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계양(朴啓陽) |
본관 | 반남 박씨[1] |
생몰 | 1888년 4월 28일 ~ 1937년 12월 17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2] |
사망지 | 경상북도 영주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포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계양은 188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음력 9월 상순 경북 문경군 농암면 소재 신철균(申喆均)의 집에서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제목으로, '조선독립에 대해서 영미영사(英美領事)가 실력을 빌려 줄 것을 허락하였고, 또 경성에서 독립운동 청년단이 형사를 체포하였다’, ‘일반 동지는 뜻을 강하게 하여 시기의 도래를 기다려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문서를 제작하여 각 면사무소 등에 배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하여 1920년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주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7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박계양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