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8080><colcolor=#fff> 제23대 일본방송협회 회장 마에다 테루노부 前田晃伸 | Maeda Terunobu | |
출생 | 1945년 1월 2일 ([age(1945-01-02)]세) |
구마모토현 | |
학력 | 나카츠시립 남부 초등학교 (졸업) 나카츠시립 성남 중학교 (졸업) 오이타현립 나카츠미나미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신체 | 166cm, 61kg, B형 |
재임기간 | 제23대 일본방송협회 회장 |
2020년 1월 25일 ~ 2022년 1월 24일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경력 | 후지은행 부행장 미즈호 홀딩스 대표이사 사장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사장 전국은행협회 회장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이사회장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특별고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 히고은행 감사역 일본방송협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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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금융가 출신 기업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 제23대 일본방송협회 회장을 역임했다.2. 생애
2.1. 출생과 학창시절
1945년 1월 2일 구마모토현에서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살 때 부모님의 고향인 오이타현 나카츠시로 옮겨 그곳을 고향 삼아 살았다.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음악계 동아리 활동을 하며 각각 하모니카와 트롬본을 연주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일본 대회 출전 성적도 남겼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카츠시에서 지냈고 1수 끝에 도쿄대학 법학부 제1류에 합격해 상경했으며 할머니 댁의 오토바이로 고향인 오이타현과 도쿄도를 오가며 살았다.
2.2. 후지은행 입행 후
취직을 위해 후지은행[1]과 스미토모은행에서 면접을 봤으나 스미토모은행의 면접에서 떨어졌다. 훗날 그는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당신은 밤중, 오테마치의 교차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호등은 빨간색이지만 차는 전혀 다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물론 건넌다”라고 대답한것이 원인이 아닐까“ 라고 회고했다. 단체 면접에서 마지막 순번이던 그 이외의 이전 면접자들은 모두 “멈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저널리스트 스다 신이치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후지은행에서 일하던 당시의 그를 입행 당초부터 사장이 되어서까지 가장 아침 일찍 출근해 일하는 엘리트로서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본인은 상술했던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신입행원 중에서도 나의 성적은 아마 꼴지였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입행 후 처음 배속된 곳은 금융가 도쿄·니혼바시의 바쿠로쵸 지점이었으며 그 후 본점으로 옮겨 대기업 법인 융자나 홍보등의 본부 업무를 오랫동안 맡았다. 이때문에 지점장이 되는 것이 늦어지기도 했다. 이후 본부에서 자본시장 부장, 융자기획 부장, 공공금융 그룹장, 재무통할 임원 등을 맡았으며 부행장을 마지막으로 후지은행을 퇴행, 미즈호은행과 미즈호 코퍼레이트은행이 재편되자 미즈호 홀딩스 사장에 취임했다.
2.3. 미즈호 홀딩스 사장 취임 후
2002년 사장 취임 직후, 산하행 합병에 따른 시스템 통합에 장애가 발생하면서 결제 이중 인출 등의 혼란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입사식에서 “위의 말은 듣지 마라, 상사에게 책임은 지게 하라”라고 말 한 참이었다. 이 문제로 국회에 출석해 “직접 이용자분에게 실해가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클레임이 대량으로 왔다고 하는 의미에서 매우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 그 후 곧바로 부적절한 설명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언론을 통해 크게 물의를 빚었다.당시 금융담당대신이었던 야나기사와 하쿠오[2]는 미즈호 은행의 시스템 장애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보고받았다"고 발언, 내부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드러내 더욱 미즈호은행은 비난을 받게 됐다. 미즈호 홀딩스는 이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 마에다를 비롯한 경영진 급여를 반년간 50% 삭감하는 형태로 대응했다.
같은 해, 다케나카 헤이조 금융담당대신이 책정한 금융재생 프로그램, 일명 ‘다케나카 플랜’의 방침에 따라 불량 채권의 처리를 실시했다. 그러나 주거래 은행을 맡고 있는 기업에 많은 도산이 발생해 대출 회수의 대표격으로 취급당해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2003년, 전년에 이은 주가하락으로 인해 4월 28일에는 닛케이 평균 주가가 버블 후 최저가를 기록한다. 3월기 결산은 그야말로 적자였지만 1조엔 규모의 대규모 증자를 실시해 재무적으로는 자금융통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증자는 잠재적인 주식 희석의 원인이 되었으며 6월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재무위기 후에도 자산 매각과 증자를 진행해 자본을 쌓아 2004년 3월기에는 흑자로 전환했으며 주식의 배당도 회복을 이뤄냈다. 2006년 3월기에도 특수요인이 있었지만 흑자결산을 실현시켰으며 당초의 이미지에서 탈바꿈해 경영 수완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세를 몰아 2006년 11월 8일,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현지 시간 9시 30분에 거래 개시의 종(오프닝벨)을 울렸다.
2.4. 일본방송협회 회장 취임 후
2020년 1월 25일, 제23대 일본방송협회(NHK) 회장으로 취임했다. NHK 경영위원회의 이시하라 진 위원장은 마에다를 NHK 회장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메가뱅크에서 큰 개혁을 해 온 실적이 있고, 사람을 정리하는 힘이나 개혁을 추진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2021년 12월, NHK의 전 직원에게 종적관계의 인사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회장 메시지를 발송했다. 또한 “인사이동의 최종 판단은 NHK그룹 전체를 부감한 시점에서 제가 적재적소의 인사를 실시합니다”라는 것이었다고 보도되었다. 그의 취임 이후 자세에 대해 ”계승되어 온 프로그램이나 뉴스 제작의 노하우가 깨져 버린다“라는 염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22년 2월, 정례기자회견에서 NHK의 회장 임기가 2023년 1월에 끝나는 것을 근거로 2기 취임에 대한 의욕이 없음을 공식화했다. “벌써 77세가 넘었기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유를 말했다.
3. 여담
아버지의 영향인지 두명의 아들은 각각 미쓰비시 UFJ 은행 ,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반대로 아들의 영향으로 나가부치 츠요시의 팬이기도 하다.어릴적 오이타현에서 자랐기에 재경 오이타현인회 회장과 도요노쿠니 가보스 특명대사를 맡고 있다.
“골프를 하면 금·공·명예가 한꺼번에 없어진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골프를 하지 않는다.
과학 잡지 ‘뉴턴’을 창간 이래부터 애독하고 있으며 취미는 휴일 정원 가꾸기로 강황과 선인장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하모니카도 계속하고 있어 휴일은 “일을 차단하고, 우주나 식물의 스케일에 몰두하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의 전신.[2] 여담으로 후생노동대신 당시 자민당 지역 당직자 모임에서 여성을 ‘애 낳는 기계’에 비유해 집중포화를 받았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