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05:20:18

루즈니키 스타디움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루즈니키 참사 추모비.jpg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세워진 추모비

1. 개요2. 사고의 전개3. 사고 이후4. 사망자 수 조작?5. 추모

1. 개요

1982년 10월 20일 소련 모스크바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압사 사고.

2. 사고의 전개

당시 UEFA 유로파 리그 32강전이 열렸는데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네덜란드에서 온 HFC 하를렘이 경기을 펼쳤다. 축구를 보러 16,500여명의 관중이 모였다. 사고 이전 아스날 FC와의 경기 때는 68,500명이 모였고 당시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최대 82,000명의 관객을 수용할수 있단 점을 감안하면 꽤 적게 모였다. 관중의 거의 대부분이 스파르타크 팬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원정온 팬들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섭씨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 경기 전 눈이 내렸다. 아직 지붕이 설치되기 전이라[1] 직원들은 급히 눈을 치우긴 했지만 동쪽과 서쪽 관중석의 눈만 치웠고 나머지는 그대로 있었다. 12,000명의 관중들은 동쪽 관중석에 앉았는데 동쪽 관중석이 지하철역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후 7시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시작 후 16분 에드가 게스(Edgar Gess)가 골을 넣었지만 이후 경기는 큰 흐름 없이 조용히 흘러갔고 후반전도 끝날 무렵이 되자 경기가 다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팬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동쪽 관중석에는 양 옆으로 계단이 있었고 출입구도 전부 열려있었지만 사람들은 지하철 역과 더 가까운 1번 계단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점점 많이 모여들었고 너무 모여들어 몸을 움직이기 조차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1번 계단을 통해 내려가던 여성 1명이 신발이 벗겨지면서 넘어졌다. 이를 본 뒤의 사람들은 여성을 도우려고 멈춰섰으나 이걸 보지 못하고 뒤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또 걸려 넘어지고 걸려 넘어진 사람들에 다른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군중붕괴가 일어났다. 앞에서 사람들이 도미노마냥 계속해서 넘어지는 것도 모른 채 뒤에선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려와 사태는 커지기 시작했다.

후반전 90분, 경기가 끝나기 20초 전에 세르게이 셰프소브(Sergei Shevtsov)가 2번째 결정 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2-0으로 스파르타크의 승리로 끝났지만 승리를 결정지은 골에 나가려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사태는 더더욱 심각해졌다. 훗날 세르게이 셰프소브는 "차라리 그때 골을 넣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이 사고로 66명이 사망했으며 61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 중 21명은 중상이었다. 사망자 중 대다수는 청년이었고 38명은 18세 이하였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고작 14살이었다. 이 사고는 소련 역사상 가장 사람이 많이 사망한 스포츠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에 사고와 관련해 경기장 감독과 매니저, 감독 대리인, 그리고 동쪽 관중석을 책임지던 경찰이 법정에 섰다.

감독과 매니저는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소련 성립 60주년 기념일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4. 사망자 수 조작?

하지만 이런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사고 직후에는 언론사에서 그리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의 몇몇 신문사에서 "사상자가 좀 있었다." 고 보도되기만 했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쪽 스포츠 잡지에선 "3명 사망, 100여명 부상" 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고로부터 얼마 안 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하면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그쪽으로 더 몰려 사고는 묻혔다.

그러다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인 1989년 4월 18일 소련의 한 스포츠 잡지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스포츠 참사 중 이 참사를 언급하면서 세상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기사에선 100명 이상 사망했다고 보도되었다. 3달 후 같은 잡지에서 이 참사를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34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7월 20일 소련의 한 신문사에서 이 참사에 대해 다루면서 66명 사망이라고 발표했으며 당시 사고 조사에 참여했던 형사와의 인터뷰도 담았고 왜 이 사고가 그동안 숨겨졌는지도 보도했다.

9월 27일, 34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던 잡지는 "기자의 추측에 불과했다." 며 66명이 사망한 것이 맞다고 다시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의 분위기,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나서야 대중에 제대로 알려졌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직까지도 사망자 수가 축소되어 보고됐고 실제론 340명이 사망한게 맞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일 경우 리마 축구 폭동을 넘어서는 사상 최악의 축구 참사로 기록된다.

5. 추모

2007년 10월 20일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추모비가 공개될 때 사고 당시 경기에서 뛰었단 스파르타크의 선수들과 하를렘의 선수들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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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지붕은 1997년에야 설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