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Marcus Licinius Crassus | |
생몰년도 | 기원전 86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테르툴리아(어머니)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동생) 카이킬리아 메텔라(아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재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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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로마 공화국 최고의 부자이자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다.2. 생애
평민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여 집정관직이 평민에게도 개방되는 데 크게 기여한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9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숙청되었고,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정계의 거물로, 폼페이우스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머니 테르툴리아(Tertulla)는 로마 문화에서 셋째 딸의 별칭인 '테르티아(Tertia)의 변형된 단어이며, 어느 가문 출신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아들 중 하나가 악시우스라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너무나 많이 닮아서 크라수스 아내의 행실이 의심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아들이 원로원에서 연설을 아주 훌륭하게 하자, 키케로는 "과연, 악시우스[1] 크라수스로군."이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크라수스의 차남 푸블리우스는 19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으니, 이 아들은 마르쿠스일 가능성이 높다. 4~5세기의 로마 문학가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는 크라수스의 아들이 무용 기술을 특히 잘 터득했다고 기록했다. 이 인물 역시 마르쿠스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어느 시점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합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4년경에 재무관으로서 카이사르의 2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 후 벨로바키 부족의 영토에 주둔한 군단의 지휘관으로서 겨울 숙영을 보냈다.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끄는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을 때, 카이사르는 이들을 구하러 가면서 그에게 사마로브리바(오늘날 아미앵)에 있는 본부 경비를 맡겼다. 기원전 53년 카이사르가 메나피아에 대한 원정에 나섰을 때, 그는 재무관으로서 3개 군단 중 하나를 지휘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로 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는데, 기원전 48년 마르쿠스 칼리디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걸 볼 때 모종의 이유로 총독에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원전 69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의 딸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낳았다. 아들 마르쿠스는 기원전 30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스폴리아 오피마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으나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거절되었다.
[1] 악시우스는 그리스어로 '잘 어울리는'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