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 루돌프 피어틀 Rudolf Viertl | |
출생 | 1902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슈베하트[1] | |
사망 | 1981년 12월 9일 (향년 79세)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66cm / 체중 69kg |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 |
소속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 1. 지머링 SC (1924~1928) FK 아우스트리아 빈 (1928~1938) 게르마니아 슈베하트 (1939~1940) SC 브룬 (1943~1944) |
국가대표 | 16경기 4골 (오스트리아 / 1925~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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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30년대에 활약한 오스트리아의 축구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피어틀은 1924년부터 1. 지머링 SC라는 클럽에서 아웃사이드 레프트나 센터 포워드 포지션에서 뛰었다. 당시 지머링에는 레오폴트 다니스와 나중에 분더팀의 동료가 될 요한 호르바트 등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피어틀은 그들과 함께 1926년에 소속팀을 3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클럽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2년 후, 시머링은 1부 리그에서 강등당했고 피어틀은 FK 아우스트리아 빈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되었다.피어틀은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오스트리아 리그의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컵대회에선 3차례 정상에 올랐다. 개인 활약으로는 1929-30 시즌의 16골이 커리어 하이였으며 1933년에는 컵대회 우승과 국제 컵 대회인 미트로파 컵에서 암브로지아나 인테르를 꺾고 우승하면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936년에는 아우스트리아 빈이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승리하며 다시 한 번 미트로파 컵을 차지했으며 피어틀은 아우스트리아 소속으로 두 차례 모두 우승을 경험한 5명의 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1938년 이후에 피어틀은 고향팀 제르마니아 슈베하트에서 잠시 뛰다 브룬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2.1.2. 국가대표팀
피어틀의 국가대표팀 데뷔전은 1925년 9월의 헝가리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데뷔전 이후 재소집까지 4년을,체코슬로바키아와의 2차례 시합 이후 재소집까지 또 3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돌프 포글이 당시 분더팀의 주전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중용받았기 때문이었고 피어틀은 분더팀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었다.그러던 피어틀은 1933년 10월부터 다시 기회를 받았고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피어틀은 오스트리아의 4경기를 모두 소화했고 팀이 4위에 오르는데에 만족해야했다.
그는 1936년, 홈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지던 잉글랜드를 2대1로 누른 시합에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피어틀의 대표팀 경기 마지막 상대는 프랑스였으며 12년간 16경기 출전, 4득점의 기록을 남겼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피어틀은 기술보다는 스피드와 슈팅 파워 등 운동 능력에 더 의존하던 공격수였다.4. 수상
4.1. 클럽
- ÖFB-컵 우승 3회: 1932–33, 1934–35, 1935–36(FK 아우스트리아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2회: 1933, 1936(FK 아우스트리아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36-37(FK 아우스트리아 빈)
- ÖFB-컵 준우승 2회: 1929-30, 1930-31(FK 아우스트리아 빈)
4.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