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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


1. 말레이시아 페락주의 시

파일:external/blog.kudoybook.com/Ipoh_8501.jpg
[1]

Ipoh[2]

말레이시아 제8의 도시[인구는]. 1988년 5월 27일 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조지타운쿠알라룸푸르에 이어 말레이시아의 세 번째 특별시가 되었다.

풀라우피낭을 제외한 서말레이시아에서는 드물게 중국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몇 안되는 도시인데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인구의 44.1%로 가장 많다. 물론 이 도시 자체가 중국 청나라에서 온 광부들을 중심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절반 이상인 도시라서 정체자 한자 간판이 즐비하며 기독교불교가 굉장히 교세가 크다. 기독교식 결혼식을 흔히 볼 수 있고 절과 도관 역시 많다.

이 때문인지 요리나 문화 등을 보면 중국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쿠알라룸푸르 수도권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호펀이나 화이트커피 등의 기원이 바로 여기다. 자세한 것은 이포 요리를 참조. 물론 여기서의 중국은 청나라를 얘기하는 것이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술탄 아즐란 샤 공항이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데 페락 주의 유일한 공항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직항이 없는 관계로 싱가포르 창이 공항을 거쳐야 하는데 워낙 싱가포르를 오가는 수요가 많아 노선은 계속 추가 중이다. 헌데 이 공항이 대구국제공항처럼 시내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이포시 자체가 고도제한에 걸린 바람에 고층건물이 없어서 많이 심심해 보인다. 쿠알라룸푸르의 고층빌딩군과 비교되게 심심하다. 게다가 공항이 주거지와 밀집해 있어서 민원도 장난 아니게 많다. 이 때문에 스리이스칸다르타파와 같은 위성도시에 신공항이 검토되었으나 무슨 일 때문인지 지금은 아무런 말 없다.

2006년 말레이시아 항공은 이포공항의 운항을 중단했다. 말레이시아 항곡은 이포공항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했다.

말레이시아 1번 고속도로가 근교의 도시나 다른 주(쿠알라룸푸르의 남쪽)와 이포를 연결하고있다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면 여기에 친척이 사는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주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은데 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태국인들이 모여서 사는 동부 카통과 겔랑, 칼랑 일대에 굉장히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이포는 항상 평균 최고온도가 30도가 넘으며, 최저온도는 2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강수량은 고른 편으로, 평균 강우량은 10월에 297.2mm로 가장 많고,1월에 132.3으로 가장 적다.[4]

1.1. 역사

1720년대에 킨타 강가의 마을로서 탄생했다. 2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는 초기의 광산의 마을과 비교하면, 당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1720년에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체계적인 계획인, '이포 위생 회의'의 설립을 신청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영국의 주석 광업 회사가 이포에 설립되었던 것이 전환기가 되고, 이포는 주목받게 된다. 1902년에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과 같은 유력한 기업들은 이포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대표적인 회사들로서는, Botly and Co., A.H Whittaker & Co., Chartered Accounts, Evatt & Co., Estate Visiting Agents Milne & Stevens started 등 식민지 시대보다 많은 회사가, 호황기의 이포에 오피스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주석이 매장되는 킨타강의 계곡이라고 하는 지리적 조건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성장의 중심으로 했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급속히 발전을 이루었다. 1930년대의 초기, 현지의 객가인 대부호 Yau Tet-Shin는, 오늘 신시가로서 알려져 있는 킨타 강가의 동쪽에서 대략 그린 타운까지의 큰 공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15일, 일본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일본 통치 시대의 사이, 이포는 페락주의 주도(州度)로서 역할을 계속 하였다.

1942년 3월, 일본군에 의한 페락주 총독부는 St. Michael's Institution에 세워졌다. 영국군에 의해 말레이시아가 해방되는 날까지, 페락주의 주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에는, 극장, 유원지, 그리고 많은 나이트 라이프의 급증에 의해 거리수준이 높아졌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그룹인, 쇼 브라더스사는 영화 체인을 이포에 설립했다. 또 페낭,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와 함께 말라야항공(현재의 말레이시아 항공)에 의해 연결되는 4개의 도시중 하나였다.

주석 가격의 하락과 1970년대 후반 주석광의 폐쇄에 의해, 성장은 정체하게 되었고, 말레이시아의 다른 지역 (특히 쿠알라룸푸르등의 도시권)과 싱가포르같은 지역으로부터 많은 젊은 인재의 유출을 가져왔다. 이포의 경기는 죽었다고 할 정도로서, 정년 후에 사는데 적합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이포를 현대적인 거리로 재개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교외지역에 새로운 개발이 있을 때마다, 도시는 끊임 없이 개발되고 있다.

1.2. 대중 문화

라트도시의 개구쟁이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꽤 잘나가던 도시여서 전작인 캄펑의 개구쟁이에서도 '이포에서 온 카바레 댄서' 같은 언급이 등장하며 본작에서도 규모가 있는 도시로 묘사된다.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곳답게 화교 캐릭터도 비중있게 등장한다.[5]

1.3. 출신 인물

  • 유소프 빈 이샥 - 싱가포르의 초대 대통령. 이포에서 자랐고 나중에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애초 같은 해협식민지 일원이었다.
  • 양자경 -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홍콩 영화계의 액션스타였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 등 서구권 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아시아계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배우. 조부모 세대 시절 중국에서 이포로 이주해 자리잡은 집안 출신으로, 이포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이포에서 성장했다.

2. 대한민국의 지명

2.1.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법정리

梨浦里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에 속한 법정리로, 지명은 남한강에 있었던 나루터인 이포나루에서 유래하였다. 인근에 이포보, 이포대교가 있으며, 광주원주고속도로나들목 중 하나인 흥천이포IC의 이름은 여주시 흥천면과 이포리에서 따서 지어진 것이다.

2.2.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법정리

梨浦里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에 속한 법정리로, 노화읍사무소가 있는 곳이다.
[1] 지도에는 에포라고 써져있지만 막상 구글에 에포라고 치면 안나오고 이포라고 쳐야지 나온다. 말레이시아 사람들도 이포우 라고 발음한다.[2] 화교들은 怡保(이보)라 부른다.[인구는] 3번째로 많다. 872,000명[4] 서울은 1월 강수량이 18.4mm로 가장 적고, 7월 강수량이 431.7mm로 가장 많다[5] 조호르바루, 믈라카, 쿠칭, 코타키나발루, 페낭, 쿠알라룸푸르 등도 대도시답게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많지만, 이포는 페낭과 함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가장 많은 도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