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랍어 معسكر )베르베르어 ⵎⵄⴻⵙⴽⴻⵔ
영어 Mascara
알제리 북서부 마스카라 주의 주도. 오랑에서 동남쪽으로 80km, 모스타가넴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고 인구는 약 20만명이다. 지명은 '진영'을 의미하는 아랍어 무아스카르 (معسكر)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것이 굳어졌다. 동명의 화장품 마스카라는 이탈리아로 가린다는 뜻인 마스케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관이 없다. 가죽 공업과 곡물 생산이 주요 산업이고, 질좋은 와인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해발 600m에 위치한 시가지는 순환도로로 둘러싸여 있고, 북부에는 무스타파 스틈볼리 대학교가 있다.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소도시 그리스에 마스까하 공항이 있다.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 저항군을 이끌었던 민족 영웅 압델 카데르의 고향이자, 그의 수도였던 도시로써 규모에 비해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2. 역사
동쪽 티게니프에서 40만년 전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다만 도시 형성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세기 베르베르계 바누 이프란이 파티마 왕조에 맞서 오랑을 파괴한 후 마스카라 서남쪽 아인 페칸을 중심으로 삼았고, 이후 마그라와 연맹이 일대를 다스렸다. 14세기에는 이븐 칼둔이 일대에 머물며 위대한 저작 무캇디마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는 알제 총독 하에 세 베이들이 서부, 남부, 동부를 다스리는 체제였다. 그중 서부 베이국은 본래 모스타가넴과 츨레프 사이의 마주나를 중심으로 삼았는데, 1701년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80여 km 떨어진 마스카라에 요새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중심으로 삼았다. 이는 마스카라에서 멀지 않은 오랑을 점령하기 위한 발판이었다.2.1. 서부 알제리의 중심
압델 카데르 모스크
도시에는 많은 안달루스계 무슬림들이 정착하였고, 그들은 1708년 오랑 탈환에 크게 활약하였다. 비록 1732년 스페인이 오랑을 재점령했지만 1790년 마스카라의 베이 모하메드가 3만 병력으로 도시를 봉쇄하였다. 2년 후 스페인 수비대는 협상을 통해 떠났고, 오랑을 접수한 모하메드 베이는 마스카라 대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던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여 알제, 오랑, 모스타가넴을 점령하자 마스카라의 유지이자 카디리야 종단의 지도자인 세리프 마히엣딘 이븐 무스타파는 저항군을 조직하였다. 그와 1808년생 아들 압델카데르는 1832년 오랑을 포위하는 등 반격에 나섰고, 이때의 활약으로 압델 카데르는 같은해 11월 부친의 추천에 의해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고향 마스카라[1]를 수도로 삼아 옛 베이 궁전을 거처로 삼았다. 마스카라에는 오랑과 모스타가넴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1834년 오랑의 프랑스 총독은 압델 카데르를 '아랍의 에미르'로 인정하는 휴전을 제안했지만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이후 새로 부임한 총독은 다시 공세에 나섰다. 그 무렵 마스카라가 해안과 가까워 프랑스 군의 위협에 취약하였다는 것을 깨달은 압델 카데르는 1835년 티아레 부근의 타그뎀트 (타헤르트)로 천도하였다. 같은해 12월 7일 프랑스 군은 마스카라를 점령하였다. 무슬림 주민들은 그 전에 대부분 도시를 빠져나갔고, 프랑스 군은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고 시가지에 방화한 후 철수하였다. 압델 카데르는 남은 유대인들을 데려와 저항군을 돕게 하였다. 1837년 타프나 조약으로 프랑스 당국은 오랑과 티테리를 제외한 서부 알제리를 압델 카데르에게 반환하였다. 이로써 마스카라는 재차 그의 영토가 되었지만, 1839년부터 프랑스 군은 재차 공세에 나섰고 마침내 1841년 5월 30일 프랑스 군은 재차 마스카라를 점령하였다.
2.2. 현대
프랑스 지배기에 마스카라는 프랑스 식으로 개조되었다. 독립 후인 1994년 8월 18일 도시에서 규모 5.7의 지진이 발생하여 171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알제리의 축구 영웅 라크다르 벨루미가 이곳 출신이다.[1] 정확히는 마스카라 서쪽의 게타라 산지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