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마이클 잭슨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
이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King Of Pop임을 인정받았다.
쇼 비지니스에서 가장 성공한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거대한 야망을 가진, 풋풋한 젊은 흑인 청년이 자신의 모든 바람을 이룬 순간이자 영원한 전설로 올라서게 된 순간이다. 마이클과 퀸시는 총 30곡을 작업했으며 최종적으로 9곡이 수록됐고 75만 달러를 제작비로 소모했다. 이 앨범은 기록과 영향력에 앞서 여러 거물들이 대거 합작한 초거대 블록버스트 앨범으로 'The Girl is Mine'은 폴 매카트니와 듀엣으로 불렀으며 "잠 못드는 밤, 이 도시가 사과일 뿐이라며 한입 깨물어 먹고 싶다, 왜냐고 물어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해줘요."라는 철학적인 가사와 앨범에서 상대적으로 느리며 차분한 'Human Nature'는 유명 록 밴드 '토토'의 스티븐 포카로와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존 베티스가 공동으로 작곡한 곡으로 매력적인 80년 초의 마이클의 음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소 우울하기도 한 발라드 곡이다. 몽환적이고 현란한 히트곡 'P.Y.T(Pretty Young Girl)'은 1982년 그래미에서 'Best New Artist' 후보에 오른 제임스 잉 그램과 퀸시가 공동 작곡했다.
마이클 잭슨은 Wanna Be Startin' Somethin', The Girl is Mine, Beat It, Billie Jean 총 4곡을 작사/작곡했는데 이 중 'Wanna Be Startin' Somethin'은 피치포크가 선정한 1980년대 가장 위대한 곡 2위에 오르면서 당신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가 될 거라면 이런 거대한 곡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썼으며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전투적, 활동적이며 최고의 노래이자 앨범에서 가장 신선한 6분대의 펑키한 곡으로 평가한다. 가사는 가십 언론과 아무런 이유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곡으로 '빌리 진'이라는 여성을 가사에서 언급하는 데 야채를 먹으라는 독특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특히 이 곡의 하이라이트이자 절정인 '마마세 마마사 마사쿠사'는 마누 디방고의 아프리카 명곡 'Soul Makossa'에서 따온 것으로 전체적으로 리듬과 훅 등도 따와 디방고가 표절로 고소했었다. 디방고는 마이클의 변호사들과 100만 프랑에 합의하여 디방고는 'Wanna Be Startin' Somethin' '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퀸시는 앨범에 강한 비트의 Rock 곡을 포함시키고 싶었고 마이클은 부끄러워 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Beat It'을 둘려줬고 퀸시는 최초 녹음된 데모를 듣고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Van Halen이 기타 리프로 참여한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크로스 오버 명곡으로 'Beat It'의 뮤직비디오는 마이클 잭슨을 국제적인 슈퍼 팝 스타로 만드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저메인 잭슨은 마이클에게 영감을 준 라이벌 갱들간의 설전은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살 때 실제로 봤던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이클의 영원한 상징이 된 'Billie Jean'의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조하시라.
뉴욕 타임스의 존 로크웰은 오늘날 대중 음악 역사의 가장 거대한 가수 중 한 명이 만든 멋진 팝 레코드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완벽하게 크로스오버 했다고 평가했으며 게리 멀홀랜드 음악평론가는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했다. '스릴러'는 흑백을 초월해 미국인들의 하나의 생필품처럼 인식돼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Thriller'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1984년에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참고로 Thriller는 84년 3월 5일 시점에서 CBS 레코드의 집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3090만장이 팔렸으며 현재 시점에서는 6500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의 마이클 잭슨.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의 마이클의 잘생긴 얼굴 또한 많은 소녀 팬들을 울린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앨범은 귀로도 완벽하지만 눈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것은 뮤직비디오다. 이전까지는 대중음악에 있어서 뮤직비디오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홍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뮤직비디오가 부각되지도 않았고 단순하고 굉장히 촌스러웠다. 그러나 마이클은 역으로 뮤직비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Billie Jean'과 'Beat It', 'Thriller' 뮤직비디오를 영화계의 스텝들과 연계하여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로 제작하였고 스토리텔링에 맞춰서 현란한 춤을 추는 마이클의 모습은 음악산업을 뒤엎었다. 즉,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 버렸다. 1983년 3월에는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마이클은 빌리 진을 부르며 나타나서 문워크를 최초로 선보였는데 해당 공연은 녹화돼 5월달에 TV로 전국으로 송출됐으며 미국 전역은 아주 난리가 났다. 뛰어난 음악, 뛰어난 뮤직비디오, 거기다 앞으로 움직이지만 뒤로 가는 듯한 그의 신비한 춤으로 인해 그는 단번에 미국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마이클의 큰 대중적 성공을 본 뮤지션들과 레코드사들은 이후 음악산업에서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Thriller의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이어졌다. 당시 전 세계의 음반 시장은 퀸시 존스를 비롯하여 Thriller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요즘 음반 시장 상황을 보면 Thriller는 200만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 이라고 할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는데[1] 사람들은 마이클의 음반을 사기 위해 다시 레코드 가게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덩달아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사면서 쇠퇴하던 음반 시장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 Thriller는 일주일 동안 꾸준히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도 당시 음반 업계는 마이클의 성공으로 크게 도움을 봤다고 말했다.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2월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은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받아간다. 이는 최다 후보/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현재까지도 유효한 기록이다. 5월에는 백악관에 가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마약 퇴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는다. 레이건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다며 놀랄 정도로 수많은 인파들이 상을 받는 마이클을 보기 위해 백악관으로 몰렸다.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있는 단일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2년 뉴스위크는 더이상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같은 거대한 인기를 끄며 라디오-방송국을 통합하는 록앤롤 스타는 더 이상 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고작 몇 개월만에 마이클 잭슨은 뉴스위크의 예측이 틀렸음을 보여줬다. 사실 뉴스위크가 이런 예상을 할 만 했던 것이, 비틀즈 이후로 마이클 잭슨까지 약 12년간 거대한 스타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 후인 1984년 뉴스위크는 마이클 잭슨이 The Jacksons의 멤버로서 여는 'Victory Tour'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비틀즈 이후로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미디어들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으며 (1982년에는 흑인음악이 빌보드 차트에서 소외되고 있었음은 물론 백인과 흑인들간의 음악이 명백히 분리되고 있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유명세가 알려져서 인종차별까지 완화됐다고 보도했다. 마이클의 유명세는 대한민국에서도 엄청 났다. 조용필과 비견될 정도였다는 것이 80년대 신문기사에서 확인됐다. 또 1988년 9월 7일자 한겨레 신문 보도에서는 요즘 학생들이 마이클 잭슨의 생일인 8월 29일은 기억하면서 정작 국치일이었던 8월 29일은 잊었다며 학교 선생님이 서글프다고 심정을 토로한 부분까지 있었다!
비틀즈 이래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 그는 쉽게 분류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시대의 제임스 브라운 같이 현저한(탁월한) 흑인 팝 뮤지션이자, 영혼을 담은 노래와 열정적인 연출기법의 명수이며, 그는 혁신적이면서도 깊은 전통에 흠뻑 젖어 있는 맹렬한 리듬으로 춤을 출 수 있다. 초기 비틀스처럼, 그는 긍정적인 음악 애호가이며, 때로는 가장 인기 있는 팝 스타인 폴 매카트니와 협력하기도 한다. 그는 마치 록 가수들의 우상인 팻 부니처럼 귀엽고, 건강하고, 경건하며 현대 녹음 스튜디오의 거장이면서도 프레드 아스테러와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고풍스러운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
ㅡ뉴스위크 1984년
한편 당시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동화책에 나오는 피터팬과 같다고 언론에게 묘사받았다. 여자같이 곱상한 얼굴과 변성기를 제대로 거친 것 같지 않은 중성의 목소리 그리고 어디서나 얌전하고 수줍어하며 공손한 모습, 또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은둔하는 마이클은 마약을 하며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고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선배 록스타들과 팝스타들이 보여준 모습들과는 굉장히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회학자들은 마이클 잭슨의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가 그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도 추측했다.ㅡ뉴스위크 1984년
1984년 6월 2일에는 The Jacksons가 'Victory'라는 정규앨범을 발매한다. 마이클은 8곡의 수록곡 중 2곡은 형제들과 같이 2곡은 혼자서 불렀다. 단독으로 부른 곡 중 하나는 'Be Not Always'로 5분의 긴 곡인데 졸릴 때 자장가로 안성맞춤일 만큼 마이클이 차분하게 노래를 이끌어 가는 데 중간 중간에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상황에 딱 어울리는 곡, 그리고 이 앨범에서 하이라이트는 'State of Shock'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올랐으며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에도 선정됐다. 마이클과 랜디 잭슨이 공동으로 작곡했으며 무려 롤링스톤즈의 보컬이자 작곡가인 믹 재거가 듀엣으로 참여했었다. 믹이 왜 듀엣으로 참여했을까? 마이클의 스릴러가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자 믹은 감탄하며 마이클 잭슨에게 사로 잡혀 그의 인생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고 ... 원래 믹이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흡수하는 뮤지션이기도 하기에 당시 팝계의 선두였던 마이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State of Shock'을 부르기 전 마이클이 목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하자 당연히 응하면서 그를 존중했다고
참고로 빅토리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200만장이 팔렸는데 곡의 퀄리티가 'State of Shock'을 제외하고는 너무 평범하고 그 이전 데스티니, 트라이엄프 앨범과 비교하면 상당히 별로이다.그런데도 그 앨범들보다 미국 내 판매량이 높음은 물론 CBS 역사상 선주문량 최고 기록을 갱신한 걸 생각하면 마이클의 스릴러 성공 덕을 단단히 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해 7월에는 동명의 투어인 'Victory Tour'가 개최됐다. 그러나 투어 소식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티켓 판매 방식이 너무 상술적이라고 마이클 혼자서 쏟아지는 비난을 다 받았다. 실은 마이클이 티켓 판매 방식에 관여한 게 아니었고 형제들이 한 짓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마이클은 기자회견을 열고 판매 방식을 수정할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얻은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도 기부함으로서 논란은 사그라 들었다. 아무튼 이 투어는 언론에서도 록앤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콘서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고 마이클은 북미 전역을 누비며 성공적인 콘서트를 마쳤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사실 이 시기 마이클은 형제들에게 독립하고 싶어해서 같이 투어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콘서트 내내 형제들과 말도 안 하고 따로 지냈다고 한다.결국 콘서트 마지막 날 형제들과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이클은 잭슨즈의 투어는 이것이 끝이라고 깜짝 선언하였다. 이러한 형제들과의 불화는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마이클의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영부인 낸시 레이건(오른쪽)과 함께, 레이건은 'Victory Tour'가 워싱턴에 개최될 수 있도록 마이클에게 요청했었다. 왜냐면 당대 최고의 폭발적인 스타의 공연은 지역 사회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1985년 자선과 기부에 관심을 많이 가진 마이클은 We Are The World라는 초대형 자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마이클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곡을 만들었고 이 싱글은 1400만장 이상이 팔린다. 'We Are The World'의 작사/작곡은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으로 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노래의 두 소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이클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예상 외로 상당히 빨리 곡이 완성됐다고 한다.
[1] 여담으로, Thriller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200만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이라고 하자 마이클은 "당신들 지금 뭔 말 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열심히 같이 제작한 것이라구요"라며 화를 내고 기분이 불쾌해져서 앨범 발매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코드사 사장인 길 프리슨이 마이클에게 전화하여 겨우 타협을 해서 Thriller 앨범이 발매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