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0:17:45

안평대군 이용 집터

무계동언덕에서 넘어옴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20호[1] 22호 23호
경희궁 숭정전 안평대군 이용 집터 석파정 별당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
안평대군 이용 집터
三軍府 淸憲堂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7길 28-4
(부암동 319-3, 319-4, 319-5, 319-11, 319-21)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건물지
수량 / 면적 바위 1基, 토지 314㎡
지정연도 1974년 1월 15일
파일:‘무계동’이란_글씨가_새겨진_바위.jpg
<colbgcolor=#94153E> 안평대군 이용 집터[2]
1. 개요2. 역사3. 무계정사기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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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4대 임금 세종의 적3남 안평대군 이용이 머물던 별서 터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로도 불렀다. 입구에 정사를 짓고 후원에 천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 후원이 현재 부암동 321-2번지 무계동언덕 일대로 경치가 뛰어나며, 안평대군은 "일찍이 도원(桃源)에서 노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여기를 오고 보니 꿈속에서 보던 도원과 너무나 비슷했다."고 했다.

2. 역사

파일:Mongyudowondo.jpg
<colbgcolor=#94153E>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도원(桃園)에서 노는 꿈을 꾸었고, 그 꿈 속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비슷한 현실의 장소에 별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1447년(세종 29년)에 안견이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그린 〈몽유도원도〉 역시 제작 이유는 같다. 만약 저 두 일화 속 도원의 꿈이 같은 것이라면, 안평대군이 무계동에 정사와 후원을 조성한 시기는 1447년 즈음인 듯 하다.

현재 몽유도원도 전시관은 폭포, 현진건집터는 연못, 연못 후면이 무계정사, 무계동언덕 일대가 복숭아 천그루를 심었던 후원이다. 후원이 경치가 뛰어나다. 비록 몽유도원도는 일본에 있지만 무계정사와 아름다운 후원 일대는 무계동언덕에 그대로 남아있다.

안평대군은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책 만 권을 들여놓았으며 용산 강변에는 담담정을 지어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1453년(단종 1년)에 안평대군계유정난에 엮여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당했고, 주인 잃은 무계정사는 폐허로 변했다.

무계정사 터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에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져있다. 안평대군의 친필로 알려져있으며 지금도 남아있다.

3. 무계정사기

1451년(문종 1년)에 안평대군의 부탁을 받고 이개가 〈무계정사기(武溪精舍記)〉를 지었다. 이를 통해 글로나마 당시 무계정사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안평대군의 무계수창시와 박팽년 성삼문 서거정의
차운시가 남아있다. 시와 기문에 나타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계동언덕에 그대로 살아있다.
서울의 북문 숙정문을 벗어나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2리 정도 가다가, 잿마루로 올라가 서쪽으로 조금 틀어서 동부(洞府)를 굽어보면,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탁 트여서 사람이 사는 곳인가 할 정도로 다르게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에 비해당 이용[3]의 정사(精舍)가 위치한다.

이 골짜기는 백악산(白岳山) 서북쪽 기슭에 있고, 안쪽은 완만하고 외부는 조밀하여 구역 하나를 은은하게 형성하고 있다. 동서 거리는 2, 300보 정도이고 남북은 그 절반 쯤이다. 그 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러서 돌에 부딪쳐 포말을 형성하고 물소리를 세차게 내면서 아래로 쏟아지다가 계곡 입구에 이르러 높이 매달려 12발 정도 길이의 폭포가 되는데, 소위 '무계(武溪)'라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연못에는 연꽃을 심었고, 채소밭에는 오이를 심었다. 또한 복숭아나무 수백 주와 대나무 수백 떨기가 잘 배열된 채 주변을 에워쌌다. 정사(精舍)가 동네 어귀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을 어귀는 서남쪽에 있으므로, 채연[4]시비[5]가 산을 벤 채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올라가서 한번 돌아보니 풀과 나무는 무성하고 연기와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 올라있어서 그윽한 듯 비어 있는 듯 한 것이 꼭 도원동(桃源洞)의 기이한 운치같았다.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 그 이유를 찾아보려 했더니만, 다래넝쿨이 얽혀있고 바람 소리, 물 소리가 요란하며, 새들은 숲에서 놀라고 다람쥐는 구멍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아득해서 찾을 수 없었다.

드디어 북쪽으로 조그만 능선에 있는 비탈길을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겹겹으로 이어진 높고 낮은 봉우리가 원근을 에워싼 채 인사하는 듯하고 어찌보면 또 합장하는 듯했으며, 또한 규(圭)를 받든 듯도 하고, 구슬이 널브러져 있는 듯도 했다. 여러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들은 큰 냇물에 합류했는데 치닫는 물결과 반석을 두고 몇 리를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다시 정사(精舍)로 돌아와 쉬니, 정신은 맑아지고 뼈까지 상쾌하여 그대로 머물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이에 비해당(안평대군)이 나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내게 술을 따르며 명하기를 "내가 일찍이 도원(桃源)에서 노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여기를 오고 보니 꿈속에서 보던 도원과 너무나 비슷했다. 어쩌면 조물주가 기다렸던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 1000년 동안이나 감춰 두었던 곳을 하루아침에 드러내어 기어이 내게 돌아오게 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초를 캐 먹으면서 주린 배를 채워 숨어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노을을 반찬으로 삼고 형체를 단련하여 신선이 되고픈 것도 아니다. 또한 고상한 뜻으로 세상을 경시하고 신선을 가탁하여 스스로 고고한 척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흥취가 산에 있으면 언덕에 올라 조용히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흥취가 물에 있으면 냇가에 나가서 시를 읊으면서, 사물의 변화에 따라 연락하는 이치를 살펴보고 천도(天道)의 유행을 즐기며, 마음대로 두루 노닐어 내 천성을 온전하게 하기를 구할 따름이다. 그대가 한 마디 하여 나의 뜻을 넓혀 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제 생각에는, 위에 있는 하늘과 아래에 있는 땅은 아득하여 끝이 없고, 지난 과거와 다가올 미래는 길고 길어서 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극히 작고 짧은 순간을 사는 몸을 가지고 그 사이에 붙어살면서, 빈천한 사람은 부귀를 흠모하고 부귀한 자는 사치와 방탕에 빠져 물욕(物慾)의 노예가 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으니, 슬픈 일입니다. 오직 군자(君子)는 능히 물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만물 밖에 초연하니, 부귀에 빠지려고 하겠으며, 사치에 빠져 들려고 하겠습니까. 산이나 숲이든, 질퍽한 땅이든 맑고 아늑하며 고요한 경지에서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여 도(道)를 즐기는 것이 군자의 단아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도란 어디를 가더라도 없는 곳이 없으니, 몸이 도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광대한 천지의 사이에서 운신(運身)하고 유구한 고금을 흘겨보면서 세속 밖에 초연하고 그 천성을 능히 보전하는 것이 군자의 능사이지요. 어찌 신선이나 은사처럼 연기나 노을이 자욱한 산골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비해당(안평대군)이 이 말에 수긍을 하기에, 말한 것을 그대로 적고 기문(記文)으로 삼게 한 다음 재배하고 돌아왔다.
〈무계정사기〉, 이개 作.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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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종로티비》에서 제작한 무계원 영상
* 집 터 인근, 혹은 일부에 전통문화체험공간 무계원이 있다. 2014년에 개원했으며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한다. 이름은 무계정사에서 따왔으며 익선동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오진암을 옮겨 지은 한옥이다. 자세한 내용은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 무계원 항목 참조.


[1] 21호 운현궁은 1977년 11월 22일에 사적 제257호로 승격했다.[2]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의 아호이고, 이용(李瑢)은 안평대군의 성명이다.[4] 采椽. 누추한 집을 의미.[5] 柴扉.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사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