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變法自彊運動, 戊戌变法, Hundred Days Reform1898년 청나라에서 덕종 광서제의 주도하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서 일으킨 근대화(자강) 운동이다. 무술변법(戊戌變法) 또는 100일 유신으로 불리기도 한다.[1]
2. 배경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양무운동의 상징이었던 이홍장이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1897년 독일 제국에 의한 키아우초우 점령사건이 벌어지고, 열강의 청나라 분할이 가속화되면서 중앙에서도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3. 전개
캉유웨이는 1888년부터 조정에 꾸준히 상서를 올렸는데 다섯 번째로 올린 상서가 당시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광서제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내려 변법을 선언하고, 100가지가 넘는 개혁안을 내었다. 개혁안의 주 내용은 제도국 개설,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 제도의 도입, 신문 · 잡지 발행, 인재 등용, 농ㆍ공ㆍ상업 진흥, 우편 사업, 육ㆍ해군의 근대화 등이었다.1898년 7월 19일 광서제는 개혁에 방해가 되는 수구 세력들을 서태후의 재가없이 숙청했는데 이는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과 결집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서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으려 하는 등 개혁을 멈추지 않자, 수구파들은 서태후의 원조 아래 쿠데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한 광서제는 독일식 훈련을 받는 신건육군을 담당하던 위안스카이에게 감시를 맡겼지만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황제와 개혁파들의 움직임을 서태후에게 보고하면서 그들을 배신했다.
결국 9월 21일 쿠데타가 일어나 광서제는 자금성에 연금당하고 캉유웨이 등 개혁파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후 서태후의 섭정령이 내려지면서 변법은 103일만에 대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무술정변이었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훗날 무술 6군자로 불리게 되는 담사동 등 6명의 개혁가는 처형되었다.
4. 결과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청나라 내부에서의 개혁 세력이 상당수 숙청당하거나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이 정변으로 인해 청나라를 타도해야 한다는 혁명파가 대두하게 되었다.5. 갑신정변과의 공통점
변법자강운동은 14년전 조선에서 일어났던 갑신정변과 상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우선 변법자강운동과 갑신정변 모두 젊은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변법자강운동 당시의 캉유웨이는 갓 40대에 진입했으며, 량치차오는 20대 중반이었다. 갑신정변 당시의 김옥균은 30대 초반, 박영효는 20대 초반 이었다. 그리고 당시 군주의 지지[2]를 받았으며 중체서용, 동도서기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근대화 운동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또한 메이지 유신을 표방하며 일본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적극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짧은 기간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개혁에 대해 반격을 주도했던 사람이 당시 군주의 뒤에서 섭정하고 있었던 보수파 여인들[3]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변과 개혁의 실패 이후, 주동자들이 모두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변법자강운동과 갑신정변 둘 다, 실패 과정에 있어서 위안스카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변법자강운동때는 원래 변법파의 손을 들어주다가 배신을 했고, 갑신정변때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