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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31대 군주 მირდატ | 미흐르다트 4세 | ||
제호 | 한국어 | 미흐르다트 4세 |
조지아어 | მირდატ | |
라틴어 | Mihrdat IV | |
생몰 년도 | 미상 ~ 411년 | |
재위 기간 | 409년 ~ 4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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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31대 군주.2. 생애
이베리아 왕국 28대 군주 아스파쿠레스 3세와 트르다트의 딸 사이의 차남이다. 형으로 파라스마네스 4세가 있었다. 39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두 왕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트르다트가 왕위에 올랐다. 406년 트르다트가 사망한 뒤 형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3년만인 409년에 사망하자 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 교회 복원에 온힘을 기울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형과는 달리 신앙 준수에 냉담했으며 교회 건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오만하여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는 우를 범했고, 그 바람에 411년 사산 왕조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쳐들어올 때 그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을 자처한 야즈데게르드 1세와 굳이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산 왕조군의 이베리아 침공을 묵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소규모 군대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했지만 얼마 안가 끝내 패배했다. 생포된 후 크테시폰으로 끌려가 곧 사망했고, 이베리아 왕국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산악 지대인 카케티 지역의 은신처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그의 아들인 아르칠리를 새 군주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