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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백

파일:박노백.jpg
성명 박노백(朴魯珀)
이명 박형채(朴炯採, 朴炯埰, 朴炯采)
본관 순천 박씨[1]
생몰 1903년 2월 3일 ~ 1958년 1월 20일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하남면 장수리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2]
사망지 전라남도 광산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주요 시기 별 재일 조선인 독립운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노백은 1903년 2월 3일 전라남도 광주군 하남면 장수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25년 10월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으며, 1927년 3월 15일 재동경동부노동조합(在東京東部勞動組合)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신간회 동경지회 설립대회에 참석하여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해 총무간사, 학생부 간사 등을 역임했다.

한편, 그는 1927년 12월 18일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정기회에 참석하여 위원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방학 중에는 중국 간도(間島) 훈춘시 등지로 순회강연회를 가기도 했다. 이후 그는 조선 민족이 독립하려면 우선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낙종(朴洛鍾), 안광천(安光泉), 한림(韓林) 등과 교류했고, 1927년 10월 하순경 신간회 동경지회 사무소에서 김상혁(金相赫)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고 후카가와(深川) 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박노백은 후카가와 야체이카 구성원인 김황파(金荒波), 임종웅(林鍾雄), 이우진(李愚震) 등과 수회에 걸쳐 회합하고, 1928년 5월 인정식(印貞植)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책임비서가 되자 조선유학생학우회내에서 활동했다. 1928년 8월 29일, 박노백 등 고려공산청년회 회원들은 반일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신간회 동경지회, 조선유학생 학우회, 그리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회원들을 참여시키기로 했다. 이윽고 8월 29일 오후 9시경, 도쿄 사곡구 신숙 소재 무장옥 백화점 옆에서 한인 150명이 모여 도로로 나아가 혁명가를 고창하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그 배후에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했다.
박노백은 1928년 11월 초순 체포되었고 1931년 3월 3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4월8일 2심에 불복 공소(控訴)하여 임시로 풀려났다가 탈출하였다.

1946년 2월15일 중앙민전 결성 시, 전남대표로 참석했다.(광주시사 3권 제11편 광복과 대한미국 제1장 서설 제1절 해방과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노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주요 시기 별 재일 조선인 독립운동

1. 1925~31년 시기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조직의 발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조직운동의 성과에 기초하여 발전했다.
1925년에서 31년 시기 재일본 조선민족해방운동사에서 조직의 중심은 일월회->조선공산당 일본부->조성공산당 일본총국->'재건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무산자사·'일본출판부'로 이전되었다.
이 가운데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일본총국이 주도하던 시기에만 통일적인 활동이 야체이카와 플랙션을 통해 전개되었다.
다른 시기에는 지역단위의 분산적인 움직임이 있었을 뿐이다. (김인덕 저,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연구 p.321)
조선공산청년회의 조직은 당 조직의 전면적인 확대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통일적 발전의 한 요인이 되었다. (김인덕 저,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연구 p.322)

2. 1925~31년 시기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지속적인 발전과 방향전환
1927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적 지도부였던 조선공산당 일본부는 내용적 지도를 시작했다.
공산주의계가 지도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노동운동은 일본의 노동운동사에서 보이는 것 같은 경제적 요구를
주안점으로하는 토쟁보다 재일조선인이 처한 민족·정치적 조건에 따라 정치적 성격이 강한 투쟁이 보다 많았다.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조직강화가 도모되어 야체이카와 플랙션을 통해 직접 대중단체의 지도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일본총국의 지도로 조선인단체협의회, 삼총해금동맹의 연대 투쟁도 계속되었다.
이와함께 국내와 조직, 사상의 지속적인 교류가 도모되어 재일조선인의 투쟁력이 재고되었다.
(김인덕 저,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연구 p.326~327)

3. 1925~31년 시기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의의
1928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지도아래 통일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된 운동의 고양기로
재일조선인의 투쟁력이 만개했다. 지역적 특수성에 기초하여 전개된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계급적모순이 민족모순보다 우선적으로 작용했고 결국 투쟁도 이와 함께 강화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인의 투쟁경험은 조선 내에 유입되어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한 토양이 되었다. 재일조선인은 대거 국내로 들어와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복무했다.
이렇게 국내로 들어온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경험을 이식했다.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 운동세력 양성의 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

※ 1925년에서 1931년은 전체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에서 살펴 볼때 조직적 발전이 가시적으로 나타났으며 통일적 중앙 조직의 출현과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이 계속 되었다.
이와 함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조직 활동은 국내 운동의 발전과 함께 하며 동시에 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추동했다.

재일조선인의 투쟁은 지속적인 국내운동에 대한 지지·지원투쟁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보다 강화시켰으며 일본공산당을 비롯한 일본사회운동 세력과의 연대투쟁은 일상적인 요구와 소위 정치투쟁 그리고 전면적인 반제투쟁을 통해 일부분적으로 국제주의를 실현하기도 했다. (김인덕 저,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연구 p.331~333)

박형채(박노백)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사회주의 단체를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때 그 단체를 통해 민족해방운동(독립운동)을 했음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의 활동 이후 1946년에는 광주에서 중앙민전 결성 시, 전남대표로 참석하여 잔존해 있던 친일세력을 몰아내는데 그 뜻을 계속 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1] 22세손 노(魯) 항렬.[2] 인근의 안청동·진곡동·오산동·장덕동·하남동과 함께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현동도 이 마을 출신이다.