큰 병을 얻어 1935년에 일본으로 배를 타고 돌아와 치료를 받고자 했다. 다카타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도쿄의 병원 수술대에 누웠는데 귓가에서 갑자기 "수술 받을 필요 없다!" 하는 소리가 여러 번 들려 결국 스스로 수술을 거부하고 내려왔다. 병원에서 하야시 주지로를 소개받아 레이키로 4개월에 걸쳐 치유되었는데, 여기에 감명을 받아 하야시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하야시 또한 자기 아내 말고도 다른 여자 레이키 치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여 받아들여 가르쳤다.

1937년에 다카타는 하와이로 돌아가 미국에서 레이키 치료소를 열 준비를 했다. 1938년에는 하야시가 딸과 함께 미국으로 찾아와 다카타에게 정식으로 완전히 레이주(어튠먼트)를 해주었다. 1940년에는 불길한 예지몽을 꾸고는 일본으로 건너와 마지막으로 하야시와 만났다. 일본 해군은 세계대전을 앞두고 하야시에게 군사정보를 요구했다. 그해에 하야시는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할복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 레이주를 '어튠먼트'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이후 다카타는 미국에서 활발하게 레이키로 치료활동을 하고 전파했다. 다카타로부터 미국인들이 레이키를 전수받았고, 다시 미국인 레이키 치료사들이 서양의 다른 국가로 전파하여 심지어 일본에도 레이키가 역수입될 정도였다. 사실상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레이키 치료사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대부분이 다카타로 수렴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레이키는 일본이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 예를 들어 레이키 능력을 전수하는 행위를 '레이주'가 아니라 영어식으로 어튠먼트(attunement)라고 부르는 것도 다카타가 미국에서 영어로 레이키를 전했기 때문이다.

어튠먼트에도 등급이 있어서 낮은 어튠먼트를 받으면 남에게 치료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남에게 어튠먼트를 해줄 수 있는 등급을 '레이키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우스이의 제자로서 '사범'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그 등급이다. 그런데 다카타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어튠먼트를 해줄 뿐 '레이키 마스터' 어튠먼트는 별로 해주지 않았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1만 달러를 지불한 사람에게만 마스터 어튠먼트를 해주었다. 다카타로부터 마스터 어튠먼트를 받은 사람은 모두 22명이었다.

사실 우스이나 하야시 역시 마스터 어튠먼트는 잘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도 잘 받지 않았고, 어튠먼트를 해주는 대가로 거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또한 일단 어튠먼트를 받으면 그 뒤는 서로 동등한 입장이라, 심지어 하야시도 우스이와 별개로 레이키 단체를 세웠다. 하지만 다카타는 레이키 마스터들 위에 서는 '레이키 그랜드 마스터'가 되려고 했다. 이것은 일본의 우스이조차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다카타는 서양에 레이키를 전수하며 레이키의 시조인 우스이가 기독교 목사였다느니 레이키가 티베트에서 유래했다느니 주장하여, 레이키를 티베트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지으며 역사를 왜곡했다. 사기쳤네. 다카타가 레이키를 퍼트렸기 때문에 역사왜곡 역시 함께 퍼져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았다. 이러한 역사왜곡이나 '레이키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자 했던 문제 때문에 서양의 레이키인들 사이에서도 다카타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일본의 우스이 레이키 단체들은 폐쇄적이라 전수자들을 잘 받지 않기 때문에, 다카타와는 달리 추종자들을 별로 얻지 못했다. 일본에서 우스이나 하야시 등이 설립한 레이키 단체를 '전통 레이키', 다카타를 통해 서양에 전해진 레이키를 '웨스턴 레이키'라고 구분하기도 하는데, 일본에서조차도 레이키를 한다는 사람들 대부분은 웨스턴 계열이라고 한다. 하지만 레이키 창시자의 기풍을 간직했다 하여 레이키인들 사이에서는 전통 레이키가 이래저래 주목을 받는다.

3. 설명

레이키를 전수받는 방법이 매우 쉽다. 흔히 어튠먼트(attunement)라고 부르는데, 시술자는 피시술자를 앉게 한 뒤 기운을 전해준다고 생각하며 몇 가지 간단한 동작을 한다. 시간도 불과 몇 분에 불과하다. 이렇게 어튠먼트를 하면 피시술자에게 우주의 기운을 전달해주는 통로(?)가 생기는데, 한번 생기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어튠먼트를 받으면 누구라도 남에게 레이키를 해줄 수 있다고 한다. 전수방법이 이토록 쉬우므로 전수자들이 많이 생겼고, 저마다 자기 취향에 따라 차크라 개념을 비롯하여 각종 종교나 주술,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뒤섞어 뉴에이지화했다. 우스이의 방식을 그대로 전한 우스이 레이키로부터 약사여래 레이키니 라파엘 레이키니 쿤달리니 레이키니 하는 것까지, 계보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레이키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서구권에서는 레이키가 이전부터 자리잡은 아로마테라피 등 다른 대체의학들 사이에 끼어들어 자리를 잡았다. 아우라 에너지 치료법과 물리적 치료법의 혼합으로 볼 수 있다. 어튠먼트를 받는 데에도 무료로 해주는 사람부터 터무니없는 고액을 요구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전수가 바로 된다고는 하지만 이론적 공부나 테크닉도 필요하고 자기 치유의 훈련도 필요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시술요법은 시술자가 환자의 신체에 손을 가만히 얹거나 살짝 띄우는 것이나 요즘은 원격으로 시행한다. 이를 통해 우주의 생명 에너지가 환자의 신체로 들어가서 공명 또는 진동하여 신진대사를 활성화하고 자연치유능력을 북돋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술 분위기는 굉장히 조용하고 정적이며, 시술 도중에 환자가 쿨쿨 잠드는 경우도 많다. 이완을 위한 테크닉이다.

레이키 치료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환자가 숙련된 치료사의 손길이 닿으면 뜨겁거나, 진동하는 듯하거나, 에너지가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유튜브 등에는 자기 스스로 치료하는 방법을 강의하는 영상도 있고 음악치료와 접목한 영상도 있다.

일본에서는 레이키 치료과정 도중에 우스이 미카오가 직접 쓴 고카이(五戒 오계)를 외우면 시술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은 화내지 말고 걱정 말고 뭐든지 열심히 하고 친절해라이다.[11]

메이지천황의 글을 읽게한다는 소문은 헛소문이다.

레이키 상징에는 원격치유상징이 있기 때문에 원격치유 및 수업, 어튠먼트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실제로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레이키 마스터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특정 레이키의 영업을 위한 명함 정도라고 여기면 된다.
[1] 1865년은 조선에서는 고종 2년, 청나라에서는 동치 4년으로, 일본에서는 고메이 천황이 재위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에도막부의 14대 쇼군으로 재임하는 시기였다.[2] 일본어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가 불명확하다. '아키호'라고 읽을 수도 있고, '교한'이나 '교호'라고도 읽을 수 있다.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효범'이다.[3] 이 때문에 고향 다니아이에도 우스이와 관련된 유적이라고는 아마타카(天鷹) 신사란 곳에 있는 석조 도리이뿐이다. 우스이 미카오가 다이쇼 12년(1923) 동생들과 함께 돈을 모아 신사에 기증했다는 명문이 이 도리이에 있다. 2018년 9월 23일 일본의 레이키인들이 아마타카 신사에 臼井甕男生誕之地(우스이 미카오 탄생지)라고 새긴 큼지막한 기념 석비를 건립했다.[4] 영어권 자료에서는 우스이가 1889년에 대동류 합기유술의 면허개전을 땄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면허개전을 받았다면 이미 일본에서 무술인으로서도 명성이 높았을 테니 사실이 아닌 듯하다.[5] 불교용어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이 평화로워진 것을 뜻한다.[6] 오늘날 일본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左京区)에 있는, 높이 해발 584m인 산. 슈겐도의 전통적인 수행처이다. 하필 기도할 곳으로 구라마산을 고른 데에서 우스이 미카오의 종교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7] 며칠만 굶어도 인간은 몸에서 부족한 열량을 내기 위해 자기 신체의 단백질(근육)과 지방을 이화한다. 몸에 저장할 수 있는 글루코겐과 당은 하루 내지 아무리 길어도 삼일 내에 전소되고, 이후부터는 근육을 분해해 keytogenesis를 하여 카톤바디를 고갈된 탄수화물과 당의 대체연료로 사용한다. 3주간 단식 혹은 초절식을 하면 몸은 100% 키톤체에 의존하는 영양실조 상태. 많은 논문들이 초절식, 단식, 단백질 다이어트를 했을 때, 일시적으로 euphoria 즉 몽환적이고 오묘하게 기분이 좋은 상태가 되고, 굶음에서 오는 마지막 발악(?)으로 키톤체로 인한 뇌의 인지활동이 증폭되나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우스이는 그러니 말 그대로 정신이 아련해지고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분이 묘하게 좋은 죽기 직전까지 갔다오는 신비한 체험을 한 셈. https://www.ncbi.nlm.nih.gov/pubmed/31700717[8] 이는 thermoreceptor와 mechanoreceptor의 일시적 input으로 생긴 nociception dampening 현상이었을 것이다. Gate Keeping Theory of Pain을 보자.https://en.wikipedia.org/wiki/Gate_control_theory[9] 일본 레이키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스이가 뇌일혈을 두 번 겪었지만 모두 레이키로 치료했는데, 마지막 세 번째 뇌일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10] 성이 다카타(高田)지만 미국인이므로, 일본에서도 가타카나만으로는 서양식으로 이름+성 순으로 쓰고, 한자를 혼용하면 성+이름 순으로 쓴다. 결혼 이전의 성은 '카와무라'이다.[11] 今日だけは(오늘만큼은) 1.怒るな(화내지 마라) 2.心配するな(걱정하지 마라) 3.感謝して(감사하라) 4.業を励め(일에 힘써라) 5.人に親切に(남에게 친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