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베르 르 마송 Robert Le Maçon | |
생몰년도 | 1365년경 ~ 1443년 1월 28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앙주 샤토 뒤루아르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트리어 | |
아버지 | 기욤 르 마송 | |
형제 | 자크 르 마송 | |
아내 | 잔 코숑, 잔 드 모흑뜨메흐 | |
직위 | 프랑스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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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정치인. 샤를 7세의 총리이자 잔 다르크의 전우였다.2. 생애
1365년경 프랑스 왕국 앙주 샤토 뒤루아르에서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비서이자 고문인 기욤 르 마송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 자크 르 마송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1401년 1월 자신의 고향인 샤토 뒤루아르의 집행관이 되었고, 같은 해 3월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5년 후 왕실 호위대 기사단장이 되었으며, 앙주 공작이자 시칠리아 국왕인 루이지 2세의 고문이자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 파간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오를레앙파를 지지했으며, 1414년 1월 29일 이자보 드 바비에르에 의해 총리에 선임되었고, 1414년 7월 20일 조폐국 장관, 1416년 6월에는 퐁티외 백작의 총리에 선임되었다.1416년 8월 16일 앙주에 있는 트리어 남작으로 선임되었으며, 1417년 7월 18일 트리어를 대표해 앙주의 참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후로 20년에 걸쳐 루아르 강의 왼쪽 강둑을 차지했던 30미터 높이의 성채를 복원했으며, 우아한 종탑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건설했다. 이후 트리어는 활발한 항구를 갖춘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고, 수익성 있는 통행료와 매력적인 박람회로 인해 물자가 더욱 풍성해졌다.
한편, 그는 도팽 샤를에게 기용된 뒤 1417년 8월 10일 부르고뉴 공작에게 도시를 개방한 랭스 주민들을 비난하는 편지를 샤를의 요청에 따라 작성했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군이 파리에 비밀리에 입성하면서 도팽 샤를의 안위가 위태로웠을 때,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도팽 샤를을 업고 안전한 멜룬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분개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은 그를 생 모르 조약의 정치적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다. 1419년 9월 10일 용맹공 장이 몽뜨흐 다리에서 도팽 샤를과 마주보며 협상을 논하던 중 아르마냑파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는 왕의 곁에 있었지만 공작 암살에 어떤 식으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1422년 초 총리 직에서 사임했지만 계속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426년 왕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1429년 초 잔 다르크가 등장했을 때, 그는 잔 다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그녀가 지원받을 수 있게 해줬다. 그의 아내 잔 드 모흑뜨메흐는 시농에서 잔 다르크의 첫번째 처녀성 검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1429년 6월 그는 셀쉬르셰르에서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와 기 14세 드 라발 형제에게 잔 다르크를 소개해줬다. 이후 도팽 샤를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위한 랭스 행진에 참석했으며, 트루아 시민들이 저항했을 때 도팽 샤를에게 철수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잔 다르크와 상의하자고 설득했다. 1429년 12월 다르크 가문의 귀족 특허권에 서명했다. 1430년 브르타뉴에 사절단으로 가서 외교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431년 샤를 7세와 함께 소뮈르에 머물었고, 1436년 8월 16일 국왕의 의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트리어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43년 1월 28일에 사망했다. 사후 그가 세운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잔 코숑, 잔 드 모흑뜨메흐와 연이어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