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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켈 아르테타의 선수 시절 활약상을 서술한 문서.2. 클럽 경력
출생지는 스페인 바스크지역의 산 세바스티안으로, 원래는 바스크 지역클럽인 안티구오코에서 14세때 축구를 시작했으나 동갑내기에 같이 선수생활을 시작한 샤비 알론소와 함께 유스시절부터 유망주로 인정받아 1997년 바르셀로나 유스로 이적했다.하지만 바르셀로나 유스는 쟁쟁한 유망주들이 10대 초반부터 경쟁하던 엄청난 수준의 유스시스템으로 아르테타는 라이벌들이 성장할 동안 바르셀로나 스쿼드에 낄 여력이 없었는데, 의외로 그가 선택한 것은 고향팀이자 원래 목표였던 레알 소시에다드가 아닌 해외 무대 진출이었다.
2.1. 파리 생제르맹 FC, 레인저스 FC
2000년부터 PSG에 임대생활을 하면서 스페인 바깥의 축구를 경험한 아르테타는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 FC로 이적한다. 스코틀랜드에서 리그, FA컵, 리그컵을 석권하는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성공을 바탕으로 레알 소시에다드에 돌아왔지만, 먼저 고향으로 돌아온 사비 알론소가 주전으로 맹활약하다가 리버풀로 떠난 자리를 메꾸는데 실패하면서 팀에서 신뢰를 잃었고, 그가 택한 행선지는 절친이자 라이벌인 사비 알론소가 간 팀의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2.2. 에버튼 FC
2005~2011
207경기 34골 37도움
207경기 34골 37도움
아르테타는 2005년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에버튼에 임대로 합류했다. 감독인 데이비드 모예스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었다.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에버튼의 핵심 미드필더, 토마스 그라베센을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임대 조항에는 완전 이적 가능 조항이 있었다. 이후 아르테타는 에버튼이 리그 4위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소화하였으나, 팀은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에서 리켈메가 버티고 있던 비야레알에게 패하며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에는 실패한다. (에버튼을 무찌른 비야레알은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킨다) 이듬해인 2005년 7월, 2m의 이적료로 에버튼에 완전 이적한다. 계약 기간은 5년.
2004/05 시즌: 13경기(선발 11경기) 1골 3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12 | 10 | 2 | 1 | 3 |
FA컵 | 1 | 1 | 0 | 0 | 0 |
합계 | 13 | 11 | 2 | 1 | 3 |
05/06시즌, 아르테타는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와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에 모두 오르는 등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2005/06 시즌: 37경기(선발 35경기) 3골 7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9 | 27 | 2 | 1 | 7 |
유로파 리그 | 1 | 1 | 0 | 0 | 0 |
FA컵 | 4 | 4 | 0 | 1 | 0 |
EFL컵 | 1 | 1 | 0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1 | 0 |
합계 | 37 | 35 | 2 | 3 | 7 |
06/07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매 경기 선발 자리를 꿰차는 등 모예스의 고정픽이었고 그 기량만큼 팬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국내에서는 이 당시 미켈 아르테타의 테크닉과 팀 케이힐의 가공할만한 공격력, 리더십에 매료되어 에버튼 팬이 된 이들이 적지 않다. 그해 아르테타는 35경기 출장, 9골이라는 훌륭한 기록과 함께 다시 한 번 '에버튼 올해의 선수' 상을 수상했으며, '스카이 스포츠 선정 올해의 미드필더 상'도 차지했다.
이어지는 시즌, 아르테타는 특유의 창의적인 플레이로 에버튼 공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소화했다. 주로 측면에 위치해 윙어처럼 활약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아르테타는 측면에 위치한 중앙 미드필더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빠른 돌파보다는 측면에서 템포 조절, 킬패스, 날카로운 크로스 등으로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 에버튼은 아르테타를 측면에 기용하고도 클래식한 윙 플레이를 해줄 수 없는 선수가 없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는 훗날 도노번을 두 차례 임대 영입하고, 미랄라스를 사는 이유가 된다.
한편, 아르테타의 활약에 힘입어 에버튼은 안정적으로 UEFA 컵 진출에 성공한다.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정작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당시 스페인 미드필더의 면면을 살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후 2007년 여름, 아르테타는 에버튼과 다시 한 번 5년짜리 장기 재계약을 맺는다.
2006/07 시즌: 39경기(선발 35경기) 9골 10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5 | 35 | 0 | 9 | 9 |
FA컵 | 1 | 1 | 0 | 0 | 1 |
EFL컵 | 3 | 2 | 1 | 0 | 0 |
합계 | 39 | 38 | 1 | 9 | 10 |
2007/08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아르테타는 '북서부 지역 선수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 번 주가를 높인다. 또한 2008년 1월에는 지역 신문사 <리버풀 에코>가 주관하는 올해의 선수상도 획득한다. 에버튼 선수로서는 5년만의 수상이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아르테타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 후반기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게 된다. 커리어 통틀어 부상이 잦은 편은 아니지만, 중요한 시기 때마다 부상을 얻은 탓에 스페인 대표팀 후보에 번번히 낙마한다.
2007/08 시즌: 37경기(선발 35경기) 4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8 | 27 | 1 | 1 | 5 |
유로파 리그 | 7 | 6 | 1 | 3 | 0 |
EFL컵 | 2 | 2 | 0 | 0 | 0 |
합계 | 37 | 35 | 2 | 4 | 5 |
또한 2008/2009 시즌 후반기와 2009/10 시즌 전반기 대부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부상 복귀 이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히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소화했다. 에버튼에서의 커리어 대부분을 측면 미드필더로 출장했던 아르테타지만, 중앙으로 보직 변경 후에는 양 측면의 오스만, 피에나르에게 창의적으로 볼을 배급하며 팀을 진두 지휘했다. (에버튼 시절 아르테타 하면 펠라이니와 중미 조합을 자주 봤을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정작 펠라이니는 세컨탑으로 기용되는 일이 많았고, 아르테타도 부상을 자주 얻는 바람에 아르테타-펠라이니 중미 조합은 성사된 적이 별로 없다.)
2008/09 시즌: 31경기(선발 31경기) 6골 6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6 | 26 | 0 | 5 | 6 |
유로파 리그 | 2 | 2 | 0 | 0 | 0 |
FA컵 | 3 | 3 | 0 | 1 | 0 |
합계 | 31 | 31 | 0 | 6 | 6 |
2009/10 시즌: 16경기(선발 13경기) 6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13 | 11 | 2 | 6 | 1 |
유로파 리그 | 2 | 2 | 0 | 0 | 0 |
FA컵 | 1 | 0 | 1 | 0 | 0 |
합계 | 16 | 13 | 3 | 6 | 1 |
이후 2010/11 시즌에도 아르테타는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소화했다. 아르테타가 폼이 떨어지면 팀도 폼이 떨어졌고, 아르테타가 살아나면 팀도 살아날 정도였다. 이때 아르테타는 중앙과 측면 미드필드를 누비며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2010/11 시즌: 33경기(선발 32경기) 3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9 | 29 | 0 | 3 | 5 |
FA컵 | 3 | 3 | 0 | 0 | 0 |
EFL컵 | 1 | 0 | 1 | 0 | 0 |
합계 | 33 | 32 | 1 | 3 | 5 |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아르테타는 7시즌 동안의 에버튼 생활을 정리하고 아스날 FC로 합류한다. 아르테타의 아스날 이적은 이적시장 막바지 다소 급작스럽게 이뤄졌는데, 이유는 아스날의 늦은 이적 제의와 아르테타의 고민 때문이었다. 사실 에버튼 팬들도 다른 팀과 마찬가지로 선수의 늦은 이적에 다소 예민한 편인데, 팀의 중심 수비수였던 레스콧이 리그 개막 후 태업으로 일관하다가 이적시장 마감 직전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해 팀의 계획에 막대한 지장을 준 전례 때문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에버튼 팬들은 아르테타의 늦은 이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 아르테타가 그간 보여준 헌신적인 플레이와 이적하며 남긴 이 말 때문이다.
에버튼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덧 나도 29살이 되었다. 이제 이런 기회가 올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르테타의 그 기회는 에버튼이 그동안 해내지 못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테타는 리버풀 에코와의 인터뷰를 통해 에버튼 드레싱 룸의 분위기는 정말 대단하다며 에버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2011/12 시즌(에버튼): 3경기(선발 2경기) 2골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 | 1 | 1 | 1 | 0 |
EFL컵 | 1 | 1 | 0 | 1 | 0 |
합계 | 3 | 2 | 1 | 2 | 0 |
2.3. 아스날 FC
2011년 8월 31일 아스날 FC로 이적을 선택했다. 워낙 급하게 진행된 이적이라 메디컬 테스트를 생략할정도로 급하게 진행되었다.[1]2.3.1. 2011-12 시즌
이적 첫 해에 다들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대체자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역할은 아니었다. 팀에 창조성을 불어넣는 패스보다는, 중미에서 수미를 오가며 포백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중원 운영에 힘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실제로 파브레가스와 평균 스텟을 비교해보면, 드리블 돌파 시도나 킬패스, 롱패스 시도는 굉장히 적은 반면 짧은 패스, 볼 탈취, 패스 성공률 등은 더 좋다. 그 배경은 단순한데, 수비형 미드필더 역인 알렉스 송이 마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도 된 것처럼 전진해서 공격을 해대기 시작해, 누군가 대신 그 빈공간을 메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것처럼 아르테타에게 그 역할이 돌아간 것이다. 한편 데드볼이나 중거리 상황에서는 공격적인 부분에서도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일례가 맨체스터 시티 전에서 넣은 중거리슛 결승골이다.
폼이 절정에 올라와 있을 때 위건과의 홈경기에서 전반에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시즌아웃 되었다. 아르테타가 빠지게 된 그 경기에서 아스날은 패배했고, 아르테타가 빠진 이후 3연속 무승부로 3위 확정이 미루어지다가 최종전에서 가까스로 WBA에 승리해 겨우 3위를 확정지었다.
2011/12 시즌(아스날): 38경기(선발 38경기) 6골 2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9 | 29 | 0 | 6 | 2 |
챔피언스 리그 | 6 | 6 | 0 | 0 | 0 |
FA컵 | 3 | 3 | 0 | 0 | 0 |
합계 | 38 | 38 | 0 | 6 | 2 |
2.3.2. 2012-13 시즌
부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송이 바르셀로나로 떠난 중원에 추가영입이 없자 많은 이들이 아스날의 허리에 균열이 생길 것이라 예측했으나, 유소년 때부터 전문 수미였나 하고 착각에 빠질 정도로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펼치는 아르테타의 활약이 대단하다.[2] 아르테타가 선발로 나선 3경기가 무실점이다. 팀을 떠난 송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며[3] 팀에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거듭나는 중이다.아스날에서 리그 정상급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잡으며 잉글랜드에서는 아르테타를 공격형 미드필더나 윙으로 썼던게 잘못 썼던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마저 나왔었다.
이 시즌 아르테타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는데, 그 예가 한 신문에서 쓴 캐릭에 대한 극찬을 담은 기사가 직접적인 예이다. 이 시즌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캐릭을 극찬하기 위해서 통계치를 올려서 비교를 했는데, 정작 대부분의 수치에서 아르테타가 캐릭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즌의 아르테타의 비중은 정말 컸는데, 팀이 패배를 한 대부분의 경기를 보면 아르테타가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2012/13 시즌: 43경기(선발 43경기) 6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4 | 34 | 0 | 6 | 3 |
챔피언스 리그 | 7 | 7 | 1 | 0 | 1 |
FA컵 | 2 | 2 | 0 | 0 | 1 |
합계 | 43 | 43 | 0 | 6 | 5 |
2.3.3. 2013-14 시즌
노쇠화가 와서 이전 시즌만 못한 모습을 보여줘서 팬들이 안타까워하는중. 대부분의 팬들이 원톱공격수와 아르테타 자리를 보강하길 원한다.그래도 여전히 클래스를 보여주기는 하였다. 리버풀과의 리그 1차전이 극명한 예시. 미드라인 자체를 장악해버렸다. 그리고 지금 와서 뒤돌아 보면, 공격적으로 변한 램지를 커버하는데 있어서 아르테타가 해야 될 몫이 너무 커진 것이 더 큰 원인이라 볼 수도 있다.
헐 시티 원정경기에서 상대팀 선수와 경합하다가 앞니가 빠졌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FA컵 결승전에서 120분 내내 주장으로서 투혼을 발휘하며 아스날 이후 첫 우승을 했다. 2002-2003 시즌 레인저스 시절 3관왕 이후 첫 우승이라 개인적으로도 감격적이었을 듯 하다.
이후 베르마엘렌이 바르셀로나로 떠나자 주장 완장을 이어받게 되었다.
2013/14 시즌: 43경기(선발 38경기) 3골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1 | 27 | 4 | 2 | 0 |
챔피언스 리그 | 6 | 5 | 1 | 0 | 0 |
FA컵 | 5 | 5 | 0 | 1 | 0 |
EFL컵 | 1 | 1 | 0 | 0 | 0 |
합계 | 43 | 38 | 5 | 3 | 0 |
2.3.4. 2014-15 시즌
시즌을 앞두고 팀 동료들이 월드컵에 나가는 동안 열심히 몸을 불렸다. 정작 시즌 중에는 계속되는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다. 전반기에 7경기 출장에 그쳤다.. 1월 중순 왼쪽 발목 글곡 제거 수술을 받아 3개월간 아웃이 확정되었다. 사실상 시즌 아웃이다. 프랑시스 코클랭 임대 복귀가 신의 한수가 되고 있다.아스날 이적 후 라커룸 리더 역할을 맡고있으며 특히 어린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고 신경을 써서 선수들 사이에서 별명이 엄마라고 한다. 벤치나 라커룸에서 기여한 것 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모든 값어치를 다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특히 로빈 반 페르시의 이적, 맨유전 가르마 관광(아스날 FC2011-2012시즌 참조)[4] 등등 아스날이 휘청일 수 있는 순간들에도 아르테타의 리더로서 존재감은 빛났다고 한다.
특히, 이 시즌 아르테타가 아쉬웠던 점은 아르테타가 스스로 13/14 시즌의 문제점을 깨닫고 몸 만들기에 열중한 시즌이라는데 더욱 더 아쉬움이 있다. 실제로, 안데를레흐트 & 토트넘전은 아르테타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경기였다. 아르테타가 존재할시에 중원을 장악하던 팀이 아르테타가 나가자마자 속절없이 무너지는게 구너 & 벵거의 속을 들끓던 대표적인 경기였다.
2014/15 시즌: 12경기(선발 11경기) 1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7 | 6 | 1 | 0 | 1 |
챔피언스 리그 | 3 | 3 | 0 | 1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0 | 0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1 | 1 | 0 | 0 | 0 |
합계 | 12 | 11 | 1 | 1 | 1 |
2.3.5. 2015-16 시즌
출전이 거의 없으나, 대신 선수단 사이에서 상당한 통솔력과 리더십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벵거 감독이 아르테타에게 지도자 코스를 밟을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고 한다.
맨시티의 과르디올라 감독이 아르테타가 만약 이번 시즌 은퇴하면 1군 코치로서 제안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정황상 맨시티행이 유력해 보였으나 벵거 감독이 아르테타에게 U-16팀 코치를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5] 아스날 잔류가 유력한 상황이다.
2016년 선수로서는 토마스 로시츠키, 마티유 플라미니와 함께 팀을 떠나게 되었다. 코치직을 맡을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골을 넣은 직후. 아쉽게도 이 골은 상대 골키퍼의 자책골로 기록되었다.
2016년 5월 15일 리그 마지막 38R에 교체 출장한다. 비록 92분 골이 상대팀 골키퍼의 자책골로 기록됐지만,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흘리며 아스날 선수로서 마지막 일정을 마쳤다. 이후 인터뷰에서 축구 선수를 그만둘 확률이 99% 확실하다는 인터뷰를 한 것으로 보아 아스날을 떠나게 되어 눈물을 흘린 것 보다는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길고도 긴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아래는 구너에게 보내는 이별편지의 번역문. 아르테타의 아스날과 축구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한 번쯤 읽어볼 것을 권한다.[6]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내게도 꽤나 감동적이었다. 아스날 선수로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계획은 내가 무엇을 할지 우선 결정하는 것이다. 몇 가지 선택지가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아직은 드러내지 않을 예정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건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준비를 해왔다.
나는 항상 이 클럽을 동경했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것이 꿈이었다. 나의 아스날 데뷔는 특별한 것이었다. 나는 이 클럽의 일원이 되어 매우 행복했으며 클럽의 일원으로서 특권을 누렸다. 웸블리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아스날은 내가 어렸을 때 잉글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클럽이었다.
아스날의 주장이 되고 우리가 겪었던 멋진 순간들을 공유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었다.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모든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보여준 도움과 헌신을 모두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나는 누가 나를 따라 주장이 되든 이 클럽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를 오랫동안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팀의 젊은 선수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참여하고, 무언가를 조직하고,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클럽의 미래다. 즉, 그것은 그들 손에 달렸고 그들은 그것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가장 높은 수준의 스포츠에서, 나이는 당신이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세대를 거듭하여 전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해진 기준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항상 벵거 감독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는 힘든 순간들과 정말 좋은 순간들을 겪었지만 내가 그에게서 가장 많이 받을 것은 그가 클럽을 관리해온 방식, 즉 그가 자신의 헌신, 자아, 그리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앞에서 클럽의 원칙, 야망, 제한을 우선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클럽에 대한 자신의 생각으로 이끌었다. 축구계에서 그와 같이 충실한 사람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
마지막으로,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여러분들이 나를 지지해 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엄청난 영광이었고, 특권이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약속밖에 할 수 없다. 나는 가장 전문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만족한다. 이번 시즌에 우리의 야망은 프리미어리그 우승이었는데, 이 클럽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실망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트로피를 팬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FA컵 2회 연속 우승은 특별했지만 나에게는 이런 클럽으로는 부족하다. 야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라건대 신세대들이 우리보다 더 나아져서 이곳에서 환상적인 리더와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Forever Captain[7]나는 항상 이 클럽을 동경했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것이 꿈이었다. 나의 아스날 데뷔는 특별한 것이었다. 나는 이 클럽의 일원이 되어 매우 행복했으며 클럽의 일원으로서 특권을 누렸다. 웸블리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아스날은 내가 어렸을 때 잉글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클럽이었다.
아스날의 주장이 되고 우리가 겪었던 멋진 순간들을 공유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었다.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모든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보여준 도움과 헌신을 모두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나는 누가 나를 따라 주장이 되든 이 클럽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를 오랫동안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팀의 젊은 선수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참여하고, 무언가를 조직하고,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클럽의 미래다. 즉, 그것은 그들 손에 달렸고 그들은 그것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때때로 가장 높은 수준의 스포츠에서, 나이는 당신이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세대를 거듭하여 전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해진 기준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항상 벵거 감독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는 힘든 순간들과 정말 좋은 순간들을 겪었지만 내가 그에게서 가장 많이 받을 것은 그가 클럽을 관리해온 방식, 즉 그가 자신의 헌신, 자아, 그리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앞에서 클럽의 원칙, 야망, 제한을 우선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클럽에 대한 자신의 생각으로 이끌었다. 축구계에서 그와 같이 충실한 사람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
마지막으로,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여러분들이 나를 지지해 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엄청난 영광이었고, 특권이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약속밖에 할 수 없다. 나는 가장 전문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만족한다. 이번 시즌에 우리의 야망은 프리미어리그 우승이었는데, 이 클럽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실망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트로피를 팬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FA컵 2회 연속 우승은 특별했지만 나에게는 이런 클럽으로는 부족하다. 야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라건대 신세대들이 우리보다 더 나아져서 이곳에서 환상적인 리더와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2015/16 시즌: 14경기(선발 2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9 | 0 | 9 | 0 | 0 |
챔피언스 리그 | 1 | 1 | 0 | 0 | 0 |
FA컵 | 2 | 0 | 2 | 0 | 0 |
EFL컵 | 1 | 1 | 0 | 0 | 0 |
커뮤니티 실드 | 1 | 0 | 1 | 0 | 0 |
합계 | 14 | 2 | 12 | 0 | 0 |
3. 국가대표 경력
스페인 16세 이하~21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서는 꾸준히 활약했으나 성인 국가대표팀에서는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비 알론소, 다비드 실바, 마르코스 세나, 산티 카솔라 등의 초호화 미드진에 밀려 단 한 번도 소집되지 못했다. 물론 바르샤의 전성기와 스페인의 전성기가 겹치면서 레알과 발렌시아 등 일부 클럽을 제외한 다른 팀의 미드필더가 자주 뽑히지 못한 것은 참작할 수 있지만 데 라 레드처럼 라리가 빅클럽 소속이 아님에도 1군에 승선하여 메이저 대회를 치른 케이스도 찾아보면 꽤 있으니..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예 단 한 번도 소집되지 못한 점은 본인에게 매우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앞의 선수들은 꽤나 뛰어난 선수들이나 국대에서는 클럽만큼 확실한 실력을 보여주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아르테타의 미선발은 당시에도 꽤 뒷말이 나왔던 이야기였다. 수많은 드림클럽들이 거액을 써가면서 유명 선수를 영입하지만 특히 미드필더 부분은 실패가 참 많은데, 실력은 뛰어나도 육각형으로 어느 역할이나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선수는 극히 드물고, 그 밸런싱을 맞춰주는 선수가 매우 희귀함을 고려해볼때 현대에 있어 당시 아르테타의 가치는 재평가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마이클 캐릭이 빠진 맨유는 아무리 비싼 선수를 사오거나 역대 최고의 선수 였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데려와도 전성기 시절 중원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 이는 명확한 사실이다. [8][9] 아르테타가 활약할 당시 잉글랜드, 프랑스[10], 아르헨티나[11], 이탈리아[12], 포르투갈[13] 등 다른 국가대표 팀의 중원 구성원을 살펴보면 아르테타도 충분히 주전을 노려볼 정도의 기량이긴 했다. 황금세대의 스페인 대표팀 미드필더진에 훌륭한 선수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와서 문제였을 뿐.한때는 잉글랜드 귀화설이 나돌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미드진의 여러 문제로 인해 아르테타가 대안으로 떠올라 본인 또한 생각의 여지를 남겨놓았으나 과거에 스페인 연령별 대표팀에서 출전한 경력이 있었고 16세 이전에 잉글랜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해 FIFA가 정한 귀화 요건을 충족하지도 못했다. 결국 아르테타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발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1] 아스날은 이 시즌 이적시장 초기에 사미르 나스리, 세스크 파브레가스 등이 이적하고 제르비뉴,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 정도만 영입을 했었으나 시즌 초반에 좋지 못 한 성적에 전통의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8-2로 대패하는 충격적인 행보를 보여줬으며 결국 이적시장 종료를 3일 앞두고 아스날은 아르테타, 페어 메르테자커, 안드레 산토스, 박주영을 영입하고 요시 베나윤을 임대로 데려왔다. 이들 모두 꽤 급하게 영입한 것이었는데 특이점은 나름대로 분노의 영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 결과는 산토스와 박주영을 제외하면 모두 꿀영입으로 평가받았다.[2] 실제로 아르테타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래봐야 스페인 국대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젝서 타입의 수비형 미드필더라서 데뷔 초기엔 루벤 바라하, 다비드 알벨다같은 베테랑들에게, 현재는 사비 알론소와 마르코스 세나에 치어 국대에선 경쟁력이 거의 없어 잊혀졌다.[3] 2011-12 시즌에 그 전까지는 수비에 치중했던 송이 제멋대로 공격적인 역할을 도맡으면서 중원의 밸런스가 계속 깨지는 상황이었다.[4] 다만, 이 때는 아르테타가 영입되기 전이었다. 사실 이 경기를 계기로 아스날은 아르테타, 페어 메르테자커, 안드레 산토스, 요시 베나윤, 박주영 등을 영입하며 스쿼드를 급히 메꾸었다.[5] 참고로 티에리 앙리도 U-18 코치를 제의받았다.[6] 원문[7] 토니 애덤스 이후 처음인, 아스날의 진정한 캡틴이라 할수있다. 애덤스 이후 비에이라, 앙리, 갈라스, 파브레가스, 반 페르시는 모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일찍 팀을 떠났으며, 베르마엘렌은 아르테타 만큼의 영향력이 없었다. 아르테타 이후의 주장들도 메르테사커와 자카를 를 제외하면 전부 금지어이다. 코시엘니는 구단과 팬들에게 통수를 치며 안 좋게 나갔고, 자카는 팬들에게 욕설을 하고(물론 일부 팬들의 언행 역시 심하긴 했다.) 주장직을 박탈 당했다. 오바메양은 주장을 맡은 뒤 엄청나게 부진한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상습 지각으로 인해 주장직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다만 자카는 이후 주장으로써 좋은 평가를 하진 못할지언정 아스날 팬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팀을 떠났다.[8] 물론 앞에 서술한 미드필더 중에 아르테타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단 1명도 없다. 아르테타 역시 스페니쉬 미드필더 특유의 테크닉과 패싱력을 갖췄으며 템포 조절 능력 및 수비형 미드필더로 뛸 수 있을 정도의 수비력까지 보유하는 등 나름의 장점도 있는 선수였으나 결론적으로 아르테타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선수들이 훨씬 더 우수하게 해낼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 중원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패싱력을 갖춘 차비-부스케츠-알론소의 황금 라인업이었으며 이니에스타와 다비드 실바 역시 유틸성이 좋아 윙으로 올라간 것이지 중앙에서도 아르테타보다 부족한 점이 없었다. 후보 자원이었던 파브레가스와 카솔라 역시 연계와 조율 부분에 있어 아르테타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부족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아르테타가 비빌 수 있는 부분은 수비력인데, 이 마저도 막대한 활동량으로 궂은 일을 도맡았던 세나와 하비 마르티네즈가 있었고 부스케츠와 알론소 역시 각각의 스타일대로 훌륭한 수비력을 보여주었기에 수비 부문 조차 아르테타를 기용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모든 걸 다 제치고 보더라도 당시 공격포인트를 50개씩 기록하던 최전성기의 마타가 버티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르테타 입장에서 그나마 억울한 것은 09년 당시 국가대표 소집 예정이었지만 십자 인대 부상으로 낙마했던 것과 데 라 레드에 비하면 아르테타도 기량적인 부분에서 할 말은 있었다는 것 정도다.[9] 아르테타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선수들이 훨씬 우수하게 해낼 수 있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긴 하나, 문제는 정말로 육각형으로 밸런스가 잘 잡힌 미드필더, 일단 어느 자리에도 믿고 던져놓을 수 있는 선수는 아르테타가 거의 유일했으며, 정말 모든 면에서 아르테타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선수는 차비 에르난데스와, 사비 알론소, 다비드 실바 정도 뿐이다. 다비드 실바 또한 역습상태에서 수비력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들며, 다른 선수들은 기량 자체는 아르테타보다 뛰어날 수 있으나 밸런스면에서는 그보다 못한 부분도 많다. 마이클 캐릭, 제임스 밀너가 개인의 기량이 아주 출중해서 팀에서 중용되거나 대체불가능한 선수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듯이, 아르테타 또한 중원 밸런스를 맞추는데 있어서 기량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매우 희귀하고 귀중한 선수이다[10] 2006년 독일 월드컵 준우승 이후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국대는 처참할 정도로 암흑기를 겪고 있었고 2013년 이후로 다시 서서히 황금기가 시작됐다. 사실 프랑스 황금기 시절에도 아르테타는 충분히 주전 한자리를 먹을 수 있는 실력이다.[11] 리오넬 메시를 위시한 공격진은 훌륭했으나 미드필더진은 마스체라노를 제외하면 미흡한 면이 보였다. 특히 중앙 미드필더가 매우 부족했고, 이 문제는 로드리고 데 파울, 귀도 로드리게스, 레안드로 파레데스, 엔조 페르난데스, 알렉시스 맥 알리스터 등이 등장하는 2020년대에 와서야 겨우 해결되었다.[12] 2006년 월드컵 우승 이후 주전들의 노쇠화로 인해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르테타가 가면 에이스가 될 정도[13] 노쇠화된 데쿠와 폼이 떨어진 메이렐레스를 중용할 정도로 뎁스가 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