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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the Great | |
문화 중심 | 과학 중심 | |
특유 능력 | |
북극성 (Star of the North) | |
특유 안건 | |
두샤 (Dusha) | |
1. 개요
예카테리나 2세
독일의 공주로 태어난 예카테리나 2세는 서기 1762년에 자신의 남편을 몰아내고 러시아의 차리나(여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근대화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법과 통치 모델을 확립했고, 전쟁과 외교를 통해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적 호기심과 예술을 향한 사랑으로 예술가, 학자, 과학자를 후원하여 러시아 계몽주의와 혁신이 자라날 환경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공주로 태어난 예카테리나 2세는 서기 1762년에 자신의 남편을 몰아내고 러시아의 차리나(여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근대화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법과 통치 모델을 확립했고, 전쟁과 외교를 통해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적 호기심과 예술을 향한 사랑으로 예술가, 학자, 과학자를 후원하여 러시아 계몽주의와 혁신이 자라날 환경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계몽주의적 정책으로 러시아의 국력을 높였고 문화를 후원한 예카테리나 2세로 문명 5에서 지도자로 등장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 러시아 역사는 흥망성쇠의 역사라 할 수 있으며, '흥성'과 '망쇠'의 기간에는 항상 그에 반하는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17세기에 로마노프 가문이 반신화적 영역인 바이킹 류리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류리크 왕조에게서 권력을 찬탈했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혼돈에서 벗어난 때이자 유럽 세계로 진입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로마노프 왕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력 역할을 맡아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슬라브파'는 서양과 구분되는 러시아를 강조했으며, 한편 '유럽파'는 러시아를 서양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초기 로마노프 왕조의 인물들, 특히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확실히 후자였습니다. 이들은 유럽의 공학, 예술, 독일의 귀족제와 프랑스어를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유럽 열강 대부분은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 국가인 절대 군주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이러한 절대 군주제는 극도로 개인화되었고 차르 또는 차리나의 변덕에 따라 정책 대부분이 좌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체제하의 정책은 기이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진보 성향으로 특히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극찬받았지만, 그의 통치는 극도의 전제정치에 대한 헌신과 개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카테리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682년부터 1725년까지 통치하고 러시아를 재편한 표트르 대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러시아의 국경을 확장했고, 과거 핀어족을 사용하는 국경 지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러시아는 채광(철)과 목재 강국이 되었고, 마침내 발트해 연안에 해군항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다른 유럽 열강과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으며 궁중에 서구 복식과 프랑스어를 정착시켰습니다.
군사적으로 표트르 대제의 치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오스만에게서 거둔 승리, 발트해를 장악하기 위한 대규모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는 유럽에 관심이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서구화를 추진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계몽된 독재자이자 산업과 과학의 신봉자로 묘사되지만, 본국에서의 방탕한 생활이 이러한 야망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는 심야에 술잔치를 벌이고, 본인이 덜 좋아하는 신하들을 놀리는 잔인한 파티를 열고는 했습니다.
표트르 대제 덕분에 러시아는 발트해 및 흑해에 대한 권리와 강대한 해군을 보유한 강대국으로 갑자기 세계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이 국가는 동방 정교 때문에 다소 거리감은 있었지만, 유럽 왕조 정치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예카테리나가 등장합니다.
표트르 대제의 결혼 동맹 캠페인은 러시아의 흔한 관행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의 공주 안할트체르프스트의 조피를 아내로 선택했다고도, 그녀의 남편으로 선택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방 정교로 개종하면서 조피 공주는 차리나 예카테리나가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표트르 3세는 평생 동안 사춘기를 보내는 것 같은 인물이었고, 통치는 물론 아이를 낳는 일도 외면한 채 장난감 병사와 놀고 궁중에서 술이나 퍼마시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1762년 표트르 3세는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계속 잘못된 선택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그는 국제 전략도 부족했습니다. 1년 전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었지만, 표트르는 프로이센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2세를 존경하여 극도의 유화책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또한, 표트르 3세는 강력한 동맹국들을 소외시켰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한 공국에 대한 영유권을 상속받았으며 러시아와 덴마크가 오랜 동맹을 이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요컨대, 표트르 3세는 러시아에 재앙 같은 존재였습니다. 경쟁 귀족들, 군대, 외국 세력 등 여러 사람이 그를 폐위시킬 수 있었지만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조직한 사람은 예카테리나였습니다. 표트르 3세는 1762년에 폐위되었고, 예카테리나가 직접 왕위에 올랐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나 민중의 권리를 추구하지 않는 절대 통치자이자, 예술과 철학을 결합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계몽 군주'였습니다. 그녀의 내부 통치는 기묘한 일련의 성적 정치였습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연인을 고위직에 임명하여 러시아의 성격 기반 정치적 사다리를 고수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포템킨입니다. 비록 차리나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만든 가짜 마을인 '포템킨 마을'이라는 건 신화에 불과하지만, 포템킨은 러시아의 외곽 지방을 통치하며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많은 개혁을 수행한 유능한 보좌관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의 불륜 관계가 끝나자 포템킨은, 자신의 후계자가 예카테리나의 침실에 가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봤을 때, 예카테리나의 통치는 중국 교역품과 유럽의 예술적 감성을 러시아에 들여온 러시아 계몽주의 통치였습니다. 실제로 거대한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전시품들 대부분은 그녀의 개인 소장품들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처럼 그녀는 프랑스 풍자 작가인 볼테르와는 은밀한 얘기까지 털어놓던 친구였습니다. 예카테리나는 국내에서도 여성의 고등 교육을 육성하고 기타 교육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국외 면을 보자면 예카테리나는 폴란드와 오스만의 영토를 조금씩 무너뜨리며 러시아의 국경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러시아의 역할을 방대한 제국보다는 중재자라고 보았습니다. 예카테리나의 예리한 본능은 미국 혁명 중에 나타났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혁명을 세계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와 위협으로 보지 않고, 조지 3세의 실패이자 러시아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분쟁을 이용하여 무역을 유지하고 봉쇄를 끝내고자 로비 활동을 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제정 러시아의 전성기를 이끈 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유능한 외교 정책, 계몽적인 문화적 접근 방식, 지역 지도자와 저명 인사에 대한 건전한 관심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계몽된 전제정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