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시마 사건 松島事件 | ||
시기 | ||
1884년 1월 4일 (메이지 17년 1월 4일) | ||
장소 | ||
일본 제국 오사카부 | ||
원인 | ||
상호간의 위화감에서 비롯된 악감정 | ||
교전 세력 | ||
[[틀:깃발| | ]][[틀:깃발| ]][[일본 제국 육군| ]][[틀:깃발| | ]][[틀:깃발| ]][[일본 제국 경찰| ]]|
전력 | ||
1,400명 | 600명 | |
피해 | ||
2명 사망 40여 명 부상 | 10여 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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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4년에 일본 제국 오사카에서 벌어진 군경간의 난투극.2. 배경: 군경간의 위화감
이들의 위화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메이지 유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계급이 폐족 처분을 받은 후 이에 대한 사족 계급의 반발로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 정부는 검술에 능한 사족 계급을 대대적으로 특채해 발도대라는 이름으로 경찰관으로 임용했으며 역할도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치안보조를 했던 도신 등 무사들의 역할을 계승하게 되었지만 군대는 대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개병제 논리에 따라서 징병제를 실시해 평민 계급 출신을 위주로 징발했다.
이러다보니 두 집단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위화감이 형성되었고 이 사건의 발단으로 작용했다.[1]
이러던 중 1883년 12월 31일 만취한 군인 3명이 주재소에 들어와 당직 순사에게 "말투가 싸가지 없다"[2]며 시비를 거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오사카 진대(大阪鎭臺) 소속 장병들이었는데 몸싸움 끝에 군인들은 순사를 두들겨패고 경찰모를 빼앗아 부대로 복귀했다.
곧이어 새해 첫날인 1884년 1월 1일, 그 다음날인 1월 2일에도 외박을 나온 군인과 경찰관 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두 집단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3. 난투극
1884년 1월 4일 오사카 시내로 휴가를 나와 마츠시마 유곽(집창촌)을 다녀오던 육군 병사가 경찰서 담벼락에 오줌을 싸다가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부대에 전파되자 사단 병력 1,400여명이 붙잡힌 전우를 구출하겠답시고 군도를 빼들고 경찰서로 쳐들어왔는데 이에 맞서 경찰관 600여명도 경찰도로 무장하고 이들을 공격하면서 난투극이 시작되었다.이들을 제지하기 위해 육군 헌병 100여명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싸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오사카 경찰의 총 책임자였던 오사카부청 경찰부[3]장 오우라 가네타케(大浦兼武)[4]에게까지 전파되었고 오우라는 자신이 이 골때리는 사태를 수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4. 해결
사실 사족 출신이었던 오우라는 경시청 발도대로 특채되어 세이난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는데 이때 군부와의 업무 협약에서 지휘계통의 혼선을 막기 위해 일본 육군 중위 계급으로 임시 임관한 적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군 시절 계급장과 군복을 가지고 있었고 중위 시절 입었던 전투복을 입고 말을 타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옛 전우들이었던 군인들과 직장 후배들인 경찰들을 상대로 제발 싸움을 그만 하라고 사정했다.결국 일본 육군은 2명의 사망자와 40여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부대로 복귀했으며 경찰은 중경상 1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5. 사건 이후
일본 육군은 자기들이 먼저 쳐들어왔다가 사상자를 남기고 부대로 퇴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우라 경찰부장이 경찰 편을 들어 부득이하게 후퇴했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했고 경찰은 "군인들이 쳐들어 오길래 부득이하게 반격했다"고 반박했다.사건을 해결한 오우라 경찰부장은 이후 높으신 분들의 신임을 얻어서 경시총감을 거쳐 내무대신까지 오르면서 승승장구했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사건 이후에도 육군과 경찰 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50년 후인 1933년에는 또 오사카를 배경으로 경찰과 군부간의 신경전이 벌어졌고 5.15 사건과 2.26 사건을 겪으면서 경찰관이 쿠데타군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는 일이 빈번했으며 아예 2.26 사건 당시에는 쿠데타군의 주 타격대상에 도쿄 경시청이 포함됐을 정도였다. 물론 이때 경찰 소속으로 파견된 경호 인력들이나 쿠데타에 맞서던 경찰들은 대거 학살 수준으로 사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하루 전날인 궁성사건 당시에도 황궁경찰본부가 반란 세력인 근위대에게 무장해제당하는 등 동네북처럼 다뤄졌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 직후 두 집단 사이에서 경찰의 입김이 세지자[5] 경찰쪽에서는 일본군 패잔병들을 "그렇게 설치고 다니더니 결국 저 꼴이 났다"며 비웃거나 심지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패잔병을 검문한답시고 구타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현대에도 공안경찰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위대의 쿠데타와 돌발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경시청 관계자가 대놓고 5.15 사건과 2.26 사건을 언급하면서 "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라고 할 정도이며 # 2016년에는 시큐리티 폴리스가 2.26 사건 당시 순직한 경찰관들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1, #2
사고를 친 부대는 1888년에 육군 제4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도 투입되었지만 러일전쟁 후에는 상비사단임에도 불구하고 1937년까지 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전혀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동원되어 당시로선 추축국이었던 쁠랙 피분송크람 치하 태국에서 패전을 맞아 해산, 소집해제되었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던 방콕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서 가장 전사자가 적은 부대였던 데다 귀국할 때 혈색이 너무 좋아서 군부의 배급 통제로 영양결핍에 시달리던 본토의 사람들이 놀랐다.
6.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육군은 조슈, 경찰은 사쓰마의 입김이 강한 집단이었다. 두 지역은 뿌리깊은 라이벌 관계로 육군-경찰뿐만 아니라 육군-해군(사쓰마)에도 영향을 끼쳤다.[2] 경찰관이 상술한 것에서 비롯된 특유의 권위의식으로 군인들을 향해 반말한 것으로 보인다.[3] 지금의 오사카부 경찰본부장. 일본 제국 경찰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의 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면서 내무대신의 지시를 받는 중앙경찰과 도도부현을 다스리는 현청에서 근무하면서 현지사의 지시를 받는 지방경찰로 인사체계가 분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오사카부 경찰은 지방경찰로 분류되어 오사카부청의 일개 부서로 존재하고 있었다.[4] 1850~1918, 사쓰마 출신[5]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 전후에는 일본 제국 경찰에게 시달렸던 일본인들이 경찰관을 상대로 보복성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