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6 00:50:20

리처드 우드빌(제3대 리버스 백작)

성명 존 우드빌
John Woodville
출생 1453년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그래프턴 레지스
사망 1491년 3월 6일 (향년 37~38세)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
어머니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형제 엘리자베스, 루이스, 앤, 메리, 앤서니, 자퀘타, 라이어널, 마사, 엘레노어, 리처드, 마거릿, 캐서린, 에드워드
직위 제3대 리버스 백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가담해 리처드 3세와 맞섰다.

2. 생애

초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과 폴 백작 피에르 1세 드 뤽상부르생폴의 딸이며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미망인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삼남이다. 1464년 누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에드워드 4세의 왕비가 된 이래, 우드빌 가문 인사들은 에드워드 4세 궁정에서 여러 요직을 맡고 상당한 영지를 획득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딱히 별다른 직위를 맡지 못했고, 특권도 얻지 못했다. 1469년 8월 에지코트 전투에서 왕실군이 패배한 뒤, 아버지와 형 존 우드빌이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앤서니 우드빌 등 형제들은 에드워드 4세를 따라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리처드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복귀한 뒤,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치세 내내 궁정에서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문의 영지인 베드퍼드셔 의 윔밍턴 영지를 소유했고, 그곳에서 보안관을 역임했다. 리처드가 보안관으로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했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ㅈ지위를 차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리처드가 아버지와 형이 피살당하는 것을 포함하여 지난 수십년간 이어진 귀족들간의 살육극을 목격한 후 조용히 지내는 걸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알려짔으나, 훈장을 받은 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하고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의 친족인 우드빌 가문과 그레이 가문이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정치에서 배제하고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서두르려 하자, 리처드 왕자는 리버스에서 런던으로 이동 중이던 에드워드 5세의 호송대를 중간에서 가로채고, 왕과 동행하던 앤서니 우드빌과 리처드 그레이[1]를 체포햇다. 그 후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 왕자는 호국경으로 선임된 뒤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 두 사람을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의회는 우드빌과 그레이가 저지른 혐의가 글로스터 공작 본인이 호국경으로 취임하기 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거부했다. 이에 글로스터 공작은 전략을 변경해 5월 중순 우드빌 가문의 재산을 몰수했고, 5월 19일 로버트 팸버튼에게 리처드 우드빌의 영지인 윔밍턴을 접수하게 했다.

1483년 6월 25일, 앤서니 우드빌과 리처드 그레이가 글로스터 공작의 명령에 따라 폰트프랙트 성에서 참수되었다. 다음 날, 글로스터 공작은 자신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로 선포했다. 앤서니 우드빌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리처드 우드빌은 리버스 백작이 되어야 했지만, 리처드 3세가 앤서니 우드빌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해 버렸다. 그 후 리처드 우드빌은 동생 라이어널 우드빌, 조카 토머스 그레이와 함께 1483년 가을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참여했다. 라이어널과 토머스는 각각 솔즈버리와 엑서터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리처드 우드빌은 뉴버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리처드는 다른 반군 인사들과 함께 1484년 의회법에 따라 참정권을 박탈당했다.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었지만, 리처드 우드빌은 처형을 모면했다. 그가 나라를 떠났다는 증거는 없지만, 뷰리외 수도원에 있는 동생 라이어널에게 피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1485년 1월 12일, 리처드 3세는 우드빌 가문을 포함한 이전의 적들 중 회유 가능한 인사들을 사면할 의사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 후 리처드 우드빌은 3월에 왕에게 대적하지 않는 걸 약속하는 조건으로 1,000마크의 벌금을 지불한 후 사면되었다. 이후 헨리 7세가 영국에 상륙한 후 리처드 3세를 상대로 보스워스 전투에서 격파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튜더 왕조 궁정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1490년 또는 1491년 2월 20일, 리처드 우드빌은 노샘프턴의 세인트 제임스수도원에 묻힐 것을 규정하는 유언장에 서명했다. 그는 그래프턴의 교구 교회에 자신의 영혼의 안식을 위한 기도와 미사를 바치는 대가로 그래프턴에 있는 모든 가축을 물려주었으며, 개인 재산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인 조카 토머스 그레이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또한 토머스 그레이는 그래프턴 백작을 기념하여 다른 종들의 소리를 가릴 종을 사기 위해 그의 새로운 영지에 있는 숲에서 충분한 수목을 팔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처드 우드빌은 1491년 3월 6일 미혼인 채 사망했고, 그의 작위와 백작령은 왕실에 넘어갔다.
[1] 에드워드 5세의 이부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