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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 Gerakan Rakyat Malaysia
1. 소개
말레이시아의 정당으로, 한때 국민전선(BN) 소속이었다. 과거에는 진보적 성향이 강했으나, 현재는 우경화되어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중도 ~ 중도우파 정당으로 바뀌었다. 이는 멕시코의 제도혁명당, 코스타리카의 민족해방당과 비슷한 케이스이며, 멀리 갈 것 없이 대한민국에도 안철수가 있다.약칭은 GERAKAN. 드물게 PGRM이라고 하기는 하나, PH나 PAN과는 달리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그나마 당사만 "Menara PGRM"이라고 하는 정도?
2. 역사
요약: 군소정당이지만 변화무쌍한 길을 걸어온 정당2.1. 창당 배경
현재 국민전선의 전신인 동맹당(AP)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만든 것으로, 말레이인을 대변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중국인을 대변하는 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MCA), 인도인을 대변하는 말레이시아인도인회의(MIC) 3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그들이 대변하는 민족들만 가입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민족이 섞인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있어봤자 민주행동당(DAP) 등 선명 야당들 뿐이었고.이러한 문제로 일부 당원들을 중심으로 민족적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DAP를 견제하는 정당의 창당이 요구되었으며, 한편으로 MCA의 대표였던 림총유가 UMNO의 대표이자 당시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대표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림총유는 오히려 MCA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MCA를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3당에서 추가 탈당자가 발생하면서 신당 창당이 본격화되었고, 이렇게 창당된 것이 통일민주당이었다. 한편 다른 세력들은 노동당을 창당하였다. 명목상 다민족주의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중국인에게 상당히 편중되었는데, 그러면서도 DAP를 견제한다는 심리 등이 겹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 오히려 이러한 점이 중국인이 다수인 풀라우피낭 주에 유리하다고 판단, 이들은 곧바로 풀라우피낭을 지역 기반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결과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도전한 1964년 총선에서 비록 국회의원은 1석만 건졌지만, 지금보다 의석수가 훨씬 적었던 당시로서는 그렇게 작은 의석이라고 막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동시에 치러진 지방선거(단, 사라왁, 사바, 싱가포르는 제외)에서 풀라우피낭에서 21석을 가져가 24석을 차지한 인민사회전선, 동맹당의 뒤를 이어 3당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정작 인민사회전선은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했고, 이는 내부의 분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당의 축을 구성하던 인민당이 전선을 탈퇴했고, 녹색주의를 표방하던 전당대회당이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휴점에 들어가면서, 유일하게 노동당만 남았다. 그러나 노동당마저 1966년 사실상 폐점을 선언하면서, 결국 연합 자체가 해체되었다.
결국 노동당원들이 집단 탈당을 선언했고, 때마침 미약한 기반에다가 인물난 등을 겪고 있던 통일민주당 또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이 DAP가 특유의 프로파간다로 중국인 유권자들을 대거 선동시킨 탓에, 중국인 표와 그들의 기반이었던 풀라우피낭의 민심도 DAP로 기울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사이에서 DAP 견제심리가 발동한 통일민주당과 노동당 탈당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합당 및 확대개편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마침내 1968년 3월 24일 지금의 민중운동당으로 대거 개편되었다.
2.2. 창당 초기 (1969년 ~ 1972년)
이렇게 해서 창당된 민중운동당은 1969년 총선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되었고, 8석을 얻게 되었다. 다만 전체 의석수가 104석에서 144석으로 늘어난 것이기에 총선에서의 힘은 상당히 미미했으며, DAP가 13석을 가져간 것에 비하면 상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풀라우피낭 지역의회는 24석 중 정확히 3분의 2인 16석을 가져갔으며, 당대표인 림총유는 이를 바탕으로 풀라우피낭의 주수상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합당이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당대표이자 실권자인 림총유는 MCA에서 나온 우파였지만, 당 자체가 좌파(노동당 탈당파)부터 우파(AP 탈당파)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무지막지하게 넓었으며, 이는 계파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민중운동당은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고, 명목상으로나마 좌파를 자처했는데다 프로파간다만은 전문이었던 DAP에게 계속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총선 직후 5.13 사건이라는 대규모 인종 폭동이 터지면서 인종 문제가 수위로 떠올랐고, 정국이 어수선했던 상황에서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하는 민중운동당은 힘을 잃기만 했다. 또렷하게 우파 스펙트럼을 유지하면서도 말레이인의 집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AP나, 좌파 행세를 했으면서도 프로파간다 스킬이 좋아 중국인의 지지를 받았던 DAP와는 달리, 이들은 둘에 밀려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즉슨, 민중운동당이 비록 풀라우피낭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었지만, 단순 특정 지역 기반 정당이 아닌 전국정당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략은 풀라우피낭에서는 먹혔어도, 타 지역에서는 먹히지 못했다.
결국 갈등을 겪다가, 1972년 노동당 출신 인사들이 대거 탈당했다. 이들은 사회정의당(PEKEMAS)이라는 신당을 창당하였고, 민중운동당은 덕분에 계파 갈등은 해결되었지만, 주요 기반을 하나 날림으로서 홀로 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스스로 망하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DAP와 연대하기에는 반감이 너무 심해서 할 마음도 없었고, 이제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본인들의 고장이었던 AP 앞에 백기투항하는 것 뿐이었다.
마침내 1972년 연말 이들은 AP 앞에 백기투항을 선언했다. 때마침 AP의 대표이자 총리였던 압둘 라작을 중심으로 여권의 확대개편이 추진되고 있었고, 민중운동당은 논의 끝에 새해에 창당될 신여권연합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73년 1월 1일 신여권연합인 국민전선(BN)이 창당되면서, 민중운동당은 이의 구성원이 되었다.
2.3. 전성기 (1973년 ~ 2007년)
중국인 중심이었지만 다민족주의를 표방하던 민중운동당은, MCA 탈당파[1]들을 대거 합류시킴으로서 그 세를 미미하게나마 불리기 시작했다. 극히 소수지만, 단일민족주의에 회의감을 느낀 일부 말레이인들과 인도인들도 추가적으로 합류해서, BN의 대표적인 중립파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1974년 총선은 민주행동당이 BN 소속으로서 처음으로 도전하는 선거였다. 국회의원은 1969년보다 3석이나 적은 5석만을 건졌고, 지역의회 또한 풀라우피낭에 한해서도 11석으로 BN이 가져간 23석, 전체 27석의 절반에 아깝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풀라우피낭 BN을 주도하는 정당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풀라우피낭 자민련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BN에 속하면서 비록 할당된 의석은 적었지만, 그래도 4 ~ 5석을 유지하면서도 풀라우피낭 자민련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민중운동당은 큰 문제 없이 나아갔다. 하지만 BN에 속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직면하게 되었는데, 일단 민중운동당의 본 고향인 MCA와 다시 한 집에서 살게 된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MCA 탈당파들이 대거 민중운동당에 입당한 결과 틈은 갈수록 벌어졌다. 결국 1978년 총선에서 민중운동당은 풀라우피낭 지역의회 의석을 상당히 날렸으나, 그럼에도 지역 정당으로서의 역할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갈등은 따로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BN의 주도정당인 UMNO가 풀라우피낭 주수상을 말레이인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림총유는 단단히 빡치게 되었고, 결국 BN이 민중운동당을 연정에서 축출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 때문에 풀라우피낭에서 기반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고, 1986년 총선에서는 민중운동당의 단독 의석수가 DAP에 뒤쳐지는 결과가 나오는 등 입지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990년 총선에서는 림총유가 본인의 지역구에서 DAP의 총재이자 실권자인 림킷시앙에게 밀려 패하는 굴욕 of 굴욕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지도력을 상실한 림총유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동시에 풀라우피낭 주수상직을 사임하게 된다. 명실공히 당의 창당주였기 때문에 당에게 있어서는 위기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인물은 넉넉했는지 코추쿤을 새로운 주수상으로 선출하면서 큰 위기는 모면하는 데 성공했다.
1995년 총선에서 7석으로 의석수가 살짝 늘어나기는 했지만, 당 내에서 이를 기회삼아 풀라우피낭 자민련 신세로 남지만 말고 전국정당화를 꾀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따라 이듬해 풀라우피낭에 있던 중앙당사를 쿠알라룸푸르로 이전했다. 일단 큰 변화는 없었지만, 1999년 총선에서 7석을 그대로 유지했다.
2004년은 민중운동당의 최전성기였다. 이 무렵 BN의 입지가 불안한 상태였고, UMNO에서 축출된 안와르 이브라힘 가문이 인민정의당(PKR)을 창당하고 DAP와 연대하는 등 불안한 조짐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총선에서 역사상 최대 의석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민중운동당 또한 비록 군소정당이었지만 10석을 건져 역사상 최대 의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BN이 분열하는 위기상황에서도 이러한 유례 없는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다들 2008년은 더 큰 승리를 거둘 것으로 보았다. 민중운동당 또한 입장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2.4. 몰락, 지역기반의 상실 (2008년 ~ 2017년)
2008년 당대표였던 림켕야익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코추쿤이 그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당을 이끌게 되면서 불안불안한 상태를 직면하게 되었는데, 안그래도 1998년 정치활동 금지 크리를 먹은 안와르가 복귀하는 해였는데다가 그의 일가족이 만든 PKR이 DAP부터 심지어는 또다른 범여권계 야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과 연대해 신설 인민동맹(PR)을 결성해 기반을 무지막지하게 확대하면서 BN으로서는 커다란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들 BN이 압승할 것으로 보았으나...뚜껑을 열어보니 BN의 전체 의석수가 개헌선인 3분의 2 밖으로 밀려나는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 것. 그나마 과반이라도 유지했던 BN 자체와는 달리, 민중운동당은 겨우 2석만 건져 진짜 듣보잡 정당으로 추락하기에 이르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풀라우피낭에서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건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도 모자라 지역의회도 한 석도 못 얻어 그나마 당이 지켰던 지역기반도 제대로 상실했다. 어이가 없는 건 그나마 얻은 2석도 당의 텃밭이 아닌 페락과 조호르에서 각각 1석씩 얻었다는 점. 여하튼 이 사태로 코추쿤은 18년 간 차지하고 있었던 풀라우피낭 주수상직을 사임했고, DAP 소속으로 림킷시앙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림관엥이 신임 주수상으로 올랐다.
참패한 BN은 대거 쇄신이 요구되었고, 결국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총리 겸 UMNO 대표는 주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를 결정했다. 당장 BN의 주도 정당인 UMNO가 상황이 이런데, 민중운동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당은 쇄신 작업에 들어간다 치고, 슬로건을 "한 마음으로 나아가자"로 교체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대표직이 연초부터 공석이었던 관계로 조기 전당대회가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조기 전당대회를 결정하여 신임 대표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임시 대표로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있던 코추쿤이 신임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이에 따라 당 내부의 반발이 가중되었다.[2] 여기다가 코추쿤은 BN 풀라우피낭 주 당협위원장직을 겸하게 되면서 이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속마음이 어땠을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2013년 총선은 안그래도 불안한 BN 전체를 더 불안에 빠뜨렸다. 일단 과반 의석은 건졌지만, 턱걸이 과반이었으며 심지어 득표율은 PR이 앞서는 상황이 벌어진 것.[3] 그리고 민중운동당은 단 1석만 얻었다. 그것도 2008년 조호르 주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리앙텍멩. 이로 인해 코추쿤은 당대표 및 BN 풀라우피낭 주 당협위원장직을 둘 다 사퇴해야만 했다.
총선이 끝나고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2013년 10월 마시우키옹이 신임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풀라우피낭이라는 지역 기반도, 중국인이라는 인종 기반도 상실한 상태에서 선출되었기 때문에, 출발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연치 않은 호재를 맞이했는데, 2014년 틀룩인탄의 국회의원을 지내던 DAP 소속의 시아리옹펭이 임기 중 사망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된 것. 1999년부터 이 지역구의 의원을 지내다가 2008년 패해 물러난 마시우키옹은 2013년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재도전을 선언했고 BN은 그대로 그를 공천했다. 하지만... 당연히 의석을 하나 잃어버린 DAP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그것도 DAP는 자당의 말레이인인 디아나 소프야를 공천하는 전략을 취해 BN을 크게 위협했다. 그간 "BN=말레이인, DAP=중국인"이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깨뜨린 선거였던지라 초접전까지 갔으나...
마시우키옹이 극적으로 승리했다. 50.3%를 얻어 49.7%를 얻은 디아나를 떨어뜨리고 6년 만에 자신의 지역구로 복귀한 것. 이 덕에 민중운동당의 의석수는 2석으로 늘어났고, 마시우키옹의 리더십은 미미하지만 더욱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반짝 인기였는지, 곧바로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5년, 나집 라작 총리 겸 UMNO/BN의 대표를 중심으로 부패 논란이 불거지면서(일명 1MDB 게이트라고 부른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마하티르 모하마드 등을 위시로 한 UMNO의 비주류가 당에서 출당되면서 BN의 기반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출당된 이들이 통일원주민당(PPBM)을 창당하고 신야권연합인 희망동맹(PH)에 가담하면서 UMNO/BN이 불안한 상황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2016년에는 나집 총리 겸 BN 대표가 민중운동당의 연차주주회의에 참석하지도 않는 등 BN 내부에서의 입지 또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집 총리는 참석하지 않는 대신 2분 짜리 짧은 비디오에만 등장했는데, 그간 연합 내의 타 당의 연차주주회의에 참석하던 나집 총리가 민중운동당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안그래도 BN이 비말레이인, 비무슬림의 지지를 잃게 되면서 차라리 주요 지지층인 말레이인·무슬림만 노리는 쪽으로 돌리려는 차원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집 총리는 2015년 PR에서 축출된 PAS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등 말레이인·무슬림 연합 구축에 나섰고, 말레이·이슬람 색채를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는데, 그런 나집 총리가 중국인 중심의 민중운동당을 방문하는 것은 오히려 BN이 중국인 색채가 강화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 몰락 (2018년)
이렇게 서서히 몰락하던 민중운동당은 2018년 당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태가 나빠지게 되자 BN은 민중운동당 후보 수를 이전보다 더 적게 공천했고, 지역기반인 풀라우피낭 또한 UMNO 쪽 후보를 더 내는 등 이제는 지역기반을 제대로 상실했음을 보여주게 되었다. 신 야권연합인 PH가 더 큰 힘을 발휘하면서 초접전이 된 선거였지만, 전문가들은 BN이 근소하게 승리할 것으로 보았고, 여론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중운동당 소속 2명은 기죽지 않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뚜껑을 열어보니 민중운동당은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2명도 본인의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조호르의 유일한 의원이었던 리앙텍멩은 PPBM의 마스즐리 말릭에 약 9% 정도 밀려 떨어졌고, PAS의 후보인 모하마드 주브리 슬라맛과의 득표율을 합쳐도 50%에 도달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 대표인 마시우키옹은 자신의 지역구인 틀룩인탄에서 응아코르밍에게 약 21%라는 큰 표차로 떨어졌다. 게다가 총선 자체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PH가 과반을 가져갔으며, BN은 창설 41년, UMNO 단독 또는 AP 시절을 포함할 경우 독립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상실한 것.
이로서 민중운동당은 창당 이래 최초로 원외정당으로 추락하는 굴욕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말레이시아도 대한민국처럼 원외정당으로 추락할 경우 보조금이 대폭 삭감된다. 게다가 BN 자체가 통째로 야권이 되었으니, 의석수가 여야 위치를 좌우하는 말레이시아에서 BN 자체의 보조금도 예전보다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
총선 이후 슬랑오르 주당의 청년대표인 이반팔 싱 그레왈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심지어 한때 당의 지역기반이었던 풀라우피낭의 지역당사 매각을 검토하는 등 상황이 영 좋지 않다. 일단 마시우키옹이 당대표직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당 내부에서 일부를 중심으로 사퇴를 주장하는 듯.
일각을 중심으로 민중운동당이 조만간 BN을 탈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BN이 참패한 직후 구성원이던 통일파속모모군카다잔무순조직(UPKO), 사바통일당(PBS), 민중연합당(PBRS), 자유민주당(LDP), 인민진보당(myPPP)이 BN을 탈퇴했다. 다만 이들은 사바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이므로 번외로 보기는 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BN의 구성원이 탈퇴한 만큼 민중운동당도 향후 거취를 주목해 봐야 한다. 구성 정당이 탈퇴한 경우는 아니나, 일부 UMNO 당선자가 PPBM 등지로 이적하는 등 당원들이라도 탈당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대한민국보다 정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말레이시아답게, 이득에만 매달리는 철새 행각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지만, 다들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4] 한때 애증관계였던 MCA나 MIC도 의석수가 각각 1석과 2석으로 추락하면서, 이들과 동반 탈퇴한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여하튼 현재로서는 섣부른 판단은 해서는 안 되겠으나, 이미 가망이 없어진 것은 뻔하다. 풀라우피낭 주민들도, 중국인들도, 예전처럼 민중운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5]
결국 BN을 탈퇴했다. 일단 본인들 말로는 PH에 참여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므로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1] 말이 탈당파지, 대부분은 MCA에서 출당된 사람들이었다.[2] 이로부터 약 10여년 뒤 대한민국에서 대선에서 패배한 야3당 후보들이 자당의 대표가 되는, 이 시절 민중운동당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당연하겠지만 상황은... 말을 말자.[3] 물론 PR은 이를 부정선거로 규정했지만, 이들이 "투쟁"이라고 한다는 것이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데다, 이들이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면서 내세운 "증거"가 엉터리임이 훗날에 밝혀졌다. 그리고 멀리 갈 것 없이 대한민국의 1988년 총선과 2016년 총선처럼 의석 순위와 득표율 순위가 반대인 경우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4] 사족이지만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도 빼도 박도 못 하는 철새이기에...[5] MCA도 마찬가지다. 이미 중국인들은 BN 자체를 버렸다. 앞으로 BN이 말레이인·무슬림만 집중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데, 단순히 일반인들 사이에서만 나도는 소문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