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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 직할 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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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군주가 존재하는 주 | |||
말레이시아의 주 | |||
| <colcolor=#fff> 은총의 거처 페락주 نڬري ڤيرق دار الرضوان Negeri Perak Darul Ridzu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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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fff> 주기 | 문장 | }}} | |
| 위치 | |||
| 면적 | 20,976km² | ||
| 인구 | 2,500,000명 | ||
| 인구밀도 | 120명/km² | ||
| 주도 | 이포 | ||
| HDI | 0.798 | ||
말레이어:Perak Darul Ridzuan
말레이어 자위 문자:ڨيراق دار الرضوان
중국어 간체/번체: 霹雳/霹靂
타밀어:பேராக்
Perak Aman Jaya/ڨيراق دار الرضوان
평화와 번영의 페락
평화와 번영의 페락
1. 개요
말레이시아 서부 내지 북부 일대에 좀 길게 뻗어있는 주로 "페라크"라고도 알려져 있다. 별칭은 "Darul Ridzuan"으로 뜻은 "은혜의 집"이며, 주도는 이포이지만 왕실 수도는 쿠알라캉사르이다.쿠알라룸푸르에서 풀라우피낭 가는 길에 위치한 주로 한국의 황해도에 해당되는 주. 다만 동북쪽으로 좀 길게 뻗어져 있고 태국과 국경을 접한다는 점이 다르다. 훌루 페락이 바로 그 곳인데 이 곳은 오히려 자강도에 더 가까운 주. 틀린 말은 아닌게, 이 쪽은 흔히 알려진 페락 방언과는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오히려 크다 방언에 더 가깝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네 번째로 큰 주이고, 서말레이시아에서는 파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주. 수도권인 슬랑오르와 인접해 있어 쿠알라룸푸르의 막강한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느그리슴빌란에 비하면 다소 약하며 오히려 쿠알라룸푸르와 피낭 사이에 끼어있어서 그런지 이들에 비하면 좀 무시당하는 신세(...)이다. 다만 느그리슴빌란의 경우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의 개항으로 더 발전하게 된 것이며, 이전에는 그 쪽도 많이 낙후된 편이었다.
라트의 캄펑의 개구장이는 이 주 킨타 계곡에 있는 시골 고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도시의 개구쟁이는 도시 이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현대 말레이시아에서 페락 주는 캄펑 시리즈로 유명하다.
2. 어원
은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주의 이름인 '페락'이 말레이어로 '은'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중국인 광부들이 쿠알라룸푸르와 슬랑오르에서 광산을 발견하는 바람에 몰락했다.3. 역사
페락은 역사적으로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과 내륙 자원의 풍부함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고대에는 토착 말레이 왕국과 인도양 및 중국과의 교역 네트워크 속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15세기 무렵 믈라카 술탄국의 영향 하에 편입되면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유럽 식민 세력들이 동남아시아 해상 교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페락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여러 외세의 관심을 받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 동인도회사가 말라야 반도의 주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페락은 영국과 현지 통치 세력 간의 동맹과 충돌의 무대가 되었다. 1873년 페락 내 분쟁으로 라자 압둘라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1874년 팡코르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이 페락 술탄을 인정하고 통감을 파견해 내정과 조세 수입을 관리하게 되었다. 제임스 버치가 첫 통감으로 임명되었으나, 현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술탄 및 관리들을 경시해 반감이 생기자 1875년 버치가 암살되었다. 영국은 군사 캠페인을 벌여 관련 인물들을 체포·처형하고 술탄과 관리들을 세이셸로 추방했으며, 이후 술탄은 1922년까지 말레이 반도로 복귀하지 못했다.특히 주석과 은광을 비롯한 광산 자원이 풍부했던 덕분에 경제적 중요성이 크게 증가했다. 1874년에는 영국과 페락 주지사 간에 정식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의 보호령으로 편입되면서 현대 행정 체계가 도입되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주석 광산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여 중국계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또한 1893년부터 일본인들이 유입되어서 페락의 중심 도시인 이포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들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영국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 철도와 도로 등 기반 시설이 건설되어 경제 활동과 내륙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하면서 페락 역시 일본군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주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이 1945년 항복한 후 말레이 술탄국들은 불안정해졌고, 민족주의와 독립 요구가 확산되었다.
전쟁 중 태국이 점령했던 네 개의 말레이 주는 미국의 제안과 경제 지원을 조건으로 영국에 반환되었다. 공산당 소속 MPAJA는 일본에 맞서 싸웠고 전쟁 후 대부분 포상을 받았으나, 페락 출신 친펑이 당을 장악하면서 급진화되었다. 친펑 지도하의 MPAJA는 일본 협력자로 간주한 주로 말레이인들을 살해하며 인종 갈등을 촉발했다.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연방이 출범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정부, 공산주의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가 군대를 배치했으며, 페락 인근에서는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다. 1968년 두 번째 공산주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페락에서는 이전 공산주의자들이 태국 국경에서 내려와 훌루 페락 지역을 공격했다. 주 정부 정보국은 두 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심리전 캠페인을 전개했다. 영국 통치 종료 후 페락에는 공장과 신도시가 건설되었고, 한편으로는 이슬람화가 진행되며 종교 단체, 학자, 교사, 재판관들이 왕실과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말레이 권리 의식과 현재 사회적 태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