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2 15:47:05

미야모토 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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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001C> 제3대 일본공산당 서기장[1]
초대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장[2]
미야모토 켄지
宮本 顕治 | Kenji Miyamoto
파일:Kenji-Miyamoto-1962.pn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908년 10월 17일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 2007년 7월 18일 (향년 98세)
일본 도쿄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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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도쿠야마중학교(졸업)
마쓰야마고등학교(문과 / 졸업)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경제학과 / 학사)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참의원)[3]
의원 대수 11-12, 13-14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여담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공산당의 제3대 서기장,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4]

2. 생애

1908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에서 소학교, (구제)도쿠야마중학교(現 도쿠야마고등학교)를 마치고 (구제)마쓰야마고등학교(現 에히메대학 문리학부#)를 졸업한 후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로 진학해 1931년 3월에 경제학사를 받았다.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 유명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패배의 문학"이라는 논문이 당대 유명 잡지인 "개조"의 현상논문 분야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31년 5월에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 참여를 시작한다. 정당 활동과 동시에 문학 평론도 병행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도 가입했다. 1932년에는 9살 연상의 소설가인 유리코와 결혼했다. 하지만 1933년 12월, "붉은색 린치 사건"에 연루되며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공산당원들이 두 명의 일반인을 경찰의 프락치로 오인, 감금 뒤 프락치임을 시인하라고 협박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일본공산당 재정부장 오바타 타츠오가 폭행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인데, 이는 가혹행위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다. 이후 본인의 질병 등으로 인해 재판이 계속 연기되면서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미결수로 있었는데, 결국 11년 뒤인 1944년 12월 도쿄지방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5월에서는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아바시리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미야모토 겐지는 일본제국 패망 후 1945년 10월 4일 GHQ가 '정치적, 시민적, 종교적 자유의 제한 철폐에 관한 각서'를 발표하고 익일 법무성에 정치범 석방을 명령함에 따라 1945년 10월 9일 약 12년의 수감생활 끝이 석방되었다. 10월 17일에는 쇼와 25년 칙령 제580호에 의해 종신형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며, 1947년 5월 15일 GHQ에 의해 복권을 요구받은 법무성이 5월 29일자로 미야모토 겐지를 복권시켰다.[5]

석방 이후에는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는데, 당시 일본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 및 의장 노사카 산조 등 주류 "소감파"의 무장투쟁론의 대척점에 서서 비주류인 "국제파"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래서 도쿠다의 견제를 받아 중앙에서 배제되고 규슈로 좌천되었다. 이 시기 미야모토 겐지는 문학평론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55년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에서 국제파가 당권을 잡고 무장투쟁 노선의 폐기를 선언하며 평화혁명론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비로소 당 중앙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상임간부회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주도권을 쥔 미야모토는 분열된 당의 봉합을 위해 반대파인 노사카 산조에게 제1서기 직함을 주면서 파벌 투쟁의 종식을 주창했다. 1958년 제7회 당대회, 이른바 당 재건대회에서 서기장에 등극하며 당수가 되었다.

1961년 제8차 당대회에 가서야 1950년부터 1955년까지의 분열과 혼란을 "50년문제" 혹은 "50년분열"이라고 부르며, 그 시기 '군사노선'은 소련, 중국에 의한 간섭과 "도쿠다 규이치, 노사카 산조 분파"의 "정치적 쿠데타"에 의해 감행된 극좌 모험주의라고 규정하고 비판했다. 이로써 일본공산당은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자주독립 노선을 정립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개혁 소장파인 후와 테츠조를 위원장에 앉히고 실무책임을 맡겼다. 이로써 미야모토는 일본공산당의 내부 항쟁과 금전적 부패를 일소하고 깨끗한 당 이미지를 만들었다.

1966년 중국을 방문한 후 문화대혁명을 '비정상적'이라 표현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한 노골적 비판도 주목을 받았다. 1968년 방북해 김일성과 회담했으나 대놓고 북한을 비판했고, 미야모토 등이 묵던 호텔방에 잠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던 조선인민군 장병이 일본공산당 대표단원에게 발각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공산당은 다시는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다.

미야모토 겐지는 분열된 일본공산당을 통합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의 자주 노선을, 국내적으로는 의회주의 노선을 확립함으로써 대중정당으로서 공산당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70년 당 위원장에 취임한 미야모토는 의회주의 노선을 취해 당세를 지속 성장시킨 일본공산당이 1972년 제33회 중의원 선거에서 38명의 중의원 당선자를 배출해 원내 제3당이자 제2야당으로 약진했다.

1973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당선자 수가 일본사회당을 상회했고, 1975년 지방선거에서 쿠로다 료이치를 재선시켰다. 1974년 마츠모토 세이초의 중개로 공명당의 모체인 창가학회 이케다 다이사쿠와 상호불가침, 공존을 약속한 협정(創共協定 또는 共創協定)을 체결했다. 그러나 1980년 야마사키 마사토모가 미야모토의 자택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공명당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미야모토는 1977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재선하여 1989년까지 재임했다.

일본공산당은 1979년 제35회 중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고인 39석을 얻어 하야시 하쿠로(林百郎)가 중의원 징벌위원장에 선출되면서 공산당 의원으로 최초의 의회 상임위원장이 탄생했다. 그러나 1980년 공명당일본사회당이 일본공산당을 배제하고 연합하면서(社公合意) 사회당과 연정해 민주연합정부를 구성한다는 구상은 실현불가능해졌고, 이에 '비핵정부'를 표방하며 당시 소련공산당의 대외 노선에 호응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9년 설날 "아카하타(赤旗)"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론을 사실상 폐기하고 2단계 혁명론을 취해 "자본주의 바탕에서 민주적 개혁"을 강조하였다. 1991년 8월 31일자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소련의 8월 쿠데타 이후 발표된 소련공산당의 해산을 쌍수 들고 환영한다"고 하였으나, 소련 붕괴의 여파로 일본공산당도 당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선거 결과 성립한 호소카와 내각에서 추진한 '정치개혁4법'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소선거구제가 도입되어 공산당의 입장이 매우 어려워졌다. 1990년대 후반에는 일본사회당의 몰락으로 이반된 지지층을 흡수해 일시적으로 당세를 회복하여 1996년 제41회 중의원 선거에서 26석,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15석을 획득함으로써 예산을 수반한 법안제출권을 최초로 획득했다.[6]

1994년 제20차 당대회에는 병으로 불참했으나 중앙위원회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고, 이어 개최된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장, 상임위원회 위원,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며 직위를 모두 유지했다. 1997년 제21회 당대회에 불참하고 당 의장 직위를 후와 테츠조에게 넘기고 명예 의장으로 물러났다. 이후 타마시의 자택에서 요양하다 2007년 7월 18일 향년 98세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지역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77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4,260,050 (8.4%) 당선(39번) 초선
1983 제1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4,163,877 (8.9%) 당선(6번) 재선

4. 여담

  • 첫번째 아내는, 9살 연상인 유명 소설가 미야모토 유리코(1899-1951)다. 평론가 답게, 아내의 사후에 아내의 작품에 대한 평론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문학 평론가이자 첫 아내의 비서로도 근무했던 오모리 스에코(1920-2010)와 재혼했다.


[1] 1958년 - 1970년[2] 1970년 - 1982년[3] 재선, 1977-1989[4] 공식 직함은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장이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면 너무 길어서, 내외에서 흔히 위원장이라고 약칭한다.[5] 이때 사면복권은 패망 이전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던 정치인들이 대상이었는데, 미야모토 겐지의 유죄 판결을 받은 죄목 중에는 치안유지법 위반도 있었으나, 동시에 감금치사죄등도 포함되어 있기에 모든 범죄에 대해 사면하는게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물론 공산당 측은 치안유지법을 포함한 모든 죄목이 당시 공산당에 대한 억지 수사 및 판결에 의한 결과이며, 미야모토는 관련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76년 민사당 위원장인 카스가 잇코가 미야모토의 살해 의혹을 다시 추궁하며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1988년 예산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하마다 고이치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해당 사건이 화제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6] 그러나 이후 소선거구제로 인한 양당제가 정착되고 의원정수 또한 줄어듦에 따라 의석 수가 지속 감소했고 당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의 발행 부수도 전성기의 절반 가량으로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