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0:51:41

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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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쇠락 이전2.2. 발견
3. 놀라운 기술력4. 방문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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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마추픽추상상도.jpg
"Few romances can ever surpass that of the granite citadel on top of the beetling precipices of Machu Picchu, the crown of Inca Land."

"잉카 땅의 왕관, 마추픽추의 들쭉날쭉한 벼랑 위에 우뚝 선 화강암 도시의 낭만보다 더한 낭만은 없을 것이다."
하이럼 빙엄[5]
Machu Picchu

Google 스트리트 뷰

페루의 옛 잉카 제국 도시 유적. 험준한 고지대에 있는 신비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다. '마추픽추'라는 말은 케추아어로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으로 해발 약 2,437m[6][7]에 위치한 고산도시다.[8] 산 아래에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볼 수 없다고 해서 잃어버린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파차쿠티투팍 잉카 유판키 황제의 재위기인 1400년대 후반에 지어졌으며, 약 80여 년 동안 사람들이 거주하다가 1530년대 즈음에 완전히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원정 도중에 마추픽추를 황실 휴식처 겸 긴급 대피소 등의 목적으로 지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도시의 기능을 하고 있을 때에는 대략 75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스페인콩키스타도르들이 들어온 1530년대 즈음에 천연두가 확산하고 잉카 제국이 쇠퇴하면서 마추픽추도 함께 쇠락하여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것이다.

워낙 험한 산지에 있어 찾아가는 사람도 없었고 위치조차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잉카 제국 멸망 이후 계속 잊혀진 상태로 있었지만, 1911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고고학자이자 공화당 정치인 하이럼 빙엄 3세(Hiram Bingham III, 1875 ~ 1956)가 원주민 소년 파블리토(? ~ ?)의 증언을 토대로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알려졌다. 옛날에는 산을 깎아만든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지만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로는 셔틀버스가 생겨서 쉽게 다녀올 수 있다.

2. 역사

2.1. 쇠락 이전

파일:temple_on_the_sun.jpg
파일:ce5114365ecbb9424f9701e5879f62e0.jpg
태양의 신전[9] 해시계 인티와타나[10]
마추픽추는 일반적인 개념의 도시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용 별장이나 임시 대피소 비슷한 용도의 도시였다. 약 750여 명 정도의 주민들 모두가 황제의 수발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야나코나', 즉 사용인들이거나 종교제례를 위한 사제들이었다. 실제로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조사해본 결과, 유골들이 마추픽추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고 페루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있는 다양한 종류의 기생충에 걸려있거나 마추픽추 지역에는 서식하지 않는 맹수들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마추픽추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추픽추가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대를 이어 함께 살아가는 정주(定住) 개념의 도시였다면 불가능한 일로, 즉 마추픽추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추운 계절이 찾아오면 마추픽추의 인구는 더더욱 줄었다. 사용인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 계절을 보내고 다시 올라왔고, 그동안에는 사제들을 포함한 최소한의 인력들만이 남아서 도시를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보통 사람들은 인근의 계단식 밭에서 감자, 옥수수 등을 길러 먹었으며, 산 아래의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먹기도 했다. 다만 저 밑에서부터 가져와야 하고 상하기 쉬운 생선류의 음식들은 고급품으로 취급되어 일반 일꾼들은 쉽게 먹는 것이 불가능하여 대부분 감자나 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또한 라마알파카 등의 동물들도 함께 데리고 왔는데, 참고로 이 동물들이 약 해발 4,000m 정도의 높은 고산지대에 자생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해발 2,400m 밖에 되지않는 마추픽추 지역에서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라마와 알파카들을 데려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쨌든 잉카인들은 이 동물들을 길러 도축해 먹었고, 이 것이 생선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마추픽추에서 육류를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외에도 마추픽추의 한 무덤에서 한 명의 인골이 6마리의 들과 함께 발굴되었는데, 아마 애완동물이나 식량으로 삼기 위해 개도 함께 길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추픽추의 농부들은 인위적으로 산을 깎아만든 인공 테라스에서 계단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 계단식 농법은 경사가 심해 조금만 비가 와도 토양이 다 쓸려내려가 버리는 안데스 지방에서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의 농법이었고, 실제로 물을 가둠과 동시에 비옥한 토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 예상외로 생산량이 굉장히 많았다. 테라스를 지을 때에는 가장 아래에 거대한 암석들을 쌓아 토대를 만들었고, 위로 쌓아나갈수록 크기가 작은 돌들을 올렸으며 맨 위에는 모래와 자갈을 얹고 그 위에 산꼭대기에서 가져온 흙들을 덮었다.[11] 다만 잉카인들의 기술력이 완벽하지 못해 계단식 밭들에서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 농작물과 함께 밭마저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일이 잦았고, 산비탈이 아예 무너져내려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시 복구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그 높은 계단식 밭들에 대체 어떻게 물을 공급했을까 하는 것인데, 마추픽추가 위치한 지방의 1500년대 당시 연 강수량은 약 1,800mm 정도였고, 이는 옥수수 등 주 농작물들이 매년 필요로 하는 강우량보다 살짝 더 많은 수준이다. 따라서 마추픽추의 농부들은 굳이 물을 위로 끌어올릴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수로 공급시설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내린 빗물을 밭에서 빼내기 위해 개수로를 만들었다. 이렇게 관리하는 밭들은 꽤나 생산량이 좋았으나, 다만 4.9 헥타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밭의 면적으로는 도저히 750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었고, 때문에 마추픽추는 상당 부분의 식량을 외부에서 수입해왔다.

2.2. 발견

파일:external/www.lovethesepics.com/Bingham-at-Machu-Picchu.jpg
최초 발견 당시 마추픽추의 발견자였던 하이럼 빙엄
마추픽추의 발견자는 미국 예일 대학교의 교수 하이럼 빙엄이였다. 빙엄은 1909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동안 페루의 잉카 제국 유적들을 답사하며 잉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1년에 잉카 제국의 최후의 수도이자 항전지인 빌카밤바[12]를 조사하기 위해 페루 원정팀을 꾸린다.

빙엄은 16세기의 기록에서 빌카밤바가 '샘물이 솟아나오는 거대한 백색암석' 위에 있다는 내용을 보고 이를 토대로 조사를 계속했고, 그러다 한 원주민 농부로부터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루밤바 계곡을 조사하던 중 마추픽추의 계단식 밭에서 토지를 경작하던 두 원주민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빙엄은 그 가족들 중 꼬마 아이의 안내를 따라 올라선 곳에서 마추픽추를 발견하고 이를 학회에 공식으로 보고했다. 당시 마추픽추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일부 치워놓은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식물에 뒤덮여 있었으며, 이때문에 발견 직후 빙엄은 마추픽추의 규모나 자세한 세부 내용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한 유적의 모습은 기록 속의 빌카밤바와 흡사한 부분은 없었고, 결국 빙엄은 자신이 발견한 곳이 빌카밤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빙엄은 우루밤바 계곡을 쭉 훑어내려가면서 그 곳에 있던 모든 유적들을 샅샅이 발굴했고, 결국 인근에서 잉카 제국의 임시 수도인 비트코스, 그리고 잉카 최후의 항전지인 빌카밤바를 발견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빙엄 교수는 1912년에 예일대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그리고 페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마추픽추를 재방문했고, 이번에는 4개월 동안 머무르며 마추픽추 유적들을 모두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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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stockphoto-625007720-612x612.jpg
빙엄은 이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정리하고 일부를 미국의 연구실로 실어보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초기만 해도 빙엄을 호의적으로 바라봐주던 원주민들과 페루의 지주들이 점점 빙엄을 아니꼽게 여기기 시작했고, 페루의 언론에서도 민족주의를 부채질하며 미국인들이 페루의 보물을 훔쳐가고 있다는 논조로 기사를 써내며 여론은 더욱 악화했다. 실제로 빙엄은 당시 페루의 고고학법[13]에 따라 예일대로 합법적, 공개적으로 유물들을 반출하였으나, 페루인들은 자신들의 유물들을 예일대로 가져가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14]

이 시기에 빙엄이 예일대로 가져간 유물이 무려 5만여 점에 달한다. 이후 미국 예일대 측에서는 페루 정부의 계속된 반환 요구를 무시해왔지만, 2007년부터 협상을 시작하여 2011년 발견 100주년을 기념하며 반출한 유물 중 5천 점을 페루 측에 반환하였다.#1#2 결과적으로 페루인들 입장에서 유물이 해외로 반출된 것은 불행이었지만 그나마 도굴꾼이나 군대가 아니라 민간 학자가 유물의 기록을 남기고 온전한 상태로 발굴하여 반출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반환 당시 페루 대통령도 이 사실은 인정했다.

여담으로 최초 발견자가 빙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는 중이다. 실제로 빙엄의 발견 직후에도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페인과 독일 기술자 J. M. 폰 하셀이 자신들이 이미 그 곳을 방문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1874년에 제작된 지도에서 마추픽추로 추정되는 위치가 확인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뮬 데 피즈는 독일의 사업가 아우구스토 베른스가 1860년대 마추픽추 맞은 편에 구입한 광산을 개발하면서 광산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마추픽추를 이용했었으며 빙엄도 이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1887년 페루 정부의 문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3. 놀라운 기술력

잉카인의 기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 산 위부터 산 아래층까지 물이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정교한 수로를 만들었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웅덩이 하나 생기지 않고 전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그 수로는 특별한 손질없이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
  • 태양의 신전의 경우 거대한 자연석을 거의 손대지 않고 지은 건물이다.
  • 철제도구가 전혀 없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도 않는 정교한 석조건축, 조각술이 이용되었다.[15]
  • 산바람을 이용한 자연 냉장고를 개발해서 널리 쓰고 있었다. 고산 지대 특유의 환경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해하고 응용한 것이다. 서양문명보다 앞서서 음식물을 저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서구보다 500년 앞선 기술로[16] 감자를 6년간(!) 썩히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17]
  • 자연석으로 만든 오차가 없는 나침반해시계[18]가 있다.[19]

물론 계급사회답게 물과 물자는 상층의 왕/귀족/사제들의 영역을 먼저 거쳐오며, 이후 하층으로 오면서 서민, 노예 등 계급 순으로 제공된다. 제한된 자원이 계급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분배되는지 잘 보여주는 형태로, 이러한 도시모델은 세기말 막장 도시의 표현에 아주 잘 애용된다.

4. 방문

기본적으로 방법은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 하나뿐이다. 물론 쿠스코에서 옛 잉카의 길을 따라 마추픽추까지 가는 잉카 트레킹 코스도 있다. 몇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한다.[20] 마추픽추 아래 도시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까지 가는 차량편을 모두 폐쇄하였기 때문에 관광객은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 페루레일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 가격은 쿠스코-마추픽추간 약 200km에 USD 330. 물론 호화로운 점심식사와 편안한 1등석, 전망차가 딸려 있기는 하다. 그렇기에 주머니 사정이 두둑하지 않은 여행객들은 중간 기착지인 오얀타이참보[21]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편도 USD 37의 오얀타이탐보-쿠스코 간 객차를 이용한다.[22] 시간이 지나면서 잉카 레일이라는 라이벌 업체가 생겼지지만 어차피 같은 노선을 운행한다. 가격은 쥐꼬리만큼이긴 하지만 잉카 레일 쪽이 더 싸다고. 체력만 있다면 1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마추픽추를 다녀오는 방법도 있다. 마추픽추 트레킹 투어로. 걸어서 마추픽추역까지 걸어가서 10만원 아낀 영상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하면 마추픽추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왕복 24달러(편도 12달러, 2017년 12월 기준)의 버스를 이용해도 되며[23]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마추픽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에 맞춰서 와이나 픽추도 올라가보는 것이 좋은데[24] 걸어서 올라가게 되면 산 자체가 생각보다 가팔라 1시간 반 정도 되는 산행에 지쳐서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올라갈 때는 체력을 비축해 두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입장 시에는 하루 방문객 수인 2,500명 제한을 위하여 여권 검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여권에 기념 스탬프를 찍는 짓은 하지 말자. 여권에 사증(Visas) 즉, 출입국 관련 스탬프 이외의 기념 스탬프를 찍는 행위는 여권 훼손에 해당하며, 출입국 및 항공기 탑승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혹시나 모르고 찍었다면 여권을 재발급 받아야 한다. 외교부 안내문

와이나 픽추의 경우 하루 2번, 1회당 200명의 사람들에게만 입장이 허용된다. 와이나 픽추를 둘러보고 싶은 사람들은 3개월 전에는 미리 마추픽추 공식 사이트에서 예약하는 것이 좋다.

2022년 12월에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후 페루에서 한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여파로 2023년 1월 중순까지 관광객들이 오가는 마추픽추 근처 공항이 여러 차례 습격당하자 페루 정부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마추픽추를 전격 폐쇄한다고 발표했으며 유적지 안에 갇혀 있던 관광객 4백여 명을 공항 근처로 대피시켰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Machu Picchu: 독일 그룹 징기스칸의 대표곡 중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 Machu Picchu: 1981년 2집 앨범 Cusco II에 수록된 쿠스코의 곡. 한국의 삼성 라이온즈의 응원곡의 원곡으로 유명한 Goombay Dance BandEl Dorado(엘도라도)를 재편곡한 것이다. El Dorado를 만든 Wolfgang Jass와 Wolff-Ekkehardt Stein가 이 곡을 만들때 참여해서 그렇다.
  • 개구리 중사 케로로: 2기 2화에서 휴우키와 타마마, 쿠루루, 케로로가 방문했는데 쿠루루는 마주픽추가 외계인이 만든 롤러코스터 발착장이였을 거라고 추측한다.[25] 이후 개구리 중사 케로로 극장판 3기 초반에 케로로 소대와 후유키가 이 곳을 또 다시 방문하여 이번에는 지하로 탐사갔는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탐사[26]한다. 그러다 케로로가 유적 안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고, 그로 인해 다크 케로로가 깨어난다. 사실상 극장판 3기의 시작.
  • 꽃보다 청춘: 페루편에서 유희열, 윤상, 이적이 마지막 여정으로 찾아간 곳. 그들이 20대에 그토록 찾아가고 싶었던 곳에 다다르자, 20년간 함께 음악으로 만난 친구였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회상한다.
  • 문명 5: 불가사의로 등장하며, 주변 2타일내에 산이 있어야 지을 수 있다. 문명 6에서는 산 타일에만 지을 수 있다. 둘다 원주인인 잉카 문명과의 궁합이 좋다.
  • 메탈카드봇 시리즈: 페루루가 살았던 포르카카 마을의 모티브가 쿠스코인 설정과 포르카카 유적지의 설정이 마추픽추의 모티브다.
  • 바이클론즈: 뇌추픽추는 마추픽추에서 유래된 것이다.
  • 비정상회담: 2014년 남미 대표 샘 레바노가 페루인들이 마추픽추를 졸업여행으로 주로 가고 페루의 빈부격차 때문에 평생 못 간 사람들이 많다고 언급했다.
  • 영웅전설4: 이 곳을 모델로 한 것 같은 마을이 등장한다. 하지만 주민 편의를 위해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고 관광지로서 옛 형태로 보존되는 등 묘하게 현대의 유적 관광지.
  • 케이온!에서 나카노 아즈사가 잘 발음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왔다. 일본어로 마추픽추는 マチュ・ピチュ(마추 피추)인데, マツ・ピチュ(마츠 피추), マチュ・ピツ(마추 피츠)등으로 발음했다.
  •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작중 옵티머스 프라이멀이 속한 맥시멀 무리가 숨어지내던 곳으로 근처 부족민들과 함께 지내며 트랜스워프 키를 지키고 있었다.
  • 히든캐치: 그림들 중 하나로 나왔다.

6. 여담

파일:7150123457_f226a92af7_b.jpg
  • 뒤의 산을 90도 돌리면 얼굴처럼 보인다고 한다. 산의 모습이 당시 잉카제국 황제의 얼굴과 닮았다고 하는데, 일부러 황제의 얼굴과 닮아 보이는 산을 골라서 마추픽추를 조성했다는 설도 있다.
  • 이시다 유스케[27]의 여행기 <가보기 전엔 죽지마라>에서는 마추픽추보다는 과테말라에 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지 티칼[28]을 더 높게 평가했다. 마추픽추의 유명세 때문에 들러 봤는데 막상 가 보니 전에 들렀던 티칼보다 웅장함이 부족했다고 한다.
  • 페루인들에게 마추픽추는 수학여행 가는 곳이다.
  • 남아메리카의 유일한 곰인 안경곰이 가끔 이곳에서 발견된다.[29]
  •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 픽추가 케추아어로 봉우리라는 의미지만 픽추라는 단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포켓몬스터피츄, 피카츄라는 캐릭터 때문에 마추픽추 위에 있는 피카츄 형태로 합성한 사진, 그림을 마추피카추(Machu Pikachu)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케추아어와 일본어를 합성한 것이다. 마추픽추의 픽추(Picchu)는 케추아어로 봉우리, 피카츄의 유래가 되는 피카는 일본어로 번쩍, 츄는 일본어로 쥐의 울음소리다.
  • 2020년 3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폐쇄되었으나 때마침 페루에 여행와서 7개월 동안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체류한 일본인 관광객의 1인 관람이 2020년 10월 이루어졌다. #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최상의 자연 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할 것[4] 육상, 민물, 해안 및 해양 생태계와 동·식물 군락의 진화 및 발전에 있어 생태학적, 생물학적 주요 진행 과정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일 것[5]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마추픽추를 다시 발견한 인물. 자세한 설명은 아래 본문에.[6] 백두산이 2,744m다.[7] 뾰족한 산 위에 있어서 대단히 높아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잉카 문명의 유적지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편이다. 쿠스코 부근의 안데스 고산평원이 끝나는 지점부터 우루밤바 계곡이라는 거대한 협곡이 위치해 있는데, 협곡 사이에 위치한 봉우리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쿠스코는 이 마추픽추보다 약 1,000m 더 높은 해발 약 3,300m에 위치한 도시다.[8] 정확히는 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쪽에 위치한 봉우리의 이름이고, 반대편에 있는 봉우리는 '와이나픽추'로 '젊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원주민에게 이 도시의 이름을 물어봤는데 그 원주민이 봉우리의 이름을 물어보는 줄 알고 말해줬다가 그리 되었다는 설이 있다.[9] 주로 직선형의 건물들이 주를 이루던 잉카 제국에서 보기 드물게 곡선형의 벽면을 가진 건물이다.[10]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는 뜻이다.[11] 산꼭대기의 흙들이 더 토질이 좋았다고 한다.[12] 엄밀히 말하면 잉카 제국이 아니라 잉카 황족들이 스페인 군대에게 도망쳐 세운 망명정부인 신잉카국의 수도이다.[13] 1852년 페루법 바티에프스키 100조. 사유지를 제외한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발견자에게 귀속된다.[14] 비슷한 시기 1922년에 발굴된 이집트 유적 투탕카멘의 무덤의 경우 당시 카이로 박물관장인 이븐 하지 라우드가 유물 반출을 결사반대하고 철저하게 감시했기에 유물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15]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기술인데, 청동 끌로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 뒤 모래로 연마해서 다듬었다고 한다. 현대에는 벽돌시멘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가성비(특히 인건비)가 떨어지다보니 안할 뿐, 못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보이는 면만 정교하게 짜맞췄고 안쪽은 진흙으로 채운다.[16] 로마 시대에 바람을 이용한 원시적 에어컨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집을 식히는 정도였지 감히 음식을 저장하는 데 쓸 엄두는 내지도 못했으며, 한술 더 떠서 서유럽인의 대다수는 대항해 시대 100년 전까지 차가우면 음식이 썩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17] 다만 페르시아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야크찰(یخچال)이라는 건물을 지어 음식물 보관에 사용했었다.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여름 내내 넣어놓았다. 석빙고와 마찬가지 원리인 셈.[18] 인티와타나(intiwatana).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는 뜻. 춘분추분일 때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19] 출처[20] 실제 해본 사람의 말로는 난이도는 높은 편이지만 꽤 재미있다고 한다. 다만 페루는 지역마다 이런 안데스 트레킹 코스가 많으니 트레킹이 목적이라면 굳이 이 쪽을 고를 필요는 없다. 고지 트레킹을 즐기려면 와라즈가 더 낫다.[21] 이곳에도 몇가지 잉카 유적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달의 신전.[22] 이름은 페루레일이지만 영국에 본사를 둔 엄연한 사기업이다.[23] 카드 결제 시 수수료가 3%정도 더 붙는다.[24] 와이나 픽추에서는 마추픽추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25] 케로로는 마추픽추가 외계인의 전투 기지일거라고 상상하였지만, 쿠루루의 말을 듣고 화났었다.[26] 원인은 케로로가 각종 함정들을 건드려서 그렇다.[27] 일본의 여행 작가.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하다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은퇴한 후 퇴직금으로 자전거를 사서 세계일주를 한 뒤 여행기를 몇 권 썼다.[28]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반란 연합의 기지 야빈 IV의 쵤영 장소로 유명하다.[29] 안경곰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초식성이 강한 곰이며 비슷한 식성의 판다와 달리 사람을 해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