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기벽(朴基闢) |
생몰 | 1915년 ~ 1999년 6월 2일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카운티 리들리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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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2. 생애
박기벽은 1915년경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재학당을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9년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인천항에서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영주권이 없어서 배에서 내리지 못하다가 대한인 국민회의 보증을 받고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이후 1939년 12월 30일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한 그는 그곳에서 학업을 수행하다가 1943년 3월 미군 육군에 입대해 미시간대학에서 일본어 교육, 무기 조작법, 비무장 전투법, 지도 읽기,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일본인의 특성 파악 등 정보하사관 훈련을 마친 뒤 중국,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적정 수집, 일본군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또 전쟁 막바지에 정글에 버려진 일본군 위안부들과 강제 징용된 학도병들이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5년 2월 미 육군 하사로 진급한 박기벽은 OSS 요원이 되어 캘리포니아주 남부 카타리나 섬에서 한국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에 참여했다. 이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은 각각 5~10명의 공작조로 나뉘어 서울, 평양, 평안남도의 농촌 지역 등 국내 각지에 투입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은 중단되었고, 그는 1945년 9월 중사로 제대했다.
전쟁 후 1950년대부터 197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중부 리들리 김형제회사(Kim Brothers Company)에서 근무했으며, 은퇴 후엔 리들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9년 6월 2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리들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박기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박기벽의 딸 실비아 박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로 활동했고, 아들 잔 박은 오스나드 해안경비대에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