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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바조/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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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

1. 개요

로베르토 바조의 선수 경력을 기술한 문서.

2. 클럽 경력

고향 비첸차의 유소년 팀을 시작으로, 1983년 6월 5일[1] 세리에 C 비첸차 팀에 데뷔했다. 1984-85 시즌엔 12골을 넣으며 활약하면서 팀이 세리에 B로 승격하지만, 1985년 5월 오른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2][3]
파일:바조 피오렌티나 시절.jpg
그런데 그런 큰 부상중임에도 바조는 그 해 여름에 당시 세리에 A 리그 팀인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재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복귀한 바조는 컵 대회로 복귀를 알렸고, 가을에 리그에 정식으로 데뷔 했는데 곧장 무릎 부상 재발7개월 결장.

20살도 되지 않은 바조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치명적인 부상을 2번이나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끝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의학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그런 우려들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조는 '경기를 뛰고싶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며 재활에 성공, 1987-88 시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세리에 A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리게 된다. 바조의 첫골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던 나폴리를 상대로, 강등권 위기에 쳐해있던 피렌체를 구해내는 값진 골이었다.

이듬해인 1988-89 시즌, 21살의 바조는 40경기에 출전하며 24골을 기록하며 기량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었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슈퍼스타로서 착실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90년, 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며 150억 리라[4]의 금액에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바조는 사실 이적을 원치않았고 큰 부상에도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에 대해 큰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나[5] 당시 피오렌티나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때문에 결국 이적하게 된다.[6]
파일:바조의 유벤투스 시절.jpg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의 10번[7]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1992-93 시즌 리그와 대회를 통틀어 30골, 1993-94 시즌엔 22골을 기록했는데, 시즌이 아닌 연도 즉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39골을 넣으며 절정기를 누렸다. 특히 1993년 UEFA컵[8] 결승전 당시 1,2차전을 통틀어[9] 2골을 넣어 유벤투스에게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안겨준 활약으로 해당 년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옹즈도르, RSSSF 올해의 선수,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를 모두 휩쓸어버린다.
파일:바조 발롱도르.jpg
발롱도르를 수상한 바조
그러나 바조는 하술된 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 이후 크나큰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마르첼로 리피가 유벤투스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자리를 차츰 앗아갔다.

설상가상 그해 11월 무릎 부상 재발로 뛰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리피가 직접 데려온 델 피에로가 훌륭히 빈자리를 메꾼다. 1994-95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팀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고 결국 전력외 판정을 받고 팀을 떠난다.
파일:바조의 AC 밀란 시절.jpg
이때 인테르으로 이적한다는 루머가 파다했지만 결국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파비오 카펠로 감독 역시 판타지스타 바조를 탐탁치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5-96 시즌 밀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유벤투스 때와 같이 바조가 우승에 기여한 바는 미미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결국 아리고 사키 감독이 들어온다. 사키 감독은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는데, 노르웨이전에서 골키퍼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자 후보 골키퍼 루카 마르케지아니를 투입하기 위해 바조를 벤치로 불러들이며 바조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인물이었다.

1996-97 시즌 밀란은 리그 11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사키 감독을 경질했는데 후임으로 카펠로 감독이 다시 왔다.
파일:바조의 볼로냐 시절.jpg
결국 카펠로 감독에게 전력외 통보를 받은 바조는 볼로냐 FC로 이적, 1997-98 시즌 리그 30경기 22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볼로냐 감독과 불화를 겪었다.
파일:바조 인터밀란 시절.jpg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바조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테르가 오퍼를 넣어, 바조는 등번호 10번을 받고 이적한다. 그리고 이때 인테르에 호나우두가 있었다. 축구팬들은 신구세대 최고 공격수 두 사람이 환상의 투톱을 이룬다고 기대와 설레발을 떨었으나 정작 호나우두가 부상크리(…). 이 무렵 인테르는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애먼 감독 모가지만 연달아 날렸는데, 결국 작심하고 데려온 승부사가… 마르첼로 리피 감독.[10]
파일:바조의 브레시아 시절.jpg
결국 바조는 2000년 들어 무소속이 된다. 사실 아직도 슈퍼스타였던 바조를 원하는 해외팀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목표인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세리에 A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는 결국 2000년 9월 브레시아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계속한다. 33살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00시즌을 앞두고 막 1부 리그로 승격한 작은 팀으로의 이적을 바라보는 팬들의 반응은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브레시아에서 바죠는 마지막 축구인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탁월한 감각은 변함없어 매 시즌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는 페이스를 보이며 최약체 브레시아를 리그 8위로 올려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 결장. 재활을 거쳐 다음해 1월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끝내 수술대에 오른다. 회복까지 최소한 넉달은 넘게 걸린다는 예상이었지만, 바조는 기자들에게 "나는 기적을 믿는다."고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77일 만에 시합에 복귀했다. 복귀한 김에 두 골을 넣었다.

그러나 그의 불꽃투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 상태가 100%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지 않았고 월드컵의 꿈은 좌절되었다.[11] 그리고 이탈리아는 대한민국에 일격을 맞고 16강 탈락.

월드컵이 끝난 뒤로 줄곧 리그에 전념, 세리에 A 400경기 출장과 통산 200골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즌이던 2003-04 시즌, 바조는 37살의 나이에 무릎 수술, 요통으로 장기간 결장하는 등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시즌 26경기 12골 11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이자 시즌 평점 1위라는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5월 시즌 마지막 경기 AC 밀란 원정경기에서 8만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기리며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의 긴 여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1988년 네덜란드를 상대로 등번호 11번을 달고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린 때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5경기 2골을 기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 당시 넣은 골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한 살바토레 스킬라치를 앞세운 이탈리아는 자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24강 조별리그를 3전 전승으로 가뿐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는데 바조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한다. 이후 16강전 우루과이, 8강전 아일랜드마저 연파하며 4강에 진출했다.
파일:축구의 신 VS 판타지스타.jpg
4강 상대는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는데, 1:1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선발이 아닌 교체로 출전했는데, 이를 두고 감독이 기용 실패로 비판을 받았다.[12]
잉글랜드와의 경기 당시 넣은 골
3·4위전에서 71분에 잉글랜드피터 쉴튼 골키퍼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가 2:1로 승리하며 결국 3위를 차지했다.

유로 1992 지역예선에서 이탈리아가 소련에 밀려 당시 8개국(8강) 본선 유로에 진출 실패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13]

1994 미국 월드컵에선 이탈리아가 24강 조별리그 탈락을 걱정할 만큼 초반에 극히 부진했다. 사실 24강 E조 조편성이 노르웨이, 멕시코, 아일랜드, 이탈리아로 어느 팀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의 조였는데,[14] 정말로 네 팀이 똑같이 1승 1무 1패 골득실 0을 기록해 버렸다. 당시 1986~1990월드컵은 24강 조별리그 진출로 현재 월드컵 32강 ~ 48강 조별리그 진출보다 월드컵 조별리그(24강) 진출이 더 어려웠기 때문에, 24강 각 조 3위를 차지한 여섯팀 가운데 네팀까지 16강에 올라가는 와일드카드 방식이었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 놀이 끝에 가까스로 본선에 올라갔으니, 축구에 대한 열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이탈리아 팬들에게는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15] 팀은 물론이고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바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6]
파일:1994 바조 세레머니.jpg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바조가 클러치 능력을 발휘한다. 1994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이탈리아의 전력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등 아예 밀란을 통째로 뽑아온 수비진에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디노 바조의 공수 양면으로 뛰어난 미드필더진 등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바조를 제외한 카시라기, 지안프랑코 졸라, 주세페 시뇨리, 다니엘레 마사로 등의 공격진은 개인기량이야 뛰어났지만 부상 후유증이나 경험 미숙 아니면 국대 징크스나 조직력 등 여러가지 이유로 별로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7경기 동안 득점했던 8골 중에 바조는 5골을, 아주 결정적인 순간마다 작렬시켰다.[17]

16강 나이지리아전, 졸라가 퇴장당한 이탈리아는 후반 40분이 넘도록 스코어마저 1: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할 것처럼 보였으나 바조의 발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18] 연장전에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몰아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경기를 끝낸다. 8강에서 전통의 강호 스페인과 1:1로 접전을 벌이던 후반 42분, 바조는 다시 한번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한다. 4강 상대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와의 시합에서 바조는 이 대회 최고의 활약상을 선보인다. 전반 20분, 25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리고, 뒤늦게 스토이치코프가 한 골 만회한 불가리아를 2:1로 누르며 결승에 오른다.이러한 활약으로 바조는 이탈리아에선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온갖 찬사와 칭송을 받고 있었다.
파일:호마리우 VS 바조.jpg
1994 미국 월드컵 의 격돌!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승부차기로…
운명의 결승전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서게 된다. 당시 차례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라리가를 호령하던 호마리우베베투, 위대한 주장 둥가 등 이탈리아 못잖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포진한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격돌 끝에 스코어는 0:0, 결국 승부차기로 우승국을 가리게 된다. 브라질은 키커 네명 가운데 세명이 성공하고, 이탈리아는 두명이 성공해서 승부차기 스코어는 3:2.
파일:바조의 실축.gif
파일:바조 실축 후 좌절 1.jpg
파일:바조 실축 후 좌절 2.jpg
실축 후 고개를 숙이며 좌절하는 바조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고, 또 바조가 성공하더라도 다음 브라질 키커가 성공하면 패하는 상황에서 바조가 찼던 슛은 크로스 바를 넘어 하늘로 날아갔다.[19]
파일:눈물을 흘리는 바조.jpg
준우승에 그치자 눈물을 흘리는 바조
이 실축의 임팩트는 엄청난 것으로 실축 직후 이탈리아에서는 팬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바조의 인형을 불태우고 초상화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져서, 토너먼트나 경기에서 활약이 좋았던 선수가 승부차기는 실축하는 경우 자주 바조의 이름을 언급하곤 한다. 더구나 이것은 바조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었기에 그에게는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이유는, 1번 키커이자 주장인 프랑코 바레시도 골대 위로 날려 버렸고 바로 앞 키커인 다니엘레 마사로[20]클라우지우 타파레우에게 막히는 등 심적 부담이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애초에 아군이 이미 2번이나 실축한 뒤라서 바조가 넣었어도 이탈리아의 패배는 바뀌지 않았다.[21] 또한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회 내내 햄스트링 통증으로 고생했으며, 전반전에도 통증이 올라와 실려갔다가 들어오는 등 경기 내내 다리 부상을 안고 뛰었다. 그냥 아리고 사키의 아쉬운 판단이었다.

그리고 유로 1996에는 사키 감독과의 불화로 제외되었으며, 이탈리아는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10등)하고 만다.

멘탈 공황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난 후 리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 뽑인 바조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짝을 이뤘다. 32강 조별 리그 첫 경기 상대는 남미의 다크호스 칠레였고, 유럽에서 뛰는 살라스와 사모라노 등 걸출한 2명의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경기 초반 바조의 감각적인 패스가 비에리의 발 앞에 정확히 배달되며 가볍게 선취 득점에 성공했다. 손쉽게 경기를 지배하나 했지만, 살라스에게 잇달아 두 골을 내주고 오히려 끌려다니는데...
4년 전의 악몽을 이겨내고 칠레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는 바조
여기서 판타지스타로서의 바조가 지닌 천재성이 발휘된다. 칠레의 밀집 수비에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측면에서 공을 잡은 바조는 패널티에어리어 안에 있던 칠레 수비수의 손을 공으로 맞혀버린다.[22] 다분히 페널티킥을 일부러 얻으려 한 동작. 결국 얻어낸 페널티킥을 후반 40분 바조가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마무리 짓는다. 바조로 시작해서 바조로 끝난 경기였다. 이 시합에서 골로 바조는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골을 기록했다. 또한 팽팽하게 전개되던 오스트리아에서도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을 뽑아내며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다시 한 번 드러냈고, 이탈리아는 2승 1무 조 1위로 무난히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16강 상대 노르웨이를 꺾고, 마침내 8강에서 홈팀 프랑스를 만난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후반 교체 멤버로 뛰었으나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고, 양팀은 0:0으로 비긴채 승부차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탈리아 첫번째 키커가 바조... 경악과 불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조는 침착하게 성공한다.
파일:바조-조용히해!.jpg
승부차기에 성공한 뒤 세리머니를 펼치는 바조
이때 킥을 성공시키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세리머니를 했다. 이를 본 국내 해설진은 "자기 옛날 월드컵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걸까요?"하며 웃음을 지었다.[23]

하지만 마지막 키커 루이지 디 비아조가 실축하면서 끝내 이탈리아는 4:3으로 패한다.[24] 이 실축은 4년 전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바조의 킥과는 달리 골대 윗부분을 맞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해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디 비아조에게 바조가 다가가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5]

유로 2000 때는 하향세로 제외되었다. 결국 바조는 유로에서 단 1경기도 뛰지 못했다.

2001년 10월 당한 부상에서 기어코 복귀해내며 의욕을 불태웠던 2002 한일 월드컵 참가는 트라파토니 당시 감독이 끝내 바조를 외면하며 이뤄지지 못했다. 비에리-토티-델 피에로 3각 편대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바조를 외면했으나, 큰 대회에서는 스스로 격이 달라지는 바조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는 2002년 본선 내내 불만족스러운 경기력 끝에 크로아티아에 패하고 멕시코와도 극적인 동점골 끝에 겨우 비겼다. 에콰도르가 크로아티아를 잡아주는 이변으로 32강 조 2위로 겨우 16강에 진출했고 무엇보다 한국과의 16강전에서 골가뭄 끝에 1:2 역전패까지 당하게 된다.[26] 엔트리 제외에 실망하여 두문불출하던 바조가 2003년 은퇴를 표명하자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으로 2004년 4월 28일 스페인과 친선 경기에 발탁했다. 이 시합이 바조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결과는 1:1 무승부. 시합 후 인터뷰에서 은퇴나 지금까지의 대표팀 생활을 거론하지 않고 당장 오늘 치른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게 아쉽다고 발언하며 골잡이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냈다.
파일:1532927791759.jpg
바조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

4. 플레이 스타일


바조는 몇 안되는 판타지스타라 불리우는 공격수다. 바조는 최전방에 못박혀 득점을 노리는 득점 기계 타입의 선수가 아니었다. 피치 위에서 포워드가 맡을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들, 그러니까 윙어/최전방/투 톱뿐만 아니라 메짤라까지, 다양한 위치를 소화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한 위치는 공격수들 밑에서 어시스트와 득점을 모두 노릴 수 있는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였다고 한다.[27] 미셸 플라티니는 그런 바조를 환상적인 9.5번으로 표현했다. 공격 조율, 침투, 공간 창출, 키 패스, 득점까지 공격수로서 해야하는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트레콰르티스타였던 것이다.

타고난 골잡이로써 박스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득점을 뽑아내었고 박스 바로 앞에서 침착하고 정확하게 감아차는 골에 아주 뛰어났다. 그 뿐만 아니라 발리 슈팅이나 칩슛도 자주 보여주었다. 프리킥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 당대에도 디에고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지쿠와 비교되었고 현재도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를 뽑을 때 상위권에 선정된다. 페널티킥한 번의 실수로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122시도 106골, 약 86%란, 이탈리아 역대 1위의 PK 성공률을 자랑한다.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양발 모두 기술적으로 상당히 뛰어나고 순간적인 가속력과 민첩성이 엄청났기 때문에 수비수을 손쉽게 벗겨낼 수 있는 환상적인 드리블 능력을 가졌다. 지쿠가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칭찬했을 정도. 순간적인 가속과 감속으로 상대를 벗겨내는 드리블은 리오넬 메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 판타지스타로 불리우는 델 피에로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판타지스타의 정의에 부합되는, 보는 이를 홀리는 플레이라는 관점에서 바조가 훨씬 판타지스타답다. 델 피에로는 20대 초반에만 그런 모습을 보였다. 델 피에로가 큰 경기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플레이로 팀을 살린 적이 얼마나 있나 생각해보면, 바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건 바조가 왜 그 이후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는가와도 관계가 있는데, 카테나치오같은 수비적 전술을 들고 나온다면 바조가 더 맞는 카드다. 토너먼트에서 어떻게든 막고 바조에게 연결하면 어떻게든 해결시켜 주니까. 하지만 전술의 이탈리아가 낳은 많은 이탈리아의 명장들은 판타지스타의 원더플레이와 골에 의존하기 보단 좀더 조직적으로 골을 만들어내고 감독의 계산 하에 안정적인 게임을 하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이 약하고 공격 위치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좋아하는 바조보다는 델 피에로가 훨씬 맞는 카드였던 것.[28] 그러나 이탈리아는 바조가 핵심으로 활약한 대회들과 달리 감독의 전술에 맞춰 바조가 제외된 대회에선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현재까지도 이탈리아는 답답한 상황을 타개 시켜주는 바조 같은 히어로의 귀환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이다.[29]

보는 이를 감탄시키는 환상적인 플레이와 결정적인 순간에 팀을 구해내는 영웅기질로 수많은 선수와 팬들을 매료시킨 최고의 판타지스타, 그것이 바로 로베르토 바조였다.

[1] 때문에 1982-83 시즌 데뷔로 표기할 수도 있다[2] 이 부상은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게 된다.[3] 사실, 십자인대 파열은 바조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이 당해도 쉽사리 재활을 끝내기 어려울 뿐 더러 부상 부위가 재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언제든지 경기 도중 경기장 밖으로 실려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나우두이다.[4] 당시 1900만 달러 정도. 2009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억 3천만 달러 가량.[5] 유벤투스 첫시즌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한 PK를 거부한 바 있다. 또한 이 경기에서 그는 교체아웃 될때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들고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갔는데, 유벤투스 이적 초반 피오렌티나 팬들은 바조에게 야유를 퍼붓었지만 이 이후로는 그럭저럭 레전드 대우를 해주게 된다. 물론 유벤투스 팬들은 이런 행동을 그렇게 달가워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안가 바조의 퍼포먼스에 매료되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6] 여담으로 이 무렵 피오렌티나는 10년전 석연찮은 판정으로 리그 우승을 유벤투스에 뺏긴 앙금이 남아 있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는데, 하필 이틀전 UEFA컵 결승에서 유벤투스에 패해 적대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현질로 에이스를 빼간다고 염장질을 해대니, 팬들의 폭동으로 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진압을 위해 경찰까지 출동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도 피렌체는 이탈리아 전국에서 유벤투스 팬클럽 지부가 없는 유일한 도시다.[7] 유벤투스의 10번은 아주리 군단의 핵심 공격수라는 공식이 있었다. 이 공식을 깬 유일한 인물이 AS 로마프란체스코 토티였다.[8]UEFA 유로파 리그[9] 당시 UEFA컵 결승전은 홈&어웨이 2차전이었다.[10] 바조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리피, 카펠로, 사키 모두 손꼽히는 명장들이다보니 빅 클럽이 안풀릴 때마다 불려오는 일이 잦았다.[11] 이때 바조의 반응도 걸작인게, 자기가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일체의 인터뷰도 끊은 채 두문불출했다. 물론 한창 회춘모드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바조에게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12] 바조는 연장 종료 직전에 공을 받자마자 휘슬이 울려서 아쉬웠는지 공을 뻥 찼고, 우연히 골망에 들어갔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골키퍼 고이코체아는 막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사실 킥의 파워나 각도를 봤을 때 고이코체아가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슛이었다.[13] 유로1996부터 지역예선에서 본선 유로에 들어갈 자리가 8자리(8강)에서 16자리(16강)로 확대된다.[14] 오늘날 쓰이는 '죽음의 조'라는 말도 당시의 충격적인 조 편성을 보고 탄식한 이탈리아 축구협회장의 발언에서 유래했을 정도다.[15] 당시 이탈리아는 2위인 아일랜드와 득점과 실점이 같았으나, 아일랜드에게 진 탓에 승자승에 뒤쳐져 3위로 밀렸다. 심지어 조 3위 간 경쟁에서도 4팀 중 꼴지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24강 C조에 속한 대한민국볼리비아를 잡았다면 이탈리아는 다득점에 밀리면서 각조 3위에게 주어지는 티켓 4팀안에 들지 못해 24강 조별 리그에서 탈락할 뻔 했다.[16] 특히 노르웨이 전에서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자 아리고 사키는 골키퍼를 교체하면서 바조를 뺐는데 훗날 사키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나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나쁜 쪽으로 받아들였죠. 다음날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자기가 마라도나였다면 뺐을거냐고요. 난 팀의 감독이지, 개인의 감독이 아니라고 했죠. 팀을 위해서 잘한 결정이라고 봐요"라고 말했다.[17] 특히 토너먼트에서 6골 중 5골은 본인이 기록했다. 본인이 골이 나오지 않은 결승전을 제외한 각 경기마다 기록한 두번째 골들이 모두 결승골이였다.[18] 참고로 이로부터 8년 뒤 월드컵 16강전에서, 설기현도 이 시간에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승부를 연장까지 끌고 간 바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서서히 다 포기하고 고배를 마실 각오를 하던 해설진, 응원단들이 환희와 더불어 재긴장감으로 분위기가 뒤집혔던걸 떠올리면 바조가 동점골을 만들던 당시의 이탈리아 분위기도 충분히 우리에게 와닿을 만 할것이다.[19] 이 때 아주리 군단에서 첫번째 키커로 나와 실축한 선수가 바로 파올로 말디니 이전 아주리와 AC 밀란의 위대한 주장인 프랑코 바레시다. 그러니까 공수의 중심이자 주장, 정신적 지주가 모두 실축했다는 것. 우리나라로 치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8강 승부차기에서 홍명보황선홍이 실축한 것과 다름없다. 더군다나 프랑코 바레시가 찼던 슛 역시 바조와 똑같이 크로스바를 넘겼다.[20] 당시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하고 온 33세의 노장 공격수로 대회 내내 1골 밖에 넣지 못하는 등 제 역을 못하며 부진했다. 애초에 승부차기에 넣을 선수가 아니었다는 의미.[21] 바조가 넣은 뒤 브라질 선수가 실축해야 다시 기회가 생기는 극악의 확률이었고, 바조가 넣었다고 해도 브라질 선수가 넣으면 그대로 끝인데 바조가 거기서 홈런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현재까지 회자되게 되었다.[22] 비슷한 상황이 토트넘과 리버풀의 2018-19 챔스 결승에서 재현되었는데, 전반 1분도 되지 않아 사디오 마네가 박스 안에서 공을 잡은 후 상황이 여의치 않자 손을 들어 지시를 하던 무사 시소코의 손을 공으로 맞혀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으며, 이 골이 결승골이 되어 리버풀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23] 사실 선수에게 이렇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게 맞다. 예를 들어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의 경우, 안정환페널티킥을 실패하며 팀의 위기를 불렀으나 결국 골든골 득점으로 한을 풀었다. 만약 그 경기에서 대한민국이 졌다면 안정환은 바조처럼 은퇴하고 나서도 그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다. 바조의 경우는 그 무대가 결승전이라 한을 제대로 풀지는 못한 모양이다.[24] 대회 5등[25] 이후 유로 2000에서 루이지 디 비아조가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에서 1번 키커로 나와 성공시켜 바조의 데자뷰가 됐다.[26] 대회 15등[27] 하지만 팀과 감독의 전술에 맞지 않아 이 위치에서 많이 뛰지는 못했고 가장 많이 뛴 위치는 4-4-2세컨드 스트라이커였다.[28] 물론 그 델 피에로조차 토티라는 더 전술에 맞고 세트피스에 뛰어난 선수에게 밀려나게 된다.[29] 이탈리아 뿐 아니라 독일과 스페인 역시 팀 단위의 점유율과 패스에서 상대방을 압도하고도 결정적인 한방이 없어 월드컵에서 연달아 죽을 쓰며 간절하게 크랙(crack)의 존재를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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