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조지 타카노부 龍造寺隆信 | Ryuzoji Takanobu | |
류조지 다카노부 (교로쿠 2년 음력 2월 15일(1529년 3월 24일) ~ 덴쇼 12년 음력 3월 24일(1584년 5월 4일) | |
번갈아도는 12일족[1] 変わり十二日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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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규슈 다이묘. 류조지 가문의 19대 당주.
규슈의 북서쪽을 차지했으며, 북동쪽의 오토모 소린, 남쪽의 시마즈(島津) 가문과 함께 규슈 3강(九州三强)을 이뤘다. 별명은 히젠의 곰(肥前の熊). 곰처럼 음흉하고 냉혹한 성격과 무략으로 류조지 가를 강성하게 했다.
2. 생애
'류조지 가 부흥의 시조'라고 불리운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의 증손자며, 이에스미(家純)의 손자, 지카이에(周家)의 아들이다.본래 류조지 가는 히젠국의 토착 호족이었다. 훗날 규슈 통일을 놓고 경쟁하는 오토모나 시마즈가 슈고 다이묘 출신으로 원래부터 명문가였던 것과 달리, 류조지는 섬기던 가문을 하극상하고 세력을 키운 센고쿠 다이묘다.
류조지는 본래 히젠의 대영주 지바(千葉) 가문을 모셨으나[2],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쇼니(少弐) 가문이 오우치(大内) 가문의 압박을 받아 원래 기반인 지쿠젠에서 히젠으로 옮겨와 지바 가문을 밀어내자 쇼니 가문의 가신이 된다.
다카노부의 증조부인 이에카네는 13대 당주 야스이에(康家)의 5남으로 당주들이 자주 요절한 류조지 가문 내에서 원로로서 발언권을 확대해나갔고 쇼니 가문의 가신으로서도 입지를 다졌으며, 1530년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오우치 가문의 대군을 격파하고 쇼니 가문을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가 1536년 오우치 요시타카의 공격을 받아 자살하자, 쇼니 가에서는 류조지 이에카네가 오우치 가와 내통해서 스케모토를 버렸다는 의혹[3]이 제기되었다. 쇼니 가의 중신인 바바 요리치카(馬場頼親)는 류조지 가문의 성장을 견제할 겸, 주군에 대한 모반을 구실로 1545년 류조지 이에카네의 가족을 모조리 주살한다.
이에카네는 겨우 목숨을 건져서 지쿠고의 야나가와 성주 가마치 아키모리에게로 달아났고, 이 때에 증손자 류조지 다카노부도 데리고 갔다. 당시 다카노부는 7살에 출가해 승려로 지내고 있었다.
류조지 이에카네는 이듬해에 복수에 나섰다. 가마치 아키모리와 나베시마 기요후사 등의 도움을 받아 거병한 이에카네는 일족의 원수인 바바 요리치카를 토벌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에카네는 다카노부의 기량을 꿰뚫어보고 그를 환속시켜 직접 대를 잇도록 유언을 남긴 뒤 눈을 감는다. 향년 93세.
이에카네는 마지막 토벌전으로 전력을 대부분 소모할 수밖에 없었고, 본가 당주 류조지 다네미쓰(龍造寺胤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류조지 다카노부 역시 예전 이에카네마냥 류조지 가문의 대표처럼 세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고, 쇼니 가문에서 오우치 가문으로 갈아탄 류조지 다네미쓰의 명으로 쇼니 후유히사를 무찔렀다. 그러나, 류조지 다네미쓰가 얼마 못 가 후사 없이 죽자 다네미쓰의 부인(다카노부의 종고모)과 혼인하여 당주가 되었다.
최초 가독을 승계받은 직후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는 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오우치 요시타카를 등에 업었으나,[4] 오우치 요시타카는 1551년에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으로 사망한다.
뒷배가 없어진 다카노부에 대항하여 가신들은 다카노부의 당숙 류조지 아키카네(龍造寺鑑兼)를 옹립해서, 다카노부는 또다시 가마치 아키모리에게로 달아나는 처지가 된다.
다카노부는 2년 뒤에야 복귀하여 가문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아키카네는 당시 12살에 불과한 데다(다카노부보다 13세나 어림) 다카노부의 처남이기도 했기에, 죽이지 않고 원래 영지로 돌려보냈다.
다카노부는 당시나 후세에나 '냉혹한 성격에 의심이 많다'는 공통된 평이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이 어려서부터 수 차례나 쫓겨났다가 돌아오는 등,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복귀하여서부터는 본격적인 류조지 가의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다이네이 사의 변)으로 인해 오토모 소린이 히젠 슈고직을 획득하자, 오토모 소린에게 속해 한때 류조지 가문의 주가였던 쇼니 가문, 지바 가문 등의 여러 세력을 멸망시키면서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너무도 급하고 강력하게 커가는 류조지 가문에 위협을 느낀 아리마(有馬), 오무라(大村) 등의 주변 세력이 연합을 형성하여 대항하였으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류조지 가문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오토모 소린은
오토모 소린의 동생 지카사다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위기에 빠졌으나, 이마야마 전투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활약으로 지카사다를 전사시켜 위기에서 벗어났다. 비록 이 승전으로도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동생 류조지 노부치카(龍造寺信周)를 인질로 보내고 화평을 맺었으며 장남 마사이에의 이름에도 소린(요시시게)의 이름 한 자를 넣은 시게카타(鎮賢)를 쓰는 등 오토모 가의 위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존에 획득한 영지를 그대로 안도받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다카노부의 활약으로 류조지 가문은 근거지 히젠의 호족들을 굴복시켜나가며 세력을 키워갔다. 오토모 가가 미미가와 전투의 패전으로 몰락하자 오토모 가에게서 완전히 자립, 지쿠고, 지쿠젠과 부젠의 일부까지 차지하며 규슈 3강 중 한 세력인 오토모가를 능가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1581년에는 히고로 침입하여 다른 규슈 3강인 시마즈씨와 대치하다 히고를 반으로 갈라 갖는 등, 규슈 최강의 세력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영지 지배력에 있어선 슈고라는 전통적 권위가 있는 두 가문에 비해, 류조지 가는 쇼니 가문의 가신이었다가 하극상으로 주가를 뒤엎고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한 거라서 권위도 취약한 편이고 충의를 요구한들 먹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근거지인 동부 히젠 외의 지역은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출병해서 진압해야 했고 경고를 남겨두기 위해 가혹한 처분 등을 행했다.
예를 들어 지쿠고의 주요 세력인 가마치 시게나미가 시마즈씨에 접촉을 시도하자 유인해서 주살하고 야나가와 성을 쳐 가마치씨를 멸했으며, 아카호시 무네이에가 수상한 행적을 보이자 인질인 그 아들을 주살했다. 가마치 시게나미의 아버지 가마치 아키모리는 류조지 이에카네와 다카노부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야나가와 성으로 그들을 맞이해 보호하고 류조지씨가 세력을 회복하는 데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마치씨를 멸한 사건은 류조지 다카노부의 악명을 더욱 드높였다.
1584년에 시마바라 반도를 지배하던 아리마 씨가 반란을 일으켜 남쪽 시마즈 쪽에 붙었고, 이를 계기로 주변 호족들이 술렁거리게 되자, 다카노부가 직접 6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아리마를 정벌하고자 출정함으로써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가 발발한다.
다카노부의 6만 대군에 맞설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8,000 정도로 명백한 수적 열세[5]였으나, 시마즈가 4형제의 막내인 시마즈 이에히사는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와 늪지대 사이의 좁은 길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전투를 이끌어간다. 이에히사는 일단 한 번 전투를 걸었다 도망치는 척 하며 오키타나와테로 유인한 후, 갈대에 숨어있던 복병을 이용해 기습했다. 류조지군도 만약을 대비해 시마바라만 해안선과 산 쪽으로 별동대를 꾸렸지만 시마즈는 이것도 예상해 아리마 측 수군과 조총 부대를 이용해 격퇴했다.
결국 오키타나와테 전투는 류조지 가의 대패로 끝났고, 그 과장에서 당주인 다카노부 자신도 5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이 전투로 류조지 가문이 바로 망하진 않았지만, 다카노부 본인을 위시한 류조지 사천왕 등, 류조지가의 우수한 무장 들이 다수 사망하면서 결국 향후의 세력판도를 시마즈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전쟁의 목표였던 시마바라 반도 일대는 물론 히고의 호족들도 시마즈 편으로 돌아섰고, 지쿠고에서도 일부 호족들이 시마즈나 오토모에게로 이탈했다.
오키타나와테에서의 패전은 류조지 군의 장병이 진창에 발이 묶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카노부가 무모한 공격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병사들이 자포자기해서 졌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평소부터 가신들을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다카노부의 가마를 드는 것에 질린 측근들은 가마를 버리고 도망쳐서, 다카노부는 도망칠 틈도 없이 끔살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바로 앞에 나타난 시마즈의 무사를 향해
홍로 위, 한점의 눈.
(紅炉上一点の雪)
(紅炉上一点の雪)
라는 말을 하고 죽음을 당하는데 이것이 사세구로 전해진다.[6] 곰같은 양반이 뭐이리 간결하고 서정적인 표현을 다 생각해내나...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타카노부는 7살때부터 18살때까지 승려로 살았었다.[7]
그 후 시마즈 군이 베어간 다카노부의 목은 후에 류조지 가에 반환되었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반환을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다카노부의 어머니 게이긴니는 16대 당주인 류조지 다네카즈의 딸로, 아버지 류조지 지카이에와는 6촌 남매 관계다. 지카이에가 죽은 후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아버지인 기요후사의 아내가 됐기 때문에 나오시게와는 형제뻘. 대단한 여장부로 다카노부가 죽고 난 후 나오시게와 함께 류조지가를 다스렸다고 한다.
다카노부 사후 류조지 가는 아들 마사이에가 이었으나, 병약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실권을 쥐었다. 마사이에의 아들 다카후사와 마사이에가 나란히 죽은 후 사가 번은 결국 나베시마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두 동생 노부치카(스코 나베시마 가의 시조), 나가노부(다쿠 나베시마 가의 시조), 육촌 동생 이에하루(위의 아키카네의 아들. 이사하야 나베시마 가의 시조)는 나베시마 카츠시게의 계승을 지지했고, 류조지 다카노부의 아들 고토 이에노부(무토 나베시마 가의 시조)와 함께 나베시마 가에서 친족에 준하는 가격을 받아 '류조지 4가'라 했다.
3. 기타 창작물
3.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전형적인 맹장형 무장으로 등장. 규슈 3강 중 류조지가만 가문기술이 없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최근작인 창조 PK에서는 드디어 가문 고유 정책이 추가되었다. 가신단도 규슈 3강 중 가장 약하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다카노부 본인에 사천왕 정도면 전투에서 많이 밀리지 않으며, 나머지 규슈 잡가문들과는 확실히 급이 다르다. 류조지 일족들은 여러 명 있지만 다카노부와 증조부 이에카네 빼면 다들 어디 써먹기 힘든 능력치라, 다이묘 일족들이 많고 능력도 좋은 시마즈나 다이묘 빼면 일족이랄 게 한 명(오토모 소린의 차남 지카이에)뿐인 오토모와도 구별된다.
창조에서는 통솔 85 무용 89 지략 63 정치 45의 맹장형 스탯. 전법으로는 자신의 닉네임인 '히젠의곰'을 고유 전법으로 들고 나왔는데 난전 강화 및 구축물 철거로서 시바타 카츠이에의 하위호환격이라 할 수 있다. 이번작에서도 남부의 시마즈가 상당히 강세인지라 AI가 잡으먼 빈번하게 오토모 가문과 동맹 혹은 정전을 맺고 시마즈의 북진을 꾸역꾸역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재풀면에서는 다카노부 본인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A급이고 류조지 사천왕 다섯명(어?)들의 전투능력치가 상당히 준수하여 B+급이상 무장의 수에서는 시마즈, 오토모에 크게 밀린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오토모는 도세츠, 죠운, 무네시게 S급이 셋이나 있지만 셋의 활동기간이 셋 다 서로 미묘하게 다르고, 그 아래 70대중반~80대의 무장들이 눈에 거의 띄지 않는 편. 다만 역사시나리오의 경우 70년대 초중반까진 오토모가, 그이후로는 시마즈가의 국력이 워낙 강세인지라 외교줄타기를 잘하면서 히젠과 히고를 집어먹다가 오토모, 시마즈 어느 한 세력을 흡수하면 그뒤로는 탄탄대로. 물론 70년대이후 시나리오에선 오다가가 워낙 강하기때문에 오다가 키나이지방을 전부 집어먹기 전에 서둘러 세력을 갖춰 동쪽으로 진출하는것이 중요하다.
만약 다카노부가 가마치 아키모리에게 망명한 시기인 1551년 9월 ~ 1553년 기점의 시나리오가 있다면 아키모리가 오토모 가신으로 나오는 게임 특성상 다카노부도 라이벌 오토모 소린의 가신으로 등장하는(!) 고증에는 맞지만 해괴한 모양새가 되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때가 기점인 시나리오는 시리즈 통틀어서 없다.
[1] 고대부터 일본사회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그 중 일부 문양은 「히아시(日足)」 라고 불리면서 무가의 문양으로서 사용되었다 (히아시몬 《日足紋》). 특히 규슈 지방의 무사 가문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그 예로서, 히젠 국의 류조지 씨(龍造寺氏)와 지쿠고(筑後) 지역 구사노 씨(草野氏)의 「12히아시몬(十二日足紋)」, 히고(肥後) 지역 기쿠치 씨(菊池氏)의 「8히아시몬(八つ日足紋)」 등이 있다. 규슈 지방에 욱광 문양이 특히 많은 것은 히젠(肥前) · 히고(肥後)국이 「히노쿠니(日の国)」 (해의 나라) 라고 불리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설이 있고 욱일 문양에는 옛날부터 몇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광선이 사방팔방으로 구름없이 퍼져나가는 디자인은 하레(ハレ) 역설하면 일본인 특유의 일상과 비일상을 구분하는 시간관념적인 세계관과 그를 표현한 일본 특유의 미의식를 표현한 것으로, 집안이나 마을에 경사 등이 있는때에, 경사스러운 상황이나 경기가 좋은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디자인이었다. 또, '홍백' (빨간색 + 흰색) 의 조합도 역시 옛날부터 일본에서 '하레'를 의미하여, '엔기모노(縁起物)'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 또는 문양) 로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었다. 류조지 가문은 한때 구사노 가문이 사용했던 '変わり十二日足'라는 가몬으로부터 이양받았고 가몬의 역사는 지쿠젠국의 구사노 가문의 가몬(十二日足紋) 일본에서 욱일장 자체로 비교적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일부가 '日足'이라고 호칭되었던 무가의 가문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규슈 지방의 무가에 많이 사용되었고, 히젠국 류조지씨와 지쿠고국 구사노씨의 変わり十二日足라는 히고국 기쿠치씨의 変わり八日足등이 있다. 여기서 日足는 일각, 햇발, 태양이 움직이는 속도를 말한다.[2] 류조지 가문 인명에 자주 보이는 다네(胤)가 이 지바 가문에서 하사해준 글자다. 다카노부도 한때는 다네노부(胤信), 다카타네(隆胤)란 이름을 썼다.[3] 실제로 모반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다.[4] 이름 다카(隆)노부도 오우치 요시타카(隆)의 타카를 하사받은 것이다.[5] 실제 시마즈의 군세는 류조지의 군세보다 많았으나 오토모 가문과도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분산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6] 뜨거운 화로 위의 눈 한점이 눈깜짝할 새에 사라지는 것처럼 인생도 한순간뿐이었다는 의미[7] 허구헌날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무사들과는 달리 승려는 당대의 지식인 계층이었고 절간은 불도를 닦는것 외에 학문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환속시키는것 외에도 웬만큼 여유가 있는 무사들은 자식들을 근처 절간에 보내서 공부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